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구체적으로 만드는 것

이것은 지난 번에 이름에 관해 썼던 글로부터 이어지는 글입니다. 정말로 이름에 관한 이야기라기보단, 이름이라는 것으로부터 시작된 단상 정도로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나는 지난 글에서 이름이 가진 신비성에 관해서, 그리고 스스로 이름을 갖지 못하는 불공정함에 관해서 이야기한 바 있습니다. 내가 느끼는 신비함을 여러분께 납득시킬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이야기하려는 것은 아마 조금은 납득하기 쉬운 이야기일 것입니다.

세상엔 많은 사물들이 존재합니다. 사물은 각자의 기능, 질료, 의미, 개발자, 모양에 따라 분류되고 이름 붙여집니다. 우리 중 대부분은 그들의 주어진 이름-given name-만을 알고 있을 뿐이며, 대개의 경우 그 이름이 붙여진 경위나 배경은 잘 알지 못한 채로 살아갑니다. 한 사람이 세상 모든 사물의 이름을 섭렵할 수는 없는 법, 어쩔 수 없이 우리 중 대부분은 모르는 사물들의 이름을 갖게 마련이지요. 이 글의 배경에 깔린 사진은 내가 촬영한 ‘천사채'의 사진인데, 천사채라 함은 회 밑에 까는 혹은 깔려 있는 ‘그것'으로 흔히 지칭되는 대상입니다. 위에 회나 각종 가니쉬가 얹혀져 있지 않은 천사채는 여러분이 보듯이 매우 추상적으로 보입니다. 누군가는 이것을 보고 얼음이라 추측하기도 하고, 물이라 추측하기도 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 천사채 이미지 위에 회가 얹어지는 순간, 이 천사채는 매우 구체적인 대상으로 ‘변합니다’.

그러한 사물들의 이름은 검색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누군가 사과나 배 따위의 과일을 싸는, 그물처럼 생긴 ‘그것'의 이름이 궁금하다면, 구글이나 네이버에 무슨 단어로 검색해야 할까요? 그것의 정확한 명칭은 ‘난좌망'인데, 흔히 그물망이라고 불리우기도 합니다. 만약 난좌망의 사진을 클로즈-업 한 이미지가 있다고 가정해봅시다. 그것은 천사채와 마찬가지로 매우 추상적으로 보일 겁니다. 그러나 그 옆이나 위에 과일이 놓여져 있다면, 그것의 용도에 의해서 난좌망은 그 의미를 갖추게 됩니다.

비약일지도 모르지만, 나는 인간들도 대부분 ‘그것’으로서 살고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때로는 ‘김부장님'으로, 때로는 ‘누구 엄마'로, 때로는 ‘사진 찍는 걔’, 혹은 ‘요리하는 걔'로 말이죠. 그것은 우리가 가진 인생의 신비성을 심하게 해치는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수식들이 나를 구체적인 인간으로 만든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것없이 내가 완전히 독립적인 인간으로서 존재하기는 몹시 어려운 일이니까요. 나의 직업-기능이 나를 대변하는 것일까요? 그럼 제대로 된 기능을 하나도 갖추지 못한 지금의 나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일까요? 내가 천사채라면, 나를 구체적으로 만드는 대상은 무엇일까요? 정말로 그런 대상이 필요한 걸까요?

그런 대상 없이 살아가겠다는 다짐은 몹시 거만하거나 나태한 일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인간은 사회적인 동물이고, 사회에서 수행하는 능력으로 평가받으며 평판을 쌓으니까요. 그것을 거부한다면 사회 부적응자 소릴 듣기 십상이겠지요. 아마 이것은 나는 다르게 살고 싶다는 바람과 크게 다르지 않은 바람일 것입니다. 그리고 다르게 살고 싶다는 문장에는 ‘남들과' 다르게 살고 싶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겠지요. ‘지옥은 타인이다.’라는 문장을 썼던 사르트르도 아마 이와 비슷한 생각을 한 적이 있지 않을까요? 나는 이러한 운명을 타고난 인간들이 모여 사는 이 세상이 지옥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지옥 속에 사는 인간들은 사물에게 똑같은 운명을 부여하고, 그것을 아무렇지 않게 소비합니다.

독보적인 개인으로서 존재하는 일이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생각해봅니다. 과연 그렇게 존재했던 인간이 세상에 한 번이라도 있기나 했던가요. 사르트르도 그런 인생을 살지는 못했습니다. 사물과 인간을 동일선상에 두고 비교하는 일 자체가 무의미한 일인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나는 누군가를, 혹은 나 스스로를, ‘누구 엄마'나 ‘김부장'이라고 부르길 거부합니다. 그리고 누군가 나를 그렇게 부른다면, 망설임없이 그를 비난할 것입니다. 그것은 나를 지옥에 빠뜨리려는 시도나 다를 바 없을테니까요. 만약 나를 구체적인 인간으로 만들 대상이 꼭 필요하다면, 기왕이면 괜찮은 것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직업이나 직책이 아니라, 내 피부의 색깔이나 연배가 아니라, 멋있고 괜찮은 것이었으면 좋겠다는 바람. 이런 생각에 눌려 있는 나는 그 장 폴 사르트르 조차도 멋있다고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인간이 자신의 업적으로 이름을 남기는 것에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여러분에게 물어봅니다. 당신은 당신을 구체적으로 만들어줄 무엇인가를 필요로 하나요? 그것이 필요한 우리들은 지옥에 살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