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문화에서 다루는 섹스의 표현에 대한 노트들

단순한 성적 자극을 넘어서 섹스는 어떤식으로 표현될 수 있는가?

노트의 취지:

섹스를 소재로서 다루는 대중문화는 많지만, 과연 그것이 성상품화가 아닌 다른 무언가는 존재하는가? 대중문화에서 섹스 담론이란 그 어떤 것이든 간에(가령 싸우는 여전사의 이미지가 폭력적 남성 세계에 순응하지 않고 거기에 똑같이 폭력으로 싸우는 여성의 적극적 이미지를 다루더라도, 결국 어느 시점에서는 싸우는 여전사의 육체를 음란한 시선으로 흟는 그런 관점이 존재할 수 밖에 없다는 것?) 그저 성상품화에 불과한 것인가?


1.대중문화에서 다루는 ‘섹스’는 기본적으로 ‘판타지’이다.=섹스는 실존하지 않는다. 섹스란 관계 그 자체가 극에 달한 것이기 때문에 영상화되고 이미지화 되며 문자화된 섹스는 섹스의 본질이라기 보다는 섹스라는 이미지를 본질을 거세한 것에 불과하다.


2.포르노의 섹스를 다루는 문법.=여체를 다루는 시선. 그리고 남성의 거세.

포르노의 기묘함:마치 그것이 섹스처럼 보이기는 하지만 섹스가 아니다. 사람은 그렇게 ‘자극적인 체위와 형태’로 섹스를 하는가?

=>여배우의 시선이나 얼굴은 남자를 보는 것이 아니라 ‘카메라’를 바라보고 있다. 극단적인 클로즈 업과 이미지들. 복장 페티쉬들. 포르노에서 보여주는 섹스는 기본적으로 ‘시각적’이다. 하지만 섹스가 ‘시각적’인 행위-관계인가?

뒤집어서 생각해보자:애무에서 삽입-절정, 후희까지. 단순하게 청각-시각적인 것을 넘어서 촉각, 미각, 후각 등의 다양한 감각이 행위에 개입한다. 더 나아가, 사람의 시선 맞춤에서부터 무드, 움직임 등 감각이 개입하지 않는 영역도 존재.

그렇다면 대량 생산된 포르노의 의미? 포르노, 외설은 항상 존재하여 왔었다->사드의 문제. 사드가 처벌을 받은 것은 ‘포르노’를 만들었기 때문이 아님. 사드 당시만 하더라도 사드보다 ‘더 자극적인’ 포르노는 항상 존재해왔었음. 인류의 역사의 음지에서 포르노는 항상 존재해왔었다.

사진의 역사에서의 포르노:대량 생산이 불가능한 초기 사진 기술로도 포르노 사진을 찍어서 거액을 받고 판매하는 경우가 있었음.

성욕의 수요와 공급:매춘과는 다른 형태. 포르노는 철저하게 ‘문화적’이라 할 수 있다. 기록과 보급, 복제의 문제. 1대1 매칭의 문제가 아니라 1대다의 유통의 문제.

자극의 공급과 유통->불일치를 최대한 해소하는 것. 그것이 포르노.

그렇기에 엄밀하게 이야기해서 포르노가 다루는 섹스는 섹스가 아니라 자극의 공급과 유통에 대한 논의로 접근해야 한다.


대중문화의 섹스 문제 역시도 포르노와 유사하게 접근해야 하지 않을까?

물론 동일하지 않음=>연애등의 관계론의 문제. 하지만 대중문화 일체에서 다루는 섹스가 ‘보여주기 위한’ 자극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것을 무시할 수 없음.


별개의 이야기들

남성 중심의 사회에서의 포르노인가, 아니면 인간의 ‘성욕’ 자체가 만들어낸 포르노인가:남성-여성의 성욕 차이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많은 학설과 이야기들=>과연 여성을 위한 포르노가 존재할 수 있을까? 이미 있는거 같지만서도.

사드가 의미가 있는 것? 포르노그라피의 ‘철학’의 문제. 성과 섹스, 그리고 그것이 극단으로 치달을 때의 문제를 18세기 계몽 철학의 거울상으로써 날카롭게 묘사하는 모습을 보여줌. 하지만 엄밀하게 사드의 논의들은 섹스의 관계론이라기 보다는 자극과 인간, 그리고 더 나아가 ‘자동기계’으로서의 육체, 인간에 대한 이야기들. 사디즘Sadism의 개념 자체를 관계맺기로 접근하는 사르트르의 경우도 있지만, 역으로 궁극의 사디즘을 ‘망상’과 ‘만족’의 형태로 접근하는 경우도 있음을 유념해야 함(파졸리니, 살로 소돔 120일. 고로시야 이치라던가)


3.성적 자극을 위한 기제가 아닌 ‘섹스’(물론 아예 자극 자체를 지울 수 없지만)=관계의 본질을 다루는 중요한 표현으로서의 섹스.

