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다시보기] 왜 학교는 질문을 가르치지 않는가, 황주환

오랜만에 리뷰 욕구를 충만하게 만든 책입니다. 첫번째 이유로 학교는 바보<바보 만들기, 존 테일러>도 아닌 노예를 만드는 목적이 있다는 얘기에 충격과 경의를 표하기 위함이고, 두번째는 학교와 질문이라는 제목에 끌려 샀는데, 주제와는 내용이 상당히 거리가 있는 것 처럼 느껴져 다시 살펴보며 정리해 보기 위함이겠습니다.

WHY?

내용은 크게 학교, 사회, 그리고 책 읽기에 대한 저자의 에세이 글들이 엮어져 있습니다. 저자 소개에서 어떤 생각으로 이 책에 임하는지, 머리글에서는 책의 큰 틀을 대략적으로 알아볼 수 있습니다. <강아지 똥>, <몽실언니>로 유명한 권정생 선생의 말로 책은 시작됍니다.

동화가 왜 그렇게 어둡냐고요?
그게 진실이기에.
아이들에게 감추는 것만이 대수는 아니지요.
좋은 글은 읽고 나면 불편한 느낌이 드는 글입니다.

“불편하지 않은 독서란 무의미하다”라 말하는 저자. 불편하지 않은 독서가 무의미한 이유는 뭘까요? 독서의 목적에 따라 책 읽기를 통해 편안하고 안정적인 느낌을 가지길 원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머리 속이 산산히 부서지는 듯한 그런 느낌을 원하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저자는 후자의 입장이라는 얘기겠죠? 불편한 걸 원치 않는 분은 다른 책을 읽으셔도 되겠습니다.


“대한민국에 교육은 없다.
오직 입시문제만 있을 뿐이다.”
지금의 교육구조는 학부모 대중의 바람대로 교사들이 더 열심히 가르치고 채찍질할수록 오히려 전체 상황은 더 악화되는 경쟁구조다. 몇 개의 먹이를 두고 다람쥐들을 채찍질한다 해서 모두 그 먹이를 갖는 것이 아니라, 쳇바퀴 속도만 빨라지는 것처럼 말이다. 명문대 진학을 위해 특목고에 진학하려 하고, 그러기 위해 중학교와 초등학교 때부터 출발선을 먼저 뛰쳐나가려는 경쟁이 30조 공교육비보다 많은 사교육 현상을 불러왔다. 경쟁이 경쟁을 당기는 우리 교육의 비극이다. ㅡ 30

저자는 정확하게 꼬집어 얘기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 교육에는 문제가 많다고 말하지만 속내는 성공적인 입시를 통해 높은 지위와 급여를 통한 안정적인 행복한 생활을 바란다고 말입니다. 지위와 급여, 행복의 악순환의 연결고리를 끊어 내는게 교육 문제의 해결이고, 그렇기에 단순히 교육만의 문제가 아닌 사회 문제이고 정치적으로 다뤄야 한다고 말합니다.
입시를 통한 학벌이 부와 명예에 미치는 영향이 미비해지고 양상이 달라져 해체한다고 한 단체 ‘학벌 없는 사회’의 말은 변화를 정확히 읽은 것일까요?

“부모는 자녀에 대한 사랑을 의심하지 않는 만큼,
사랑의 방법도 의심하지 않는 것일 테다.”
Love & Peace (이미지는 Banksy 작품으로 추측)

의심하는 사랑이 가능할까요? 그것은 사랑이 아닌건 아닐까요? 사랑에 대한 오해와 편견일까요? 학교와 그를 둘러싼 환경적 사회적 요소들을 짚은 다음, 현직 선생님으로서 자성의 목소리를 시작으로 두 딸아이의 부모이자 우리나라 교육에 중요한 축인 학부모의 그릇된 자녀사랑에 관한 내용이 나옵니다. 부모의 사랑은 기본적으로 부와 모 서로를 향한 사랑이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해서 어찌 할 수 없는 남편은 제쳐두고 가능성이 있어보이는 자녀에게 엄마의 사랑이 집중 되면서 나타나는 현상으로 생각됩니다.

