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ppuccino #1

원형(Archetype)에 대하여


카페 안으로 FP가 문을 열고 들어온다. P는 들어가자마자 비어있는 창가 쪽 테이블에 앉고, F는 계산대 앞으로 향하려다 말고 P에게 말을 건다.

F : 카푸치노?

P : 네.

F : 사람이 일관성 있네.

F는 계산대로 향해 카푸치노 한잔과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잔을 주문한다. 그 사이 P는 가방을 열어 몇 장의 A4 용지를 꺼낸다.

P : 미치겠네..

P는 종이 뭉치를 보며 연거푸 한숨을 쉰다. 그리고 F는 두 잔의 테이크아웃잔을 들고 자리로 돌아온다.

F : 야. 쉴 땐 쉬어야지. 또 그걸 왜 꺼내.

P : 근데 솔직히 이건 좀 억지에요. F도 알잖아요. 이거 2주밖에 안남은 거. 워킹데이 겨우 10일 주고 바라는 건 또 뭐 이렇게 많은지. 주말이고 뭐고 다 반납해도 퀄리티 거지꼴 될 게 뻔해요. 아 왜 맨날 이런 일만 들어오지..

F : 그럼 뭐 회사에서 세기의 걸작이라도 만들 줄 알았냐. 그래도 그 정도면 양반이지. 2주나 있잖아.

P : 아.. 계속해서 이따위 일만 할거라 생각하면 진짜 미쳐버릴지도 몰라요.

F : 사람이 그렇게 쉽게 미치지는 않아. 걱정 마.


PF를 흘깃 노려본 뒤 주문한 커피는 쳐다도 보지 않고 문서를 연신 넘겨댄다. F는 머쓱한 듯 주머니에서 폰을 꺼내 두드리기 시작한다. P는 한참을 씨름하다 문서를 내려놓고 F를 바라본다.

P : 아.. 이런거 말고 진짜 쩌는 거 만들어 보고 싶다. 어르신들 해달라는 대로 하는거 말고..

F : 아이고 그러셨어요?

P : F는 그런 생각 안들어요? 많은 사람한테 팔리는 디자인을 만들고 싶다면, 주요 소비 주체가 되는 ‘젊은 사람들’이 디자인을 리드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왜 디자이너가 아닌 관리자의 역할을 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그 결정권을 맡겨야 해요?

F : 그분들도 먹고 살아야지. 그래도 지금 너희 팀장님은 감이 좋은 편이잖아. 물론 연세는 좀 있으시지만.

P : 무슨 소리에요. 팀장님은 저랑은 미적 기준이 완전 달라요. 진짜.

P는 식어버린 카푸치노를 들이키기 시작한다. F는 만지작거리던 폰을 테이블 위에 두고 P를 바라본다.

F : 미적 기준 하니까 생각나는데. P는 ‘아름답다’는 게 뭐라고 생각해?

P : 미쳤어요?

F : 아니 한번 대답해봐.

P : 음.. 시각적인 걸로 한정해서 아름다운 거라고 한다면.. 보면 알지 않아요? 와 쩐다. 이런거?

F : 예를 들자면, Dribbble에 있는 이미지들을 본다고 생각해봐. 디자이너로서 그게 아름답다고 한다면 왜 아름답다고 느껴?

P : 아… 어……음… 막상 말로 하려니까 어렵네요… 왜 이런걸 보고 난 아름답다고 생각하는거지? 색이 예뻐서? 모양이 귀여워서?

F : 예쁘다 귀엽다 둘 다 ‘아름답다’는 개념 안에 포함된다고 보는데?

P : 그러게요, 뭐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음.. 어떤 감정이라고 해야하나?

F는 테이크 아웃잔에 꽂힌 빨대를 쭉 빨더니 빙그레 웃으며 말을 꺼냈다.

F : 플라톤 알지? 고대 그리스 철학자. 그 있잖아 ‘이데아’라고 들어본 적 있을 거야.

P : 저한테 너무 많은걸 바라지 마세요. F.

