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범 김구 기념관

우리 역사의 스승이신 백범 김구 선생의 일생을 돌아보며, 내 조국을 잘 지켜내야 한다는 사명감이 들었다. 애국지사들의 열정이 헛되지 않도록 민족의 기개와 얼이 잘 지켜질 수 있도록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를 맞아 준 <인천외국어고등학교 역사 해설 도슨트 오빠들 — 인천외국어 고등학교에 재학중인 1학년, 2학년 오빠들이었다. 장래 희망이 외교관과 정치인이 되어 우리나라에 도움이 되고자 한다며, 벌써부터 봉사 활동을 하고 있다. 본받아야 할 점이다.(참고로 도슨트란 안내자란 뜻이다)

백범 김구기념관에 들어서면 제일 먼저 만나는건 순백색의 의자에 앉아 있는 선생님의 좌상이다. 두루마기를 걸치고 앉아 있는 김구 선생 뒷면에 걸린 커다란 태극기는 그분의 나라사랑의 열정을 보여주는 것 같다.

김구 선생님의 호 백범(白凡)이란 흰 호랑이가 아니라, 두 개의 단어가 합쳐진 말이다. 백정(白丁)의 백+ 범부(凡夫) 의 범이 합쳐진 말이다.

즉 아래로는 천하디 천하다는 천민으로부터 보통사람에 이르는 국민을 모두 생각하는 사람이 되겠다는, 조국을 위해 ‘머리’가 아니라 ‘발’이 되겠다는 선생님의 큰 뜻이 담겨 있었다.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남의 침략에 가슴이 아팠으니, 내 나라가 남을 침략하는 것을 원치 아니한다.

우리의 부력은 우리의 생활을 풍족히 할 만하고, 우리의 강력은 남의 침략을 막을 만하면 족하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선진국이냐 후진국이냐의 기준은 그 나라의 문화수준이라더니, 김구 선생님의 생각은 이미 조국의 먼 미래도 내다보고 계신다.


백범 김구 선생에게 영향을 준 인물들

김구 선생님의 뒷바라지를 위해 평생을 헌신하신 어머니 곽낙언 여사의 모습이다. 부잣집에서 하루 종일 허드렛일을 하며 얻은 찬밥을 언제나 감옥에 가져가셨다고 전해진다. 1992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고능선 선생 ; 이 분에게서 민족적인 시각을 새로이 확립하고, 유학과 의리의 세계관과 판단, 실행, 계속의 단계로 일을 성취해야 한다는 실천철학을 배우게된다.


안타까운 죽음

1949년 6월 26일 육군 소위 안두희가 쏜 흉탄에 맞아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이하였다. 김구 선생 서거 후 40년 만에 이루어진 국회 조사 활동에서 ‘김구 암살 사건’은 안두희에 의한 우발적 단독 범행이 아니라, 친일파와 반통일 세력 그리고 당시 정권 수뇌부에 의해 면밀하게 모의되고 조직된 범죄였음이 밝혀졌다.

실제로 선생님이 작성하신 원본

종이가 워낙 귀해서 굉장히 작은 글씨로 꼼꼼히 작성하셨다.

백범 김구 선생님의 묘역에서 묵념을 하고 있는 가족과 도슨트들

기념관 투어를 마치고 마지막으로 김구 선생님의 묘역에서 묵념을 했다. 추운 날씨였으나 나라사랑의 뜨거운 열정을 느낀 시간이었다.


다녀온 후의 활동

선생님의 유작 다시 읽기

기념관에서 받아온 활동지 읽기

One clap, two clap, three clap, forty?

By clapping more or less, you can signal to us which stories really stand ou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