에리히 프롬은 <사랑의 기술>에서, 살아가는 것이 하나의 기술이듯 사랑도 기술이라며 사랑에 대한 지식과 노력을 줄 곧 강조한다. 
중략
그는 ‘어머니는 아이가 자기에게 의존해 있는 한 아이를 사랑하는데, 이는 자기도취적인 권력이나 소유욕’에 해당한다며, 어머니의 지배욕망을 경계했다. 어머니가 아이를 소유하고 지배하려 한다는 충고만큼 상투적인 것은 없겠지만, 이만큼 진실인 현실도 없을 테다. 어쩌면 프롬은 어머니에게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부모 되기가 어렵다지만, 아이들도 힘들긴 마찬가지였다. 평소 학생들과 개별면담을 해보면, 적지 않은 아이들이 부모에게 복잡한 감정을 갖고 있었다. 부모님께 감사하다는 마음과, ‘나’때문에 고생한다는 죄책감과, 그리고 이해받지 못한 분노감이 혼재했다.
중략
프롬은 자기희생을 강조하는 부모는, 자녀가 부모를 평가하지 못하도록 한다는 점에서 이기적인 부모보다 더 나쁘다고 지적한다. 그런 부모는 자기의 희생만큼 자녀를 사랑한다 여기지만, 사실은 부모가 자녀를 소유하려는 자기중심적인 지배로 가득 차 있는 것이란다. 아이는 숨이 막히는 것이다. ㅡ 60~61

자녀에 대한 부모의 진심어린 사랑도 좋지만 마음만 담은 사랑은 어린 사랑이 아닐까요? 더 나은 사랑을 위해 지식과 노력이 수반되야 함에 저는 이견이 없습니다. 자기희생을 내세우는 사람은 그를 평가하지 못하도록 한다는 점은 명심해야 겠습니다. 희생, 봉사, 나눔, 기부 등의 긍정적인 가치들에 대한 비판적인 질문은 금기시 되고 있습니다. 아무리 좋고 옳다해도 강요할 수 없듯 그 자체로 목적이어야지 도구로 사용된다면 왜곡될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합니다.

사회적 책무
의사는 제네바 협약에 따라 전쟁 중에 아군과 적군을 구분하지 않고 생명을 구해야 할 책무가 있다. 지금 당장 눈앞의 모든 환자를 치료해야 한다. 그런데 더 근본적으로 중요한 해결책은 더 이상 부상자가 생기지 않도록 전쟁을 끝내는 일이다. 그것이 생명을 구하는 의사의 사회적 책무이기도 하다. 그런데 눈앞에 있는 환자는 열심히 치료하면서 정작 전쟁을 지지하거나 그런 정치적 행동을 지속하는 의사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ㅡ76

전쟁을 지지하는 의사는 이유가 뭘까요? 자신이 치료할 환자가 더 많아 진다는 단순한 이유에서 일까요?
부모로서 자녀를 열심히 기르면서 정작 자녀를 힘들게 하는 입시와 경쟁을 지지하는 부모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자녀의 행복을 위해서 일까요? 자녀의 성공을 통한 대리만족을 위해서 일까요?
진정 자녀와 어떤 목적으로 함께하는가? 하는 고민을 계속하기 보다는 나름의 뜻을 새우고 변질되지 않도록 다잡으며 자녀와 함께 노력하는건 어떨까요?

어떻게 노예가 될 것인가?
초중고 노예10년이 점점 늘어나고 있지요 (이미지는 영화 <노예12년>)
스스로 생각, 비판, 판단할 능력이 없다면 이야말로 노예니까! 
나를 맹신하는 학생이란 나의 노예가 되어, 진짜 내 가르침을 배반할 가능성도 크니까, 그래서 지금 교실의 눈앞에 있는 권력인 나(권력)도 비판의 대상으로 보라고, 그것까지 내 가르침으로 삼겠다고 말한다. ㅡ108

최근에 영화 <곡성>을 보며 그런 생각이 많이 들었습니다. 어떤 것을 믿고, 어떤 것을 의심할 것인가. ‘어른들 말 잘 들으면 자다가도 떡이 나온다’는 환타지 적인 옛말을 아직도 흔히 어른이란 사람들이 많이들 하지요. 그렇다고 ‘어른들은 모두 의심해라’가 되어서는 안되겠습니다. 의심만 하느라 지체할 수 있으니 사리 분별 할 줄 아는 능력을 갖추도록 노력해야 할테고, 그 기준은 각자가 어디에 위치해 있는지에 따라 다를테니 결국엔 다양하게 겪어봐야 하지 않을까요? 그렇다고 굳이 위험한 것까지 몸소 겪기보단 책이나 다른 미디어를 통해서 공감해보고 판단해볼 수 있을 것입니다.