F : 어. 사실 나도 잘은 모르지만.. 플라톤은 실제 세계와는 다른 본질적인 세계가 있다고 말을 했지. 이데아로 이루어진 세계가 있다고. 이데아는 모든 사물 이전에 존재하는 영원불멸의 원형을 말해.

흠, 예를 들어 이 테이크아웃잔을 우린 ‘컵’이라고도 부르잖아? 소주잔도, 맥주잔도 ‘컵’이라고 부르고. 이러한 ‘컵’의 원형을 이데아라고 하는 거지. 우린 이걸 눈으로 볼 수는 있지만 구체화 할수는 없는 거야.

P : 뭐지.. 엄청 철학적이네요. 개념으로서만 존재하는 게 있다는 건가?

F : 음.. 비슷해. 근데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플라톤은 사물뿐만 아니라, ‘미’에도 원형이 있다고 했거든. 이 미의 원형을 ‘절대적인 아름다움’이라고 한다면 네가 만든 이 시안들은 ‘감각적인 아름다움’ 이라고 부르는 거지. 눈이라는 감각으로 구체적으로 느낄 수가 있는 거니까. 관념으로서의 ‘절대적인 아름다움’은 아닌 거지.

P : 한 대 때려도 되요?

F : 하하. 알았어. 하여튼 난 플라톤이 말한 이데아 라는게 실제로 있다고는 생각하진 않지만, ‘미’에 있어서는 이러한 설명이 맞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P : 그럼 절대적인 아름다움이라는 게 있다고 생각하는 거에요? 제 시안에도 절대적인 아름다움을 가진 원본 파일이 있다는 말인가..

F : 그렇지, 근데 그 원본 파일이 PSD가 아닌 거야. 사람은 그걸 열어서 볼 수가 없는 거지. 영혼과도 같은 거니까. 니가 만든 이 화면은 그 절대적인 아름다움을 모방한 거에 지나지 않는 거지.

P : 아 진짜.


F는 아랑곳하지 않고 P의 시안이 담긴 A4용지 중 하나를 뒤집어 설명을 계속한다. P는 들고 있던 커피를 옆에 두고 턱을 괸 체 F의 말을 듣는다.

F : 근데 절대적인 아름다움이 있다고 하면, 왜 사람마다 선호하는 이미지가 다른 걸까?

P : 그렇네요, 사람마다 미적 기준이 같을 수가 없죠. 요전에 엄마랑 이케아(IKEA)에 소파를 사러 갔었는데, 취향의 차이를 절실히 느낄 수 있었거든요.

F : 어머님이 사주신다고 간 거?

P : 네.

F: 그럼 당연히 결재권자 말을 잘 들어야지.


F : 하여튼간에, 예전에 누가 생후 3개월쯤 된 아기들을 대상으로 매력적인 얼굴 사진과 그렇지 않은 사진을 보여주는 실험을 했대. 근데 그 어린것들이 매력적인 얼굴을 훨씬 더 오래 보더라는 거지.

P : 들어본 것 같아요. 더 부드럽게 보이고, 균형이 잘 맞아서 그런 거 같다고 하던데.

F : 생물학적으로 부드러운 피부와, 건강한 머릿결, 정상적인 비례의 신체, 이런 것에 매력을 느끼게 되어 있는 거지, 그런 사람들이 더 건강하고, 번식에 강할 테니까 말이야. 우리 DNA에 ‘절대적인 아름다움’이 이미 들어 있다고 볼 수도 있는거지.

P : 음.. 그래도 전 후천적으로 생기는 미적 감각이 더 크다고 봐요. 확실한 건 우리 엄마 패션은 절대적인 아름다움과는 거리가 멀거든요.


F는 종이 한가운데 작은 별을 하나 그리고는 ‘절대적인 아름다움’이라고 쓴다.

F : 그렇다면 ‘절대적인 아름다움’과 거리가 가까운 건 뭘까?

P : 어.. 모나리자,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에? 이런 걸 얘기해야 하나? 세기의 걸작? 아니면.. 사람으로 치면, 오드리 헵번? 원빈?