시각적 자극의 문제가 아니라 ‘관계’의 문제:하지만 섹스라는 것 자체가 ‘자극적’이라는 것은 어떻게든 제거할 수 없는 부분. 그렇기에 ‘관계’로써의 섹스를 다루기 위해서는 확고한 철학과 접근 방법론이 필요함->장면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작품 전체의 분위기 등을 통한 접근.

=>즉, 섹스가 자극이 아니라 전체 작품과 유기적인 조화를 이루어낼 때만이 관계론으로서의 섹스를 다룰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함.


4.몇몇 특기할만한 표현들-1)데이빗 크로넨버그

이미 영화 자체가 ‘섹스’ 그 자체인 감독:이질적 두 존재의 결합. 즉 섹스로 해석될 수 있는 알레고리가 다분하게 있음. 그리고 이 이질적인 두 존재는 단순하게 ‘개념’이나 ‘관념’론으로써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적인’ 육체적 결합으로 드러남.

초기 크로넨버그 작품들이 B급 SF 호러 색체가 강한데,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이질적인 두 존재의 결합을 끈적하게 다루는 작품들이 많음(그리고 물론 인간 사이의 섹스도 중요한 테마로 자리잡음)=>파리와 인간의 결합, 플라이. 타자와 정신결합-그로테스크한 육체의 변이, 스케너스. 미디어와 인간의 결합, 비디오드롬.

하지만 후기, 최근작으로 갈수록 B급 SF 호러적인 이미지들 보다도 폭력과 섹스를 통해 인간을 다루려는 시도로 변화함. 소재는 변화하였지만 주제는 크게 변화하지 않음. 오히려 자극적인 내용들을 독특한 방법론으로 승화시키는 능숙한 모습이 많이 보임. 폭력에 있어서 ‘깔끔함’이나 ‘화려함’보다는 결합, 즉 서로를 죽이려는 두 힘이 서로 대결을 벌이고 육체와 생명이 손아귀 속에서 천천히 빠져나가거나 변화하는 형태를 많이 보여줌(동방의 약속)=>결합과 변화라는 측면에서 데인저러스 메소드, 근친상간과 관계의 파멸이란 측면에서 맵 투더 스타즈 또는 스파이더.

=>폭력의 역사:두번의 섹스, 그리고 서로다른 질감과 표현들.

첫번째 섹스 시퀸스에서 부부가 완벽하게 호흡을 맞춰서 전희-애무로 이어짐. 이들의 관계가 서로를 믿고 있음을 뚜렷하게 보여줌. 그것이 대사가 아닌 섹스의 형태로써.

두번째 시퀸스=>남편이 킬러라는 사실을 알고 계단참에서 이루어지는 섹스. 급격하고 거칠다. 끝나고 남편의 눈을 정면으로 응시함. 과연 내 남편은 어떤 인간인가? 믿을 수 있는가? 모르겠다는 결론. 밀어냄. 관계의 변화가 극적으로 들어남.

관계가 변화하는 것을 훌륭하게 표현, 그리고 그것이 단순하게 자극이 아닌 전체 흐름에서 유효하고 중요한 터닝 포인트로 작용.


5.

2)덤불 속의 검은 고양이-부부의 해후와 죽음의 공존. 극단적인 알레고리(무사를 물어죽여야하는 숙명을 지닌 고양이 요괴와 요괴를 죽이라는 명령을 받은 무사) 사이에서 에로티시즘과 함께 극단적인 긴장관계를 드러내는 놀라운 장면.

이전까지 요괴 아내가 무사를 유혹해서 섹스를 하다가 물어죽이는 장면이 반복적으로 나옴. 논리, 즉 알레고리의 성립. 긴장감의 고조. 이를 통해서 둘의 만남(남편과 아내)이 가져올 파국에 대한 위험성을 관객들에게 보여줌.

=>과연 아내는 남편을 죽이는가? 하지만 동시에 아내와 남편의 감격적인 해후. 죽음과 슬픔이 교차하는 아름다움. 위험함이 섹스를 통해서 드러남. 훌륭한 묘사.


6.

3)기타 이런 저런 예시들

제임스 그래이의 영화들->투러버스도 좋은 사례, 섹스-차갑게 식어감의 묘사. 자크 오디아르의 영화들, 육체와 성남, 분노, 웅웅거림과 섹스. 러스트 앤 본. 스플라이스 등


7.결론? 섹스를 다루는 방식이란 작품내에서 단순한 에로티시즘과 성의 상품화 논란을 넘어서 관계가 극 내에서 어떠한 변화를 갖는가를 다루는 주요한 변화로도 인지할 수 있지 않을까 라고 생각해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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