처음부터 절대와 중심은 없었기에,
‘자리바꿈’은 언제 어디서든 가능하니까.
이것이 교육의 기본이라고 믿기에 말이다.

제가 좋아하는 저자 우치다 타츠루는 이런 말을 합니다. ‘가르치는 사람이 배울수 있고, 배우는 사람이 가르칠 수 있다’라고요. 가르칠 사람이 배우고, 배웠던 사람이 가르치는 다른 시간 속의 문제가 아니라, 동시에 나타나는 점이라는 부분에 공감합니다. 하지만 한국교육의 현실 속에서는 가르치지만 배우지 않고, 배웠지만 쉽사리 가르치지 못합니다. 절대와 상대, 중심과 변방은 기준을 어디에 두느냐에 달라질 수 있고, 이러한 달라짐을 저자는 ‘자리바꿈(역지사지)’이라 말하는듯 합니다. 가르치다와 가르키다가 예전엔 맞춤법으로 문제가 되었는데, 현재에 와서는 가르키다도 통용될 수 있겠다 싶습니다. 급변하는 요즘 가르치는가 옳을까요? 조금 먼저 더 살아오고 그러면서 다양하게 먼저 겪어본 선생先生으로서 가르켜보는건 가능하지 않을까요? 선생은 가르키기만 하고, 생각하고 비판하고 판단하는 몫은 온전히 학생의 몫으로 둬야지요.


언행일치
인권이라는 말이 발명되어 오늘날 광범위하게 사용된다고 해서 곧 인권이 실현된 것은 아니다. 사랑한다는 말의 사용이 곧 사랑의 구현은 아니듯이 말이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 언어의 사용이 그것의 실현이라고 잘못 이해하는 경우가 다반사다. 현실을 담보하지 못하는 언어의 사용은 현실이 부재하는 텅 빈 기호일 뿐이다.
언어는 현실과 부딪히며 세계 속으로 진격할 때 비로서 의미를 갖는다. 그래서 언어(기표)가 현실(기의)에 뿌리 내리는 고정점을 찾아내는 것이 언어의 올바른 사용법이다. 이때 고정점의 좌표를 두고 현실과 언어는 긴장하고 갈등한다. 말하자면 현실과 갈등하지 않는 언어는 진짜가 아니다. ㅡ119

‘고정점’이라는 단어를 찾아보니 더 난해해져서 나름의 ‘기준점’이라는 단어로 대체하고 생각을 해봅니다. 각자가 다르듯 같은 단어를 써도 그 단어가 가지는 강약과 깊이와 높이는 다르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차이들을 지우고 임의로 정해진 기준점에 맞추고 단어를 사용하곤 하는 것은 아닐까 괜히 반성해보게 되네요. 말과 언어가 가지는 힘이 사탕발림 같은 허황된 역효과를 낼 수도 있기에 신중해야 겠지요. 무늬만 사회적이고 공공성이던 기업이나 재단들이 떠오르네요. 단어 하나 하나 머리 아프게 그렇게 고심하냐는 말을 듣곤 하는데, 아직도 많이 부족하네요

달리는 기차 위에 중립은 없다
광차문제 (trolley problem)
평소에 주목하지 않던 일상의 평면에서 한 점이 사건으로 솟아 오르면, 전체 평면이 변형되면서 새로운 의미망이 형성된다. 축구공이 이동하면 모든 선수의 좌표 값이 변해버리는 것과 같다. 즉 새로운 사건이 발생하면서 내가 서 있는 좌표 값도 변화되기에, 나는 항상 새로운 의미망(정치) 속으로 휘말려 들어갈 수밖에 없다. 의미는 항상 변형되고 생성되는 것이다. 그래서 삶은 언제나 선택의 연속이다. 이 선택이 다시 삶의 조건을 결정하기에, 우리는 결코 정치적 자장을 벗어나지 못한다. ㅡ134~135

