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잉여란

내가 잉여인지 고찰하며 나온 결과들.

꽤나 많은 이들이 잉여라는 말을 입에 담을 때도, 나에게 잉여라는 말은 아웃 오브 안중이었다. 잉여라는 말이 사회현상적으로 약간의 의미가 있을 지언정, 계급의식을 가지고 변화를 이끌어 내는데 의미가 있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다 문득, ‘오덕은 잉여로운가?’라는 의문이 들었다. 이것은 다른이의 오덕질로 여러가지 즐거움을 경험한 나에게, 그냥 지나칠만한 의문이 아니였다. 이 수많은 오덕질이 잉여로움 없이 어떻게 탄생한단 말인가?

그러다 내린 나름의 결론! ‘존재’로서 잉여는 다음의 세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비주류(마이너)”, “주류가 되고자 하는 욕망 없음”, “(자본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쓸모 없음”.

예컨데, 공부를 하는 학생은 꽤나 주류에 속하기에 잉여로 분류하기에는 쉽지 않다. (물론 개인 단위에서야 학생이라는 방패막이를 가진 잉여도 꽤나 많다.) 취업을 준비하는 취업준비생은 “주류가 되고자 하는 욕망”을 가지고 있음으로 잉여가 아니다.

자본의 입장에서 “자본을 확대 재 생산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음”이 잉여의 조건이라니! 잉여라는 말이 맑스의 이론에서부터 우리에게 익숙해졌음을 생각하면, 아이러니컬하기 그지 없으나, 사람을 “인적 자원으로 만드는” 것이 “교육”의 목표인 국가에서 그리 새삼스럽지는 않을지도 모르겠다.

그래, 나는 이것이 싫었다. 관심이 없었던 이유는 잉여라는 단어가 싫었기 때문이 분명하다. 사회 변화고 나발이고, 왜 내가 ‘자본’에 대한 쓸모여부에 따라 잉여 혹은 잉여 아님으로 구분되는지 납득하기 어려웠다. 학교에서 시험을 보는 것도 누군가 나를 “평가”한다는 생각이 들어 시큰둥했던 나인데, 감히 나의 존재를 규정짓는다니!

한편, 잉여로운 존재가 되고자 하는 “감정”으로 잉여가 표현되기도 하는데, 이는 굉장히 다차원적이다. 미디어는 ‘안될꺼야’류의 “자조”적인 감정에 주목하는 경향이 강하다. 하지만, 미디어로부터 한발 물러나 생각해보자, “일 때려치고, 좀 쉬고 싶다”는 감정은 얼마나 ‘존재로서 잉여’를 갈망하는 감정이던가! 실제로, 제주도에 있는 게스트하우스에서 지내보면, 이렇게 훌쩍 ‘회사를 때려치고, 일단 여행하러 제주도에 온’ 사람들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이런 감정적인 측면에서 내가 잉여롭다면 충분히 납득한다. 생활기록부에는 장래희망을 “소방관”, “과학자”, “CEO” 등으로 적었지만, 주변 친구들에게는 “사실 난 돈 많은 백수가 되고 싶어”라고 말하고 다녔던 학창시절을 돌이켜 보건데, 나는 감정적으로 오래전부터 잉여니까.

‘겨울밤 따뜻한 방 안에서, 귤을 까먹으며 뒹굴 뒹굴 만화책 보기’나 ‘따뜻한 차 한잔과 함께 창 밖에 비오는 것 바라보기’를 좋아하는 나의 감정 역시, 분명 잉여이며, 잉여롭다.

‘남과 다른 나의 모습’을 보고 싶어 한다는 것은 조금 넓은 의미의 잉여의 감정이다. 찰리 채플린식으로 비유하자면, 기계의 톱니바퀴 같은 일상이 되었기에 이에 반하는 감정. 나는 이것을 위에서 언급한 ‘오덕질’의 가장 커다란 원동력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좋아하는 오덕질을 하면서 ‘남과 다른 나의 모습’을 확인하고자 하는 감정.

오늘날, 사회 구성원들이 다양하게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환경”이 구성되어 있다고 보긴 힘들지만, 이러한 사회를 만들어 가는 과정 속에 잉여가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나는 잉여를 응원한다. 그리고 이제, 잉여가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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