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 회사의 CSO

이직 후 10개월. 좋아하는 길을 걷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Jungkwon Ahn
보통 회사의 CSO
7 min readJan 23,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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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ief Sustainability Officer(최고지속가능성책임자).

지금 회사에서 내가 맡은 직책이다. 해외에는 많지만 우리나라 기업들 중에는 찾아볼 수 없는 직책이기도 하다. 그래서 입사하자마자 했던 첫 공식 업무가 회사 블로그에 CSO 포지션에 대해 소개하는 글을 포스팅하는 것이었다.

CEO는 내가 회사에 합류하기 전이 이렇게 말했다.

여러 회사의 CSR과 지속가능성 역량을 길러 주는 것도 좋지만, 우리 회사에 들어와서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뭐든 다 해보는 것 어때요?

전 직원이 5명인 중소기업에서부터 연매출 수십 조의 글로벌 기업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업종의 여러 회사들에게 CSR에 대한 자문과 심사를 진행하면서 나름의 보람을 느끼고 있었지만, ‘이상을 실현해보자’는 돌직구 같은 제안에 또 다른 호기심이 생겼다. 나는 생각했다.

말릴 때까지 뭐든 다 해봐야겠다.

CSO라는 직함은 내가 제안했고, CEO가 흔쾌히 받아주었다. 사실 직급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나는 최대한 직급과 직책, 직함을 분리하자는 주의이며, 그러고 나서 직함은 당사자가 원하는 대로 정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입장이다. 그런 내가 CSO를 맡겠다고 의견을 피력한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1. 중소규모의 회사일 때 더욱 CSR에 역량과 시간과 노력을 들여야 한다. 작은 규모의 기업은 CSR에 자원을 투입할 여력이 없기 때문에 중소기업에게 CSR은 이상적이고 원론적인 이야기라는 인식이 많다. 그러나 나는 기업 규모가 더 커진다고 CSR을 실행하기가 더 쉬워진다고는 보지 않는다. 경로의존성(path dependency)이라는 개념이 있듯이, 작은 기업일 때 CSR을 내재화하지 못한다면 규모가 커지고 자원 투입 여력이 더 생긴다고 해도 똑같다. 오히려 더 복잡한 거버넌스와 조직 내 정치, 관료화된 조직문화가 진정성 있는 CSR 실천을 더 어렵게 만들 수 있다. LG를 제외한 다른 우리나라 재벌들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 나는 CSR이 기업활동에 대한 관점이자 방향성이며, 그래서 자원의 많고 적음보다 그 간 성장해 온 관성이 CSR의 실행과 성과에 더 근본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본다.
  2. CSR을 조직에 내재화하는 일이 어디까지 가능할지 시도해보고 싶다. CSR에 관한 자문이나 강의를 하다 보면 CSR이 조직에 ‘통합되어야 한다’ 거나 ‘내재화되어야 한다’는 말을 약방의 감초처럼 이야기한다. 그러나 우리나라 현실에서 CSR이 그 기업의 철학에서부터 가치사슬 상의 주요한 업무 기능에까지 내재화된 기업을 발견하는 것은 모래알 속 진주 찾기나 다름없다. 이직을 앞두고 회사의 CEO와 젊고 패기 있는 임원들이 나에게 회사를 ‘CSR 끝판왕’으로 만들어보자고 했을 때, 내 속에는 ‘어쩌면 다른 기업에서 보지 못하는 정도의 CSR을 여기서 목도할 수 있겠다’라는 기대가 생겼다.
  3. CSR이 사업 전략과 혁신 역량에도 얼마나 중요한 요소인지 증명하고 싶다. 많은 사람들이 CSR은 여유가 있을 때 하는 것이라고 인식한다. 그 원인은 CSR에 개념과 범주에 대한 편견에 기인하기도 하지만, CSR을 투자가 아닌 비용으로 인식하는 오류에서 비롯되기도 한다. CSR 분야에서 명성과 실력으로 앞서가는 글로벌 기업들처럼 CSR/지속가능성을 혁신의 기반으로 삼고 리스크 관리와 경쟁전략의 중요한 요소로 인식할 때, 회사가 어떻게 장기적으로 견고한 성장을 이루는지 증명해보고 싶었다.
  4. CSO가 존재하는 국내 회사도 하나쯤은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해외에서 CSR을 체계적으로 추진하는 기업들은 대다수가 C-레벨에서 지속가능성 책임자가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다. 그런데 홍보 활동만 봐서는 이들 기업보다 CSR을 더 중요하게 여길 것 같은 우리나라 기업들 중에 CSO라 할 만한 직급이 존재하는 기업은 일찍이 본 적이 없다. DJSI 같은 책임투자 평가에 대응하는 기업들 중 CSO가 없다고 응답하는 기업은 하나도 없지만, 실상은 모두 CEO에게까지 몇 단계나 걸리는 부서 임원에 불과하다. 이런 지금의 상황에 상징적인 메시지라도 던지고자 하는 마음도 있었다.

솔직히 어떤 기업이라도 CSO까지 두고 사회적 책임을 제대로 추구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조직으로서는 당장 재무적인 부담을 비롯해 어떻게 보면 훨씬 더 까다로운 경영 여건을 스스로 짋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치열한 시장에서 이윤 추구에만 매진해도 쉽지 않은 마당에 기업활동의 목적뿐 아니라 목적을 이루는 과정에서까지 사회・환경적 가치를 신경 쓴다는 것이 현실에서 정말 가능할지, 솔직히 그것은 나도 미지수다.