흔히 말하는 중립의 무서움에 대해 얘기합니다. 그래서 중립은 회색, 박쥐 등으로 욕먹곤 하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예전에 옳았다고 해서 지금도 옳다는 법은 없고, 위에 사랑에 대한 얘기에서도 알 수 있듯 상황에 따라 달라 질 수 있습니다. 끊임없는 변화 속에 어떠한 이유에서건 그 자리를 고수하는건 가만히 있었으니 나에겐 죄가 없다고 말하긴 힘듭니다. 귀찮고 번거럽더라도 고민하도록 노력해야 겠습니다.

뭍은걸 묻고 묻고 묻다가 뭍는다.
이거 되나요?, 이거 안되나요? 아이들은 하루 종일 묻고 묻고 또 묻고, 허락받고 또 허락받고, 제 몸 하나 움직이는 것도 스스로 어찌하지 못한다.
이 모든 것이 교육의 이름으로 지시하고 지시받고, 허락하고 허락받는 학교의 일상이다. ㅡ142~143

애초에 아이들이 질문을 하지 않았나요? 아니죠 질문을 하지 못하는거죠. 호기심과 탐구심에 ‘아이들은 하늘도 파랗고 바다도 파랗고 왜 파래요?’ 계속 질문을 하지만 학습된 무기력이 발동됩니다. 질문에 대한 대답이 한 두번 끊기다 보면 질문해서 뭣하나 하는 허무와 공허함이 남고 질문할 이유가 없어지죠. 그러면서 왜 질문이 없냐고 하는데, 그것도 답이 이미 정해져 있는 그 질문을 원한다는 사실을 알곤 질문과는 영영 멀어집니다. 아닌가요?

학교의 기원
SBS 뿌리깊은나무 에서 똥지게를 짊어진 한석규
살펴보면 학교란 원래 그런 목적으로 생긴 것이다. 근대교육의 발생은 자본주의 생산양식에 맞는 노동력 공급에서 시작되었다. 학교는 시간과 공간을 쪼개어 행동을 통제하고, 위계적 감시와 규율로 공장노동자를 주조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래서 경제적으로는 노동력을 가졌으면서도 정치적으로는 복종할 수 있는 인간을 훈련시키는 곳이 근대적 학교의 기원이다. ㅡ143

시간은 종소리(누구를 위하여 종소리는 울리는지 궁금한 분들은 <바보만들기, 존 테일러>를 읽어보면 좋습니다)를 기준으로 원하든 원치않든 수업시간과 쉬는시간, 점심시간 등으로 공간은 교실과 복도, 운동장, 음악실, 과학실등으로 흔히 마케팅에서 보이는 TPO(Time, Place, Occasion)를 통해 길들입니다. 애들이 떠들고 장난하는데 TPO가 중요한가요? 아이들한텐 아닌데, 어른들한텐 중요하죠. 귀찮고 짜증나니까.
TPO를 잘 알아야 하는게 태생이 마케팅입니다. 마케팅은 많이 팔고 소비시키기 위함이죠. 그러기 위해서 TPO를 활용합니다. 드레스코드나 브런치 등 TPO로 소비할 이유를 잘게 쪼개서 소비를 촉진시킵니다. 헌데 이런 힘있는 소비자를 패셔니스타, 트렌더, 소셜테이너 등으로 칭송하고 그들을 쫒아가고..
마케팅과 홍보 요소들이 결국 본질은 얼마나 돈을 더 벌어주느냐 라는건 변치 않을 것입니다. 많은 기업들이 본질이 돈벌기에서 벗어나지 않는한

믿음과 의심
뭐시 중헌디?!
전문가의 낯선 언어를 믿어서는 안 된다. 전문가의 언어는 정밀한 수사와 복잡한 공식을 사용하지만 그것은 대개 그들의 편의와 이익을 감추기 위한 장식을 가능성이 크다. 중요한 것은 상식이다. ㅡ154~155

