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상상을 어떻게 하는가 (3)

자신의 감정적인 경험에서만 상상의 재료를 찾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내가 원하는 미래상의 디테일을 완성시키는데 필요한 자극을 주는 모든 경험들로부터 우리는 귀중한 상상의 재료를 얻을 수 있다. 이들 자극은 주로 시각과 청각을 통해 수용되는데 그 이유는 직접 체험해보지 않은 미래를 마음 속에서 상상으로 구현하고자 할 때 그 상상에 대한 직접 체험 다음으로 생생한 정보를 제공하는 자극이 시각과 청각이기 때문이다.

이는 교육학자인 에드거 데일(Edgar Dale, 1900~1985)의 학습의 원추(Cone of Learning)에서도 확인해 볼 수 있다. 학습의 원추는 학습자가 무언가를 배우고자 할 때 혹은 무언가를 머리 속에 입력하고자 할 때, 채택하는 학습 수단과 방법에 따라 기억의 정도가 달라지는 것을 보여주는 학습 모형이다. 이에 따르면 학습자는 학습 주제에 대해서 단순히 읽고 보고 듣는 것보다, 말하고 행동하면서 배울 때 더 많은 자극과 정보를 받아들이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이를 수동적인 학습 방법과 능동적인 학습 방법으로 구분했는데 전자에는 책 읽기, 강연 듣기, 사진 보기 그리고 영화, 전시, 시범 등을 보고 듣는 활동이 포함되고, 후자에는 토론 및 이야기를 나누고 극화된 경험이나 실제 경험을 시뮬레이션 하는 등의 활동이 포함된다. 무언가를 처음 배운지 2주가 지나면 앞서 언급한 순서대로 배운 내용을 기억하는 정도가 달라진다. 읽은 것과 들은 것은 10%와 20%의 저조한 기억 수준을 보인 반면, 말한 것과 행동한 것은 각각 70%와 90%의 높은 기억 수준을 보였다. 즉, 가능한 한 많은 수단(보고, 듣고, 읽고, 쓰고, 말하고, 행동하기)을 활용해 다양한 자극과 정보를 머리 속에 입력할 때 학습 효과가 높아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을 증명이라도 하듯 학습의 원추에는 실제 경험하는 것이 학습 도구의 가장 높은 위치에 자리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수동적, 능동적 방법이란 탐색 방법 전체를 놓고 탐색자가 탐색 과정에서 취하게 되는 전형적인 태도에 대해서 구분해 놓은 것이지, 반드시 모든 탐색자가 단지 해당 방법을 활용한다고 해서 수동적인 탐색자 또는 능동적인 탐색자가 된다는 의미는 아니다. 읽고, 보고, 듣는 것을 통해 무언가를 배운다 할지라도 이를 통해 획득한 정보를 탐색자의 마음 속에서 능동적으로 해석, 판단, 편집할 수 있다면, 이 탐색자는 에드거 데일에 의해 수동적이라고 분류되는 탐색 방법을 활용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충분히 능동적인 탐색자라고 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아무리 말하고 행동하는 것을 통해 무언가를 능동적으로 배운다고 해도, 탐색자가 탐색하고자 하는 의지와 열정의 부족으로 인해 이를 자신의 경험 체계에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하고 하는 시늉만 내며 시간만 축내고 있다면, 이 탐색자는 매우 정확한 의미의 수동적 탐색자가 되는 것이다. 즉, 탐색 방법이 탐색 효과에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은 사실이나 탐색 방법을 활용하는 탐색자의 내적 태도야 말로 탐색 효과를 결정하는 초월적 핵심 변수라 할 수 있다.)

그런데 학습 효과만을 따진다면 상상의 경우에도 시청각 자료를 보고 듣는 수동적인 접근 방법보다, 직접 체험하는 것 다음으로 효과적인 실제 경험에 대한 시뮬레이션을 시도해 보는 것이 훨씬 더 바람직한 선택이 아닐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하지만 우리는 ‘상상의 현실화 과정(참조: #13 어떤 생각이 중요한가 — 상상)’이 갖고 있는 고유한 특성 즉, 마음 속에 구체적으로 그려지지 않는 소망은 결코 현실에서 이룰 수도 가질 수도 없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특정 직업을 갖는 일을 예로 들어보자. 누군가 만약 영화감독이 되고 싶어한다면 그는 그 직업에 대해 궁금한 것이 많을 것이다. 그래서 영화감독이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영화 제작과정에서 무슨 역할을 하는지, 필요한 역량은 무엇인지, 그리고 어떻게 하면 그 역량을 키울 수 있는지 등의 질문들을 통해 영화감독에 대한 자기 나름대로의 정의와 이미지를 구축해볼 것이다. 이 과정은 영화감독이라는 하나의 주제를 탐색하는 과정으로서 우리는 이 과정에 학습의 원추에서 언급된 모든 학습 도구와 방법을 그대로 적용해볼 수 있다. 영화감독을 제대로 알아보기 위해선 자신이 직접 영화를 연출해보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방법일 것이다. 하지만 이 방법은 이제 막 작은 호기심을 갖게 된 사람에게 다소 부담스럽고 무리한 요구일 수 있다. 아직 관심의 수준이 낮은 상태에서 이러한 압박 아닌 압박을 받게 되면 초기 단계의 탐색자는 호기심을 잃거나 지레 겁먹고 더 이상의 탐색을 멈춰버릴 수 있다. 왜냐면 그의 내면에는 그의 외부적 경험에 상응하는 정보체계와 이미지가 전혀 구축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즉, 아직 오지 않은 미래 경험에 대한 준비, 상상이 부족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능동적으로 탐색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져도 탐색자는 움츠러들기 쉬우며 설령 그 기회를 잡는다 할지라도 능동적인 탐색에 따른 긍정적인 탐색 효과를 기대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이 경우에는 오히려 자꾸만 위축되고 실수를 반복하는 자신을 보며 스스로의 능력을 불신하는 일이 생기지 않을까 걱정해야 될지도 모른다. 그래서 상상의 재료를 자신의 직접적인 체험 외의 간접적인 방법으로 구하고자 할 때, 가장 효과적이고 실천 가능한 방법이 시청각 자료를 통한 정보 및 간접 경험의 습득인 것이다.

