존재의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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끄적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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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min readApr 12, 2017

불꽃놀이처럼 주변은 어둡지만 갖가지 색을 뽐내는 번화가 새벽 5시, 불꽃놀이는 끝이 났고 어두운 골목길 환한 가게 하나 그리고 써진 ‘24시간 영업’

‘에이 씨, 오늘도 실패야’

‘연속 3일째 허탕이라고 답답하다 답답해’

‘대체 얼마나 힘을 풀어놨길래 말을 안 들어?’

‘그냥 몸값이 올라간다고 긍정적으로 생각해야지 뭐…’

‘이런 답답한 공간에서 몇 개월 썩고 있을 바에 차라리 유치원에서 귀를 뜯기는 게 낫겠어.’

“미안해요…오늘도 여러분들 탈출을 도와주지 못했어요…”

내가 태어나던 순간 마지막 관문인 불에 녹여지기 전에 무엇이 되고 싶냐는 엄마의 물음에 사람들에게 쓸모 있는 존재요! 라는 대답을 했다. 그리고 의식을 잃었고 난 집게가 되어 있었다. 너무 행복했다. 사람들에게 쓸모 있는 존재가 되겠구나! 행복을 주며 가치 있는 존재가 되겠구나! 라고

하지만 내 몸이 완전체가 돼가면서 점점 힘을 잃어갔고 주인님이 웃으며 ‘내 돈줄 잘 부탁한다’라는 말을 한 그 순간 깨달았다 나는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오늘은 30번째에 힘이 생겨요. 그때 잘 계산하시고 저 딱 잡으세요.”

‘거 참 잘 잡으면 뭐하나 문 앞에서 힘이 빠지는데, 어떻게 스스로 힘이 생길 방법은 없어?’

‘이번에는 날 뽑아주면 안 될까? 여기 온 지도 몇 개월이야…이 근처로만 와줘’

“아시잖아요…저한테는 권력이 없다는 거, 그리고 영감님 저도 가고 싶지만 절 옮기는 건 사람인걸요.“

매일 아침 주인님이 나를 새롭게 만들어 놓으면 가족들의 불만이 시작된다. 사람들을 우리를 얄밉다, 우리를 놀리는 것 같다고 욕을 하지만 사실은 그 반대다. 오히려 우리 가족은 세상에 나가 즐거움을 주는 인형 본분을 다하고 싶어 한다. 나가지 못하는 답답함을 주인님에게 표출할 수 없어 나에게 표출하는 것일 뿐. 우리는 서로 잘못이 없다.

‘영 잘하는 사람들이 안 오네. 오늘은 자네 손 한 번 못 만져보고 지나가겠어.’

“이제 30번째예요. 어느 쪽으로 갈지 모르니 다들 긴장하고 계세요. 오늘의 마지막 기회일 수도 있어요”

‘난 눈만 찌르지 말아줘! 저번에 눈을 집어서 온종일 앞이 안 보였다고’

몇 시간 만에 내가 힘이 강해지는 순간이 왔다. 가족들에는 탈출의 기회를 나는 사람들에게 행복을 줄 기회다. 기계에서 노래가 나오고 서서히 오른쪽으로 움직인다. 30번째 움직이는 나는, 아까 와는 틀리다 힘이 들어가 있고 총명하다. 이대로라면 가족들의 소원을 이뤄 줄 수 있을 것 같다. 오른쪽으로 한 걸음만 가면 이 박스 안에 가장 오래 있던 영감님을 잡을 수 있다. 한 걸음만 더…

‘툭’

고개를 돌려 박스 안을 보니 명랑한 표정으로 서 있는 초등학생 남자아이. 빈 공간에 착지하는 그 짧은 찰나 쏟아지는 가족들의 탄식 그래도 아직 가능성은 있다. 힘이 들어가 있는 나이기 때문에 이대로라면 영감님 손을 잡고 끌어낼 수 있다.

‘퍽’

영감님 손을 잡은 순간 박스를 쳐버린 아이, 그 울림에 난 손을 놓치고 말았고 기다린 끝에 온 탈출 기회는 이렇게 허무하게 지나가 버렸다.