언어와 전문가 그리고 대중.. 자칭 전문가라는 사람들의 말 이전에 그 사람이 전문가인가 믿어도 될까하는 생각을 해야할 것입니다. 치약과 유산균음료 등 흰가운을 입은 사람이 말하는걸 따르면 왠지 건강해질듯한 현혹에 주의해야 할 것입니다. 엘리트주의를 주의하고, 대중주의를 따라야 한다? 에도 주의해야 겠습니다. 주의(ism)는 주의(caution)해야 합니다. 그 주의에 갇히기 쉽습니다. 히틀러를 압도적인 지지로 펼쳐놓은건 그 때의 독일국민들이었습니다. 다수가 말하는 ‘상식’이 항상 옳지는 않습니다. ‘상식적으로 그게 말이되냐?’, ‘그럼 안될건 뭐냐?’ 철인도 대중도 그르면 뭐가 옳으냐? 주체적이고 객관적인 사고를 통한 괜한 편견이나 선입견은 배제하고, 사실에 집중해야겠죠. 
경영학, 심리학, 법학, 철학.. 이 어려운게 아니라 ‘학’이 들어가는 것들은 전문가들이 만들어 놓은 것이라 대부분이 어렵다고 보는게 맞습니다.

착한 아이의 비극
착하기만 하면 호구.. 이 책 구합니다!!!
누구에게나 항상 아름다운 말만 사용하며 성인군자인 척하는 사람들이 주변에 적지 않다. 
자공이 스승인 공자에게 물었다. 마을사람들이 모두 좋아하는 사람이 되는 건 어떻겠느냐는 물음에 공자는 안 된다고 답한다. 자공이 그러면 마을사람들이 모두 미워하는 사람이 되는 건 어떻겠느냐고 하자, 공자는 역시 안 된다며 “마을의 선한 사람한테서는 칭찬을 받고 악한 사람한테서는 욕을 먹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답한다. (논어, 제13편 자로:24)
공자는 모두를 좋아하거나 모두에게 좋은 사람으로 불리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말한 것 같다. 이 대화에서 나는, 모두를 사랑한다는 사람이란 사실은 단 한 사람도 진심으로 사랑할 능력이 없는 사람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ㅡ162~163

Everything is Nothing. 모두를 사랑한다 말해도 속내는 그래도 사랑하지 않는 사랑하지 못한 한명은 있을 것입니다. 단어 하나 하나를 이렇게 분석적으로 읽어내다 보면 읽는 사람이나 읽혀지는 사람이나 피곤하고 불편하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해야겠죠. 그래야 오해와 갈등이 커지는 걸 막고 줄일 수 있을테니까요.

고립, 불안, SM
영화 <케스트 어웨이> 속의 윌슨
인간은 본질적으로 고립에 불안을 느끼는 존재다. 그래서 프롬은 이 고립감 때문에 발생하는 인간 심리의 두 측면을 강조했다. 인간은 고립감을 견디려고 자기 스스로 외부의 힘에 복종하는 마조히즘적 성향과, 다른 사람을 자신에게 의존시켜 그 사람을 자기 마음대로 지배하려는 사디즘적 성향이 있다. ㅡ169

인간은 본질적으로 그렇다라고 말하는게 불편하지만 중요한 내용입니다. 흔히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 말합니다. 무인도에 홀로 떨어지거나, 벼랑 끝에 몰린 인간은 어떻게 해서든 함께 할 대상을 만들어 내곤 하지요. 그게 허상이고 환상일 지라도 그렇게 해서라도 고립감을 잊으려 하는 것 같습니다. 관계의 불평등의 양상으로 갑성향의 사디즘과 을성향의 마조히즘이 나타납니다. 요즘 갑을문제가 자주 대두 되는 것 또한 고립감 속에서 강제적인 관계로 갑을문화가 자리하게 된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권위
‘자기부정’의 마조히즘적 성향을 자신을 희생하는 사랑으로 여기거나, ‘상대방을 지배’하려는 사디즘적 성향을 열렬한 사람으로 착각한다. 이것은 본질적으로 의존적인 성격일 뿐이며 개성과 자유의 상실을 말한다. 독립과 자유에 기초한 인격적 결합으로서의 사랑과는 완전히 대립되는 것이다.
이런 사도-마조히즘적인 성격은 ‘권위주의적 성격’으로 발현된다. 권위란 다른 사람을 우월한 존재로 보는 것인데, 그래서 권위주의 성격이란 외부에 존재하는 힘(권력)에 순종하여 힘의 원칙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을 말한다. 즉 권력을 행사하는 것뿐만 아니라 외부권력에 복종하는 것도 권위주의적 성향이라는 것이다. ㅡ170