물론 여기에도 예외는 있다. 어떤 유형의 사람들에겐 특정 직업에 대한 미래상을 간접적인 방법으로 연구하고 상상하는 것보다 직접적인 체험을 통해 실제 그 일을 해봄으로써 자신의 미래를 적극적으로 만드는 것이 더 적합할 수 있다. 이들은 학습 원추의 상단부를 차지하고 있는 학습 방법으로부터 하단부의 방법으로 내려가며 순차적으로 혹은 동시에 이들 방법을 함께 활용한다. 자신의 미래에 대한 이러한 경험 방식은 많은 사람들에게 널리 활용되고 있으며 이 방법이 적합한 사람뿐만 아니라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도 무언가를 단기적으로 습득하고자 할 때 큰 효과가 있는 방법이다. 우리는 이러한 역방향적 접근을 흔히 ‘실천하며 배운다(Learning by Doing)’라고 표현한다. 이들 하면서 배우는 방식이 효과적이라는 경험적 증거는 셀 수 없이 많다. 자전거나 수영과 같은 신체적 활동에서도, 글쓰기 또는 말하기 같은 지적 활동에서도, 그리고 심지어 사랑와 우정 같은 정서적 활동에서조차 ‘Doing by Learning’보다 ‘Learning by Doing’이 효과적이다. 특히나 사랑과 같은 강렬한 정서체험은 (1) 보고 듣고 만질 수 있고, (2) 약간의 도구만 있으면 혼자서도 할 수 있는 신체적, 지적 활동과 달리, 그 형태와 모양도 색과 향도 알 수 없는 감정을 거짓 없이 주고 받을 수 있는 서로 간의 기적을 경험해보지 않으면 사랑의 감정에 대해 짐작조차 할 수 없기 때문에 더욱 사랑하면서 사랑에 대해 배울 수 밖에 없다. 즉, 어떤 미래를 그릴 때 반드시 그리고 언제나 간접적인 접근 방식이 직접적인 접근보다 우선되어야 한다는 말이 아니라는 것이다. 실제로 어떤 미래는 경험하기 전까지는 그 무엇도 알 수 없다.

하지만 자신의 미래상을 그려보기 위해 모든 정보와 이미지를 직접 체험을 통해 구한다는 건 시간과 심신 에너지 활용의 제한성이라는 측면에서 거의 불가능한 일이고 바람직한 일도 아니다. 또한 아무런 사전 준비 없이 무턱대고 행동에 뛰어들면 사실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많다. 가령 영화감독이 되고 싶다고 해서 이에 대한 아무런 사전 조사나 연구 없이, 무엇을 배워야겠다는 목표 없이, 그리고 배운 것을 활용할 계획 없이 영화 판에 뛰어든다면, 준비 안된 행동파가 얻을 수 있는 것이라곤 초급자가 맡을 수 있는 제한된 작업 환경이나 분위기 그리고 업무 처리 방식 등에 대한 약간의 경험뿐일 것이다. 그리고 계속해서 이러한 행동파로 현장에만 남아있다면 영화감독이 되기 위해 갖춰야 할 보다 본질적인 역량인 영화계 생리에 대한 거시적인 이해, 영화 제작과정 전반에 대한 개념적인 이해, 그리고 작품에 대한 기획력과 연출력 그리고 조직 관리능력 등을 갖추지 못한 채 본인의 열정과 에너지를 계속해서 소모적으로 낭비하게 될 것이다. 만약 현장 밑바닥에서 출발해 이 모든 역량을 충분히 갖춘 영화감독이 존재한다면, 그는 영화감독 및 영화계에 대한 모든 개념적 이해를 긴 시간 동안 축적된 자신의 경험으로부터 도출할 수 있는 베테랑 중의 베테랑이거나 현장에서의 경험 축적과 별도로 개념적 이해에 대한 학습을 공식적, 비공식적 루트를 통해 병행해온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여기서 말하는 공식적 루트는 학교나 학원 같은 정식 교육 기관을 통해 관련 지식을 습득하는 걸 말하고, 비공식적 루트는 업계 종사자 또는 선배와의 대화 및 팀워크를 통해 경험의 축적뿐만 아니라 개념적 이해 또한 높이는 것을 말한다). 그 이유는 결국 한 분야의 전문가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해당 분야에 대한 이론과 경험 그리고 거시적인 이해와 미시적인 이해를 동시에 갖춰야 하고, 이러한 수준이 됐을 때만이 자신감 있는 태도로 최고의 작품을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수준에 도달하기 위해 직접 체험만을 고집하는 건 그야말로 어리석은 일이며 그렇게 할 수도 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떤 직업이나 분야에 대해 관심이 생겼다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해당 분야의 전문가가 쓴 책이나 강의자료를 찾아보는 것이다. 거기에는 보통 자신의 경험담과 전문지식 그리고 노하우가 빼곡하게 그것도 일목요연하게 정리돼 있다. 우리가 할 일은 그저 나의 시행착오를 줄여주고, 성공의 지름길로 안내해 줄 거인의 어깨 위에 올라서는 일뿐이다. 이것이 바로 상상의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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