F : 원빈.

P : 대다수의 사람들이 아름답다고 이야기하는 무언가가 ‘절대적인 아름다움’이 아닐까요? 송중기도 좋네. 우리 엄마도 송중기 좋아해요. ㅋㅋ

F는 별을 중심으로 과녁판같이 점점 커지는 원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별 가까이에 ‘송중기’라고 적는다.

F : 송중기야말로 한국 연예계가 만들어낸 ‘후천적인 미의 기준’이란 느낌이지만.. 이게 더 와 닿는다면야..

P : 아니 이게 맞아요. ㅎ

F는 바깥 원 왼쪽에 P라 적고 위쪽에 P-MOM이라고 적는다. 그리고 은근슬쩍 송중기 근처에 F라고 쓴다.

F : ‘절대적인 미라는 것이 존재하며, 사람의 유전자에 그것이 각인되어 있다.’는 전제가 맞는다면, 사람마다 그것을 바라보는 ‘위치’가 다른 거야. 이해하기 쉽게 2차원으로 그려봤지만 사실 3차원, 4차원에 위치하는 사람들이 저마다의 시야에 맞게 그 ‘절대적인 미’를 바라보는 거지.

P : 그럼 저랑 엄마가 봤을 때는 송중기 위치는 절대적인 미에 가까워 보이네요.

F : 그렇지.

F : 아까 어머님과의 소파 이야기도 마찬가지야. 각자 미를 바라보는 위치가 다르므로 취향의 차이가 생기는 거겠지? 어머니가 좋아하신 소파가 아름답지 않다는 게 아니잖아. 지금 P가 서 있는 시대와 상황에 따른 경험이, 이건 아니라고 느끼게 하는 거지.

P : 음.. 그래도 절대적인 미의 기준이 아니라 자기 자신만의 미적 기준을 가진 사람도 있지 않을까요? 절대적인 미에 가까운 송중기를 싫어하는 사람이라든지.

F : 후천적인 학습 혹은 특정한 문제 때문에 ‘절대적인 미적 기준’을 향하지 않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지. 세상은 다양하니까.

P : ‘보편적인 아름다움’이라는 단어가 더 마음에 드네요.

F : 응. 예리하네. 그럼, 아까 얘기한 Dribbble의 이미지를 보면 왜 아름답다고 느끼는가에 대한 답을 이제는 어느 정도 말할 수 있겠지? 아름다움에 대한 기준은 보편적인 형태로 이미 네 머릿속에, 유전자에 들어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거야.

F는 종이에 그려둔 요소들에서 시작하는 반시계 방향의 화살표를 그린다.

F : 그리고 이곳에 시간이라는 개념이 추가되면, 좀 더 명확해지지. 짠. 복고가 유행하기 시작하는 거야. 미의 기준, 아니 관점이 시간과 공간에 따라 이동하는거지.

P : 아.

F : 그리고. 팀장의 기준은 여기쯤인 거야. 그 나이에, 지금은 관리자의 역할이니까, 상황에 의해 다른 곳에 서 있다고 봐야지. 음.. 그리고 네 시안은, 여기쯤 있는 거고.

P : 맞을래요? 아 진짜.

F : 팀장이 네 시안에 만족하려면, 몇 세기가 지나던가 — 물론 팀장이 살아있을지는 모르겠지만 — 결국엔 네가 ‘절대적인 아름다움’에 가까운 걸 만드는 수밖에 없는 거지.

F는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P를 올려다본다. P는 질린 듯 고개를 저으며 차가워진 테이크아웃잔을 들고 일어선다.

P : 이럴 시간에 일이나 해야겠네요. F가 말하는 송중기급으로 만들어야지.

F : 이데아(idea)는 영어로 아이디어(idea)라고 쓴대. 짱구 좀 잘 굴려봐.

P : 하이고 말은.


참고문헌 : 현대 디자인의 이해(저자 박연실)
https://dribbble.com/shots/1355312-Flat-Solar-Syste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