헌신과 열의 두 가치도 상대의 동의 없이 자행되는건 사랑이 아닌 폭력일 수 있음을 얘기합니다. 어디서 봤는지 기억은 잘 안나는데, 권위는 무언가를 통해서 얻어내는 것이 아닌 후광처럼 자연스레 발현되는거라는 글귀를 본적 있습니다. 권위주의가 다른 사람의 위에서 힘을 휘두르는 것인 걸로만 알았는데, 그 힘에 휘둘리는 것도 권위주의적이다고 말 할 수 있음을 처음 깨닫게 됐습니다. 선생과 부모의 권위가 무너졌다고 많이들 얘기하는데, 이건 잘못된 걸까요? 관계의 균형이 권위로 유지가 된다? 그럼 왜 권위의 회복을 말하곤 할까요? 그건 선생이나 부모가 예전의 갑질하던 때로 돌아가기 위해 권위를 채우려 하는건 아닌가 모르겠습니다.

선과 악
왜 아이는 산타를 좋아해야 할까요? 선물주니까? 아이 입장에서는 처음 접한 산타가 충격과 공포일 수도 있겠지요 사진 출처 http://m.segye.com/view/20151223003604
또 프롬은 <불복종에 관하여>에서, 인류 역사에서 복종은 선과 동일시해왔고, 불복종은 악과 동일시해왔다 한다. 즉 사람들은 자신이 복종하는 것은 그것이 선이기 때문이고, 불복종을 혐오하는 것은 자신이 비겁해서가 아니라 불복종을 악으로 여기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는 인류 대부분의 역사에서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기 위한 방식인데, 이처럼 소수권력에 의해 조직화된 인간은 불복종의 능력을 잃게 되고, 결국 자기가 복종한다는 사실조차 모르게 되었다. ㅡ170

말 잘 듣는 아이는 착한아이, 말 안 듣는 아이는 나쁜아이
그 나쁜아이는 성탄절에 산타에게 선물도 못받게 되죠. 우는 것도 이러한 부분이 아닌가 싶습니다. 울수도 있는 건데, 어릴 때부터 울지 못하도록 억압받고 그렇게 꾹꾹 담아둔 슬픈 감정이 뻔한 신파극 앞에서도 쏟아져 나오게 되는건 아닌가 생각합니다. 별 생각없이 다들 그러니까 옳겠지 싶어 따라 시키다간 같이 엉키는게 되기에 주의해야겠습니다.

세뇌
지배계급의 의식은 교육, 미디어, 법제도, 대중문화, 종교 등을 통해서 대중에게 올바른 것으로 이식된다. 그 지배계급의 의식이 대중에게 교육되고 주입될수록 그것은 상식이 되고, 대중은 그 상식을 따르는 것으로 결국 지배에 동의하게 된다. 오늘날 지배는 철저히 대중의 동의에 의해, 즉 대중의 자발적 복종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이것이이탈리아의 사상가 안토니오 그람시가 말한 헤게모니 이론이다. ㅡ187

우리는 끊임없이 지배계급의 의식에 노출이 되고 흡수당하고 있습니다. 저자가 말하는 교육, 미디어, 법제도, 대중문화, 종교 이 다섯가지만 해도 이것을 제외하면 뭐가 남나 싶을 정도로 삶 속에 깊숙히 관여하고 있는 것들인데, 이러한 것들을 의식하고 생각하며 살지 않으면 자신도 모르게 지배계급을 옹호하고 있게 됩니다.