“미안해요, 영감님 이번에는 진짜 잘하려고 했는데…”

‘괜찮아… 노력 많이 한 거 다 알지 이번엔 나가나 했는데 아쉽구려…’

‘에휴 이제 30번을 어떻게 채우나 영감님 우리 그냥 여기서 죽을 생각해야 하나 봅니다’

‘자네 너무 그러지 말아. 우리만큼 속상한 게 집게일 텐데 우리까지 그러지 말자고’

쓸모 있을 것으로 생각했던 내 존재가 점점 쓸모가 없어지는 기분이다.

새벽 4시, 술에 취한사람들도 저마다 잘 곳을 찾아가고 술을 팔던 사람들도 집으로 돌아가는 시간. 그리고 우리가 가장 우울한 시간. 이제 해가 뜰 때까지 찾아오는 사람은 손에 꼽히기 때문에 사실상 오늘의 성공 수는 0이다.

‘오늘은 여기를 털어 볼까…?’

모두 상심에 빠져 잠자리에 들려는 순간 들리는 목소리. 가능성 있어 보이는 말에 가족들과 나는 설렘을 감추지 못한다. 저 사람이라면 나를 쓸모 있는 존재로 만들어 줄까?

가게를 한 번 둘러보던 남자는 기웃거리다 내 앞에서 주인님이 하던 행동 그대로 버튼을 누르고 있다. ‘삑’ 몇 번의 기계음 소리 후 나오는 노랫소리. 내가 처음 주인님을 만났을 때 들은 소리다. 그리고 지금 새로 태어난 것처럼 완전히 힘이 들어간다. 이대로라면 여기 있는 가족들의 소원을 이뤄주고 나도 쓸모 있는 존재가 될 것 같다.

‘어이! 내 짜증 받아 주느라 고생 많았어! 매번 노력하는 거 다 알고 있었네, 잘 지내고 막상 나갈 때 되니까 아쉽구먼, 난 이제 가볼게!’

‘자네 고생 많았네, 가장 먼저 들어와서 가장 마지막에 나가는구려, 잘 지내게’

마지막 영감님을 끝으로 나는 처음이자 마지막 소원을 이뤄줬고 이뤘다. 내일 텅텅 비어있는 상자를 보면 주인님은 어떤 표정을 지으실까? 기뻐하시며 새로운 가족들을 만들어 주실까? 내가 태어나 가장 쓸모 있었던 순간이었다.

‘제기랄! 이게 무슨 일이야! 어떤 미친놈이!!!’

밤사이 설레서 잠자리에 들지 못했다. 모두 다 내쳐 쓸모 있어진 날 본 주인님의 모습은 어떨까 하고, 기뻐하며 새로운 가족들을 넣어줘 그들에게 그리고 사람들에게 쓸모 있는 존재가 되게 만들어 주실까? 하고 하지만 날 보며 불같이 화내신다. 쓸모없는 취급을 하며 어디론가 전화를 건다.

‘요즘 적자라 안 그래도 골칫덩어리인데, 넌 그걸 다 빼내고 앉아있냐, 에라 이 쓸모없는 것 거기 고물상이죠? 인형 뽑기 기계, 1년도 안 된 거 얼마에 쳐 주쇼?‘

아주 당황스럽다. 쓸모 있는 행동을 했는데 쓸모없다니 그동안 나는 누구였으며 내 가치는 어떤 거였지? 힘이 없는 나는 그 불안한 상태에서도 내 할 일을 해내면 그것이 내가 살아가는 이유라고 생각했는데 나는 그냥 죽어있는 상태로 있어야 하는 게 나였을까…?가족들의 행복이 곧 나의 행복이라고 생각했는데 나는 그 가족에 끼면 안되는 게 나였을까?

‘생각보다 너무 깨끗한데요? 잘만 만지면 쓸모 있겠네요.’

‘아예 못 쓰게 해 놉디다. 형씨 능력대로 고쳐서 쓰시던가 하쇼. 난 이 금액이면 되니까’

나는 트럭에 옮겨진다. 몇 개월 만에 맡아보는 바깥공기. 분명 쓸모가 있겠다고 했다. 새로운 주인님을 만나 이제 나는 나대로 살아가는 것이다. 이제 진정한 내가 될 것이다. 또 한 번 노랫소리가 들린다. 그리고 처음 주인님을 만났던 그때처럼 힘이 점점 빠진다.

아…엄마 사람들에게 필요한 존재가 되려면 나는 죽어있어야하나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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