하지만 조직이 추구할 수 있는 이상(理想)을 무제한으로 고민해 볼 수 있는 기업을 만나는 일은 그런 기업이 성공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가능성보다도 훨씬 희박하다. 그래서 더 도전 의지가 생겼는 지도 모른다.

기대감을 가지고 첫 출근을 했던 게 지난봄이니 벌써 10개월이 다 되어 간다. 그동안 다른 구성원들과 얘기도 많이 나누고, 회사의 현재 모습도 여러 관점에서 진단해보고, 또 TF를 구성해 회사의 새로운 아이덴티티를 수립하는 작업도 진행했다. 흥미롭게도 이런저런 활동을 하면서 회사에 대해 좀 알게 되었을 때, 사실 이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 회사는 보통 회사.

CSR을 잘 해보겠다고 의지를 불태우는 회사를 보통 회사라고 규정하는 것이 어불성설일 수도 있다. 그러나 사람도 말보다는 행동이, 행동보다는 습관이, 그리고 습관보다는 성격이 제 모습이듯이, 회사도 대외에 전하는 말보다는 실제 의사결정이, 의사결정보다는 경영시스템이, 그리고 경영시스템보다는 조직문화가 본모습에 가깝다고 본다. 이런 엄격한 기준 위에서 살펴본 회사의 현재 모습은 보통 회사의 범주로부터 벗어나 있지 않았다.

여느 기업처럼 ‘월화수목금금금’ 일하며 격무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있고, 업무와 관계에서 누적된 문제를 알면서도 시간이 없어 계속 미루거나 방치하는 경우도 많았다. 쳇바퀴 돌 듯 되풀이되는 작업에 보람을 느끼지 못하는 구성원도 있고, 비전 제시를 명확하게 못하는 경영진에 대한 불만도 적지 않았다. 그렇다고 업종이 전도유망하거나 비즈니스의 성장세가 장밋빛 미래를 약속하는 것도 아니다. 항상 생존에 대한 고민도 치열하다.

그러나 보통 회사라는 점에서 나는 맡은 일에 더 매력을 느낀다. 돈 잘 버는 게임회사나 잘 나가는 글로벌 기업 같은 ‘신의 직장’에서 CSR을 잘 하면, 여유가 되니까 그렇게 할 수 있는 거라고 해도 딱히 할 말이 없다. 반면에 여느 회사들과 같은 문제들을 떠안고 있는 보통 회사가 CSR을 진정성 있게 추구하며 경영시스템과 조직문화에 잘 뿌리내린다면, 그것은 수 많은 스타트업과 성장하고 있는 작은 기업들에게 좋은 사례가 될 것이다.

한 조직의 구성원으로서 대안적인 회사를 위한 내 여정은 이제 막 시작한 느낌이다. 최근 회사는 새로운 미션과 가치, 비전을 수립했고, 사업 전략을 포함한 경영활동에 지속가능성 관점을 통합하기 시작했다. 인재상 관점의 대안이 될 만한 반인재상을 만들었으며, 수습직원의 인권을 고려하여 수습평가 제도도 손질했다. CSR에 대한 의지를 우리 스스로 철회하지 못하도록 우리나라 디자인 업계 최초로 유엔글로벌콤팩트(UN Global Compact)에도 가입했다.

이 외에도 해야 할 것들은 벌써 가득 쌓였다. 하지만 이렇게 한 발 한 발 걸어가다 보면 어느 새 회사의 실제 모습도 점점 더 꿈꾸는 모습을 닮아갈 거라 기대한다. 내 역할은 이 쉽지 않은 여정의 지도를 보물섬 지도처럼 흥미진진하게 그려서 구성원들이 스스로 관심을 갖고 따라나서게 하는 것, 그리고 그 여정 속에서 성공과 실패의 발자취가 흩어지지 않도록 잘 정리하고 공유하는 것이다.

나는 회사가 3년, 5년, 10년 후로 갈수록 훨씬 더 튼튼하고 대안적이며 혁신적인 기업이 될 거라는 쪽에 한 표 던진다. 단지 우리 회사여서가 아니다. 보통 회사이지만 이것만큼은 다른 보통 회사들과 현격하게 다르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이 딱 하나 있다. 바로,

사회적 책임에 대한 CEO의 의지. 대안적인 기업을 향한 CEO의 열망.

이 한 가지 차이점이 해가 지날수록 수십 가지 차별점을 만들어낼 씨앗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그렇다고 자동으로 성공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수 많은 기업의 CSR을 다뤄봤던 경험으로 볼 때 책임 있고 지속가능한 기업의 모습을 갖추는 것은 결코 만만한 길이 아니며, 누군가에게 기대감을 가지고 지켜봐달라고 말부터 앞서 할 수 있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나 스스로도 10개월 전에 ‘잘 다니던 직장을 왜 때려치우냐’고 장모님에게 혼날까 봐 말씀드리지 않고 이직을 감행했다. 장모님은 아직도 모른다.

생판 모르는 블로그 독자에게는 밝혀도 우리 장모님께는 말씀 드릴 수 없는 길이 바로 이 CSR의 길이다. 그래도 워낙 흥미진진한 길이라 멈출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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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ngkwon Ahn
보통 회사의 CSO

미션과 지속가능성에 기반한 비즈니스를 고민하고 실천하는 일을 합니다. 대안적인 기독교 가치에 관심이 많습니다. 일상에서 희년의 길을 찾는 구도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