“윗사람을 공경해라.
나서지 마라.
겸손해야 한다.”
극심한 남녀차별을 겪은 할머니가 손녀를 사랑하기보다는 오히려 남녀차별이 유별난 것은 왜일까? 할머니는 손녀와 손잡고 여성차별에 저항하는 것이 상식일 테이지만, 현실은 정반대다.
할머니는 “어디 여자가~”라는 말을 수없이 들으며 여성차별을 당연한 문화로 받아들였다. 오빠나 남동생을 우대하고 여성 자신이 희생하는 것을 도덕적인 것으로 학습받았다. 이것을 상식으로 여긴 것이다. 그래서 한국사회의 지배권력인 남성의 생각을 할머니 자신의 생각으로 학습함으로써, 몸(존재)은 여성이지만 생각(의식)은 남성의 것이 되었다. 할머니는 ‘(여성의) 존재를 배반해버린 (남성의) 의식’으로 손녀에게 여성차별을 재생산하게 된다. 그렇다면 이 할머니는 여성인가, 남성인가? 생물학적으로는 여성이지만, 사회적으로는 남성이다. 여성 화장실을 이용하는 이 할머니는 항상 남성의 이익을 위한 정치행위를 할 것이다. 오직 남성의 언어(의식)로 사고하기에 남성의 욕망(권력)을 재생산하는, 그래서 정치적으로는 남성으로 기능한다. ㅡ187~188

세뇌가 얼마나 어마무시하게 작용하는지를 보여주는 단면입니다. 요즘에야 여혐에 대해 미소지니에 대해 논의가 공론화 된게 아닌가 생각이 들죠. 힘 없는 사람이 선망하는 힘 있는 사람을 옹호하고, 가난한 사람이 부자들 세금을 걱정하고, 정치혐오나 기타 여러 혐오들이 우위의 계급에 의해 만들어지고 더욱 무관심해 지는건 아닐까요?
교육도 마찬가지죠. 뭐하나 맘에 드는 구석을 찾기가 힘든 교육을 받고 자란 기성세대들이 기존의 교육체제를 옹호하고 거기에 자녀를 맡깁니다.

학교 성적도 개인의 학력만 측정하는 게 아니라 자본주의 승자독식을 내면화하는 과정이다. 
학교에서 1등은 학교 밖 다른 ‘모든 것에서도 올바른 것’이 되고 꼴찌는 ‘아무것에도 쓸모없는 것’이 되어, 정작 사회적 노동은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여기게 한다. 한때 공부 못했다고 평생 노동의 값을 인정하지 않는 사회를 상식으로 받아들이게 한다. ‘그래, 나는 공부 못했으니까 이러는 게 당연해’라며 저임금 노예노동을 스스로 받아들인다. ‘그래, 나는 한때 공부 못했지만, 지금은 열심히 열심히 일하니까 내 노동의 대가를 내놓아라’는 생각을 하지 못하게 학습 받은 것이다. ㅡ189

노~~~~~~~~~~~오~~~~~~~~~력을 안해서 열정페이나 먹고 살 팔자라고 체념하는 현실이 안타깝습다. 갈수록 인턴만 늘어갑니다. 선택의 여지가 마땅치 않아 부득이한 판단일 테지만 계속 그렇게 살 수는 없지 않은가요? 나서지 말고 가만히 수긍하고 ‘다 내탓이요’를 외치며 겸손하게 살던가, 변화를 모색하던가 해야할텐데 그건 더 골치아픈 일입니다.


다시 차근히 읽어보니 왜 질문을 가르치지 않는지 알 것 같습니다. 질문을 가르치지 않을 뿐더러 질문을 할 수 없게끔 만들어 났다는 사실이죠. 
그리고 읽어야 할 필요성을 절실히 느꼈을 때 에리히 프롬의 책들(자유로부터의 도피, 소유냐 존재냐, 사랑의 기술)을 읽어봐야겠습니다.

족쇄에 빠진 코끼리

어릴 때 발목에 쇠사슬을 묶어 충분한 힘이 생겼어도 학습된 무기력에 그냥 길들여진 체로 살아가는 코끼리가 실수로든, 사람이니까 깨닮을 통해서든 족쇄를 끊고, 제 길을 가야겠다. 그러기 위해선 족쇄를 분석하고 집요하게 끊어 내야겠다. 자신도 모르게 족쇄를 더 단단하게 하고 서로 족쇄를 자랑하고 있을지 모른다.

