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빠 주어, 그리고 엄마 주어와 진아 주어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리베카 솔닛, 창비)를 읽었다. 이 책에 대한 넘쳐나는 호의적 비평에 그다지 공감을 못 하겠다. 우선 책이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된 흐름으로 전개되지 않는다. 개별 칼럼과 에세이 등을 묶은 것인데 서로 겹치거나 동떨어진 것들이 있어서 몰입에 방해가 된다. 또한 저자가 글에서 꾸준히 강조하는 것과는 정반대로, 젠더 이슈에 대해서라면 자꾸 흥분을 한다는 인상을 받았다. 예를 들어 2장 ‘가장 긴 전쟁’에서, 저자는 범죄율에서 남성이 여성보다 압도적으로 높은 게 통계적 팩트이므로 남성이라는 젠더의 폭력적 특수성을 인정해야 폭력 대처법에 대한 이론을 훨씬 생산적으로 구축할 수 있을 것라는 주장을 한다. 나는 이 주장이 현 미국 공화당의 트럼프가 히스패닉계 이민자를 다 범죄자 취급하는 것과 논리적으로 무슨 차이가 있는지 모르겠다. 전체적으로는 남성의 그토록 자기중심적이고 폭력적인 역사에 대해 ‘어떻게’에 대한 설명은 가득한 반면 ‘왜’에 대한 분석은 없어 실망스러웠다.

서평을 하려고 이 글을 쓰는 건 아니다. 이 책 띠지에 적힌, “이 오빠가 설명해줄게”라는 말을 보니 옛 생각도 나고 감회가 새로웠다. 2000년대 중반에 나보다 2살 많은 남자랑 연애를 한 적이 있다. 그야말로 내겐 ‘mansplain’의 대표 사례라고 할 수 있는데, 하는 말의 약 70% 이상이 ‘오빠 주어’로 시작됐기 때문이다. “오빠 보고싶었어?”, “이건 오빠가 낼게.”, “오빠랑 결혼하고 싶어?”(-_-;;) 등등. 지금 생각하면 내가 그 연애를 왜 그렇게 질질 끌었나 싶지만, 그땐 싫은 것보다 좋은 게 더 많았으니까. 한번은 내가 왜 자꾸 ‘오빠가’라는 표현을 쓰느냐고 물었는데 “내가 너보다 오빠니까 오빠라고 하지”라고 했었다. 거기서 대화 중단.

‘오빠 주어’에 대해서 다시 진지하게 고민을 하게 된 건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나서다. 아이한테 “진아는 뭐 먹고 싶어?”, “그건 엄마가 진아한테 해줄게”, “진아가 생각해봐, 엄마가 왜 그랬을까?” 아이와 하는 대화의 대부분이 이런 식으로, 주어는 ‘엄마가’ 아니면 ‘진아가’였다. 나 말고 다른 사람들이 어린 자녀와 하는 얘길 들어봐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 표현의 문제를 인식하게 된 건 스위스에 있을 때 내 스페인 친구 사라가 했던 말 때문이었다. 진아가 사라에게 스페인어로 “진아는 이거 갖고 싶어”라고 했는데, 사라가 함박웃음을 지으며 이렇게 말했다. “진아 말하는 것 좀 봐, ‘내가’라고 하지 않고 ‘진아가’라고 하네. 정말 귀엽다.”

사라는 아마 별 생각없이 귀엽단 뜻으로 한 말일 텐데, 나에겐 충격이었다. 그날 밤 남편 토랑이에게 물어봤다. 스페인에선 아이들이 자신을 지칭하면서 자기 이름을 쓰지 않느냐고. 그럴 수도 있지만 대부분은 아니라는 것이다. ‘내가’, ‘나는’이라고 하지 자기 이름을 쓰지 않는단다. 왜냐하면 부모가 아이를 부를 때 ‘진아는’이라고 하지 않고 ‘너는’이라고 2인칭 주어를 쓰기 때문이다. 말을 배우는 아이에게 가장 먼저 가르치는 것 중 하나가 ‘나(yo)’와 ‘너(tu)’를 구별하는 법이다. 부모가 자신을 지칭할 때도 마찬가지다. ‘엄마가’, ‘아빠가’, ‘할아버지가’, ‘할머니가’라는 표현은 (아예 없는 건 아니지만)거의 쓰지 않는다. 진아가 스페인에 있는 페페(할아버지), 레메(할머니)와 통화를 할 때도 페페, 레메는 “내가 한국에 놀러가서 너랑 놀까?”라고 하지 “할머니가 한국 가서 진아랑 놀까?”라고 하지 않는다.

작은 것 같지만 어마어마한 표현의 차이다. 내가 그동안 “진아는 뭐 하고 싶어?”, “엄마가 진아한테 사줄까?”처럼 엄마 주어, 진아 주어를 쓴 것이 어쩌면 진아의 세상 보는 시각을 바람직하지 않은 쪽으로 굳혀 놓은 게 아닐까 걱정이 됐다. 오빠 주어가 언뜻 듣기엔 달콤한 것 같지만 한 꺼풀만 벗겨보면 오빠인 남자 자신을 세상의 중심에 놓고 상대방 여자를 아기 취급하는 것에 다름아니듯, 내가 엄마인 나와 딸인 진아를 세상의 중심에 놓고 이기적인 지배와 복종 관계를 나도 모르게 강요한 게 아닌가 싶었다. 토랑이와 이 얘기를 진지하게 했는데 토랑이도 한국어의 그런 특수 화법에 문제가 있을 수 있다는 데 공감했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르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래서 몇달 전부터 말하는 방식을 고쳐나갔다. “너는 뭐 먹고 싶어?”, “내 말 한번 들어봐.” 만 세살 반짜리 아이한테 이렇게 말을 하면 좀 모질다는 느낌도 드는데 그건 그냥 습관의 문제인 것 같다. 의식을 해도 언어 습관이 순식간에 바뀌진 않는다. 갈 길이 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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