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오의 주체와 공포
시사인 제467호에서는 나무위키의 집단심성을 파헤치기 위해 메갈리아 항목의 수정내역을 분석했다. 여기에 동원된 해석틀은 지난 제418호에서 메갈리아(사이트)를 데이터 분석했을 때의 것과 같다.
천관율 기자가 전제하는 관점은 다음의 서술에서 단적으로 나타난다.
“혐오는 약자·소수파를 낙인찍는 대표적인 강자의 무기다. 혐오의 대상이 될 때 두드러지는 감정적 반응이 ‘공포’라는 것은 자연스럽다.”
이에 따르면 혐오는 강자에서 약자로 향한다. 남성 중심의 사회에서 강자인 남성은 잠재적 가해자며, 약자인 여성은 잠재적 피해자다. 여성은 언제 닥쳐올지 모를 잠재적 위협에 공포를 느낀다. 여성들로 구성된 메갈리아는 공포라는 일관된 정서를 공유하며, 범죄 공포, 결혼 공포, 그리고 시선 공포에 시달린다.
그러나 이러한 관점은 과연 타당한가?
김현경은 한겨레의 칼럼 《도덕에 호소하기 어려운 시대》에서 도덕적 불간섭주의가 만연한 현대 사회를 진단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하지만 도덕적 불간섭주의가 이처럼 대세가 되었다는 것이 우리가 더 자유롭고 차이를 존중하는 사회에서 살아가게 되었다는 뜻은 아니다. 공공장소에서 적절하지 못한 행동을 한 사람에게 퍼부어지는 엄청난 비난을 생각해보면 금방 알 수 있다. 오늘날 윤리의 자리를 대신 차지하고 있는 것은 매너의 관념이다. 의미심장하게도 매너에서 벗어나는 행동(‘비매너’)에 대한 평가는 도덕적 판단을 나타내는 단어(옳다, 그르다)가 아니라, 취향을 표현하는 단어(혐오, ‘극혐’)로 이루어진다.”
김현경은 현대 사회는 법을 통해 개인의 행동을 규제할 뿐, 개인의 가치관에 대해서는 이러쿵저러쿵하지 않게 되었다고 말한다. 불필요한 사회적 갈등과 마찰을 줄이기 위해 다원적인 가치가 존중받기 때문이다. 현대 사회의 구성원은 법을 어기지 않는 한 자신의 행동에 대해 간섭받지 않을 권리가 있다. 다른 사람에게 설교를 늘어놓는 것은 결코 ‘매너’가 아니라고 우리는 인식한다.
혐오는 인류가 보편적으로 갖는 감정이다. 우리는 추한 것, 더러운 것, 먹기에 적절하지 않은 것, 전염성이 있는 것 따위를 불쾌하게 여기는 혐오감을 가진다. 미소지니의 역어로써 선택된 여성혐오의 그 맥락과 달리, 우리는 개인이 개인을, 집단이 집단을 (무비판적인) 자기 중심의 취향에 근거하여, 이에 거스르는 것을 혐오한다. 다만 이를 표출하지는 않는다.
‘나는 당신(의 취향)을 혐오하지만 존중(무간섭)하겠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시민의 기본적인 정서로 자리 잡았다. 내가 상대에 간섭하지 않는 만큼, 나 역시 상대의 간섭을 받지 않는다는 약속이다. 매너가 지켜지는 한 공포를 느낄 이유는 없다. 약속이 어겨지고 상대가 짐짓 도덕적 외양을 갖춘 채 나에게 혐오를 표출한다면, 나 역시 상대에 대한 혐오를 표출할 따름이다.
따라서 혐오의 대상이 된다고 하여 우리는 공포하지 않는다. 오히려 공포하는 것은 증오의 주체다. 생존권을 침해받은 주체는 1) 어떤 위협으로 인해 공포를 느끼고, 2) 그 공포의 원인을 찾아서 증오하고, 3) 직접적인 행동으로 나서서 위협을 되돌려준다. 내국인 노동자 계층이 외국인 노동자 계층에 밥그릇을 빼앗기는 공포를 느껴 적의를 품는 것, 재일 한국인이 일본인의 권익을 침해하는 공포를 느껴 헤이트 스피치를 토해내는 것이 대표적이다. 지목된 원인이 정확한지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나무위키의 ‘당혹-멸시-격분’은 이러한 맥락에서야 이해할 수 있다. “네가 나한테 어떻게 이럴 수 있어?”라는 반응은 강자라서가 아닌, 상대가 ‘매너’를 어기리라 생각하지 못했던 자의 반응이다. 나무위키로 대표되는 남성들은 상대가 매너를 어긴 것에 대한 당혹감과, 그에 대한 혐오와 분노를 표출하고 있다. 남성 일반이 느끼는 ‘혐오와 분노’는 여성이 느끼는 ‘혐오와 증오’와는 그렇기에 다르다. 오히려 여성의 감정은 일베의 그것과 같다. 가부장적인 권익을 침해받음으로써 흔들리는 남성에 ‘공포’하고, 여성을 ‘증오’하게 된 일베는 그렇기에 메갈과 ‘증오의 형식’을 공유할 수 있던 것이다.
필요한 것은 생존권을 침해받고, 그 원인을 해결하기 위해 (일베와는 다른) 정의를 공론장에서 도덕에 호소할 수 있는 사회다. 그러나 감정을 앞세우고 ‘본심’ 따위를 논쟁하며 이성을 감정의 정당성을 호소하는 데 복무시키는 한, 이성에 의한 공론장은 요원해지고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