노예에서 벗어나기 위해선 족쇄를 인식하고 끊어 내야 한다.

물 만난 코끼리

이미 살아온건 어쩔 수 없다지만, 앞으로도 그렇게 살겠다면

그래라 네 맘이니까


솔직히 책의 마지막에 있는 독서, 책읽기에 관한 내용은 어쩌면 뻔한
개개인에 따라 호불호가 분명히 갈릴 수 있을 내용이라는 선입견에 그냥 넘어가려다가 그래도 공감했던 부분이 많아서 마저 읽기 시작했고, 그래도 읽어보길 잘 했구나 싶은 생각이 듭니다.

자기하기 나름이에요
고등학교 때 무협지에 통달한 친구는 독특한 언어로 세상을 해석했다. 그의 그럴듯한 통찰이 무협지로부터 얻은 것인지 모르겠지만, 어쨋든 무협의 언어에 빗대어 현실을 재치 있게 재현했다. 그런데 오랫동안 <논어>를 공부했다는 ‘어른’은 언제나 공자 말씀을 앞세워웠지만, 그의 언행은 인지장애에 가까웠다. 매번 그의 발밑에서 장식품으로 나뒹구는 공자는 한없이 초라해졌다. 이른바 저급한 책이 무익하지만은 않은 것 같고, 좋은 책이 항상 사람을 깨치게 하지도 않는 것 같다. 그렇다면 무엇을 양서라 하는 것일까? 만약 책이 문제가 아니라 읽는 사람이 문제라면, 책의 효용은 어디까지일까 하는 의문을 갖고 있다. ㅡ205

책도 하나의 도구입니다. 고전은 오래된 도구, 인문학은 누구나 썼으면 하는 도구 뭐 그런 도구의 하나라 생각합니다. 도구는 죄가 없습니다. 
칼이 있습니다다. 요리사의 칼이 있고, 장군의 칼이 있고, 강도의 칼이 있고, 망나니의 칼이 있고, 수많은 칼들이 있습니다. 거기에 대고 칼이 옳다 그르다 말할 수 있을까요? 하지만 종종 위대한 책을 숭배하는 사람들이 책을 읽지 않은 사람을, 만화나 소설을 읽는 걸 저급하게 보는 그 옹졸함은 책을 헛 읽은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합니다.

엘리트와 대중
전문가들은 자기가 아는 것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아는 것처럼 말한다. 그들 지식은 칼날처럼 날카롭기도 하지만, 바로 그것으로 인해 편협한 세계관을 갖기도 한다. 그런데 교양인의 독서는 전문가와 다른 방식을 취하는데, 대체로 밑으로 밑으로가 아니라 옆으로 옆으로 발을 벌리는 형국이다. 그래서 책을 읽을수록 자기가 알지 못하는 것이 너무 많다는 역설을 깨닫게 되고, 자기가 알지 못하는 것에 침묵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 교양이기도 하다. 무지에 따른 행동일지라도 면책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어 좀 더 조심스러워지고, 또 세상에 중립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어 좀 더 과감해지는 것이기도 하다. ㅡ206

저만 해도 전문가이면서 교양인이고, 교양인이면서 전문가 임을 느끼며 곤란해 하곤 합니다. 허나 자신은 오로지 전문가다. 혹은 교양인이다. 라는 독선이 자리 하게 되면 그 때 부터 헤어나오기가 힘듭니다.
내가 책 한권을 통해 아는 것보단 모르는게 이렇게도 많았구나 싶다가도, 어설피 들은 한마디에 그것에 대해 통달 한 것 마냥 강철처럼 뻔뻔하게 굴기도 합니다. 그래서 반성하기 바쁘게 사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람 참 쉽게 변하지 않아요.

이 책에 대한 총평으로 <데미안, 헤르만 헤세>를 읽지 않은체 ‘아프락사스’를 쓰는게 부끄럽긴 하지만 이 단어 밖에 적절한 단어가 떠오르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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