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은 영혼의 조명이다

⎯ 페소아와 페소아들


모든 이름에서 꿈틀거리는 영혼의 낌새를 찾을 수 있다. 사람의 이름에서, 동물의 이름에서, 식물의 이름에서, 나는 그 영혼의 낌새를 알아차린다. 이름을 가진 것은, 영혼을 가진 것이다. 그러나 그 이름은 호명되길 요구하고, 쓰이길 요구한다. 호명되지 않는 이름은 숨이 멎은 이름이다. 우리는 보통 하나의 주어진 이름으로 불린다. 우리가 보통 하나의 이름으로 살아가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여기, 최소 일흔 다섯 개의 이름을 가진 포르투갈의 작가가 있다. 그는 시인인 자신의 이름으로 시를 쓰면서, 또 다른 자신의 이름으로, “나는 시를 쓸 능력이 없기 때문에 선택의 여지가 없다.”라고 밝히기도 한다. 그는 칠십여 개의 이름을 일일이 호명한다. 칠십 개의 영혼이, 칠십 개의 영혼을 호명한다. 그는 각각의 이름에게, 각각의 직업과, 배경과, 아버지와, 어머니와, 국적과, 고향과, 절망과, 기쁨과, 생일과, 필체를 부여한다.

“난 존재하지 않는 패거리를 만들어냈어. 이 모든 걸 실제 세계의 틀들에 맞췄지. 서로 주고받는 영향들에 눈금을 매기고, 우정 관계들을 구체화시키고, 내 안에서, 다양한 관점들과 토론들을 경청했고, 이 모든 것으로 봐서는, 그들 모두를 창조한 사람 그러니까 나는, 가장 거기에 없던 사람이었어. 모든 게 나랑 상관없이 독립적으로 이뤄진 느낌이었어. 그리고 지금도 그렇게 유지가 되고 있는 것 같다네”

페르난두 페소아는 국내에 아직 잘 알려지지 않은 포르투갈 출신의 작가다. 현재는 포르투갈의 현대 문학에서 가장 중요한 작가로 손꼽히고 있다. 국내에 알려진 그의 책은 1994년 번역되어 출간된, 알베르투 카에이루라는 이명으로 쓰인 시집 『양 치는 목동』―현재는 절판되었다― 한 권과, 중역된 『불안의 책』두 권이 전부였으나, 최근 워크룸 프레스에서 『페소아와 페소아들』이라는 제목의 산문집이 출간되어 독자들은 페소아를 더욱 깊이 알 수 있게 되었다. 2014년 봄, 페소아의 산문집인 『불안의 서』가 소설가 배수아에 의해 재번역되어 출간되면서, 그제야 한국의 독자들에게 주목받기 시작했다. 그는 생전에 포르투갈 어로는 사망 직전 오직 한 권의 책만을 출판했으나, 27,543매에 달하는 글을 남기고 죽었다. 그 글들은 최소 75개에서 많게는 136개의 이름으로 쓰였으며, 그렇기 때문에 그가 죽은 지 50년이 지난 뒤인 1982년에야, 그의 작품들이 비로소 세상에 나오게 되었다. 나는『불안의 서』를 읽고,―이 책을 읽은 누구라도 그럴 것임을 확신하며―페르난두 페소아에게 완전히 매료되었다. 그토록 격렬하고, 아름다운 히스테리가 있을 수 있으리라 생각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나는 페소아와 그의 헤테로님(Heteronym, 異名)들로부터 영혼의 기원을 발견했다.

1. 이명(異名)의 발견

페르난두 페소아를 논할 때, 그가 헤테로님의 작가라는 사실을 빼놓고 이야기할 수는 없다. 헤테로님의 개념은 그를 위한 것이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그가 사용하는 이름들은 그 자신의 가명이 아닌, 이명(Heteronym, 異名)이다. 가명이라고 할 경우, 그 자신의 정체성과 성향이 다른 이름으로 쓰인 글에서도 어쩔 수 없이 드러나지만, 페소아의 이명으로 쓰인 글들은 서로 완전히 다른 양상을 보이기 때문이다. 한 사람에 의해서 쓰인 글들이라고 믿을 수 없을 만큼 상이한 이 글들을 살펴보면, 서로의 인물들은 각각의 우정 관계를 구축하고 있음에도, 같은 사상이나 배경을 공유하고 있지는 않다. 이를테면 알베르투 카에이루⎯페소아의 대표적인 이명의 인물이자 리카르두 레이스와 알바루 드 캄푸스, 페르난두 페소아의 정신적 스승⎯ 같은 경우, 일평생을 시골에서 살며 전원시를 쓰는 시인이었으며, 정식 교육도 거의 받지 않은 인물이다. 반면 또 다른 이명인 알바루 드 캄푸스는 미래파적 열정을 지닌 아방가르드이며, 글래스고에서 선박 엔지니어링 공부를 위해 유학까지 한 인물로 설명된다. 또한 리카르두 레이스는 군주제 옹호론자라는 이유로 포르투갈에서 브라질로 망명을 한 인물이고, 레이스와 같이 카에이루의 제자로 알려져 있으나, 레이스를 호의적으로 평가하지는 않았다.

브라질의 시인이자 평론가인 아돌푸 카사이스 몬테이루에게 보내는 페소아의 편지는 페소아의 작품을 이해하는 데에 있어 중요한 자료가 되는 텍스트이다. 페소아에 따르면, 그 편지는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쓰였으며, 따라서 “그다지 명확하지 않”은 부분이 있을 수 있지만, 그럼에도 “어느 정도는 정확한” 글이다. 위 글은 그가 ‘친애하는’ 친구인 카사이스 몬테이루의 지난 편지에 답장을 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지난 편지에서 카사이스 몬테이루는 페소아에게 여러 가지 질문을 던진 듯 하다. 몇 가지의 질문들⎯작품들의 미래 출판 계획, 페소아의 이명들의 기원, 오컬트주의⎯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페소아의 이명들의 기원에 대한 질문이다. 페소아는 카사이스 몬테이루를 정말로 친애했던 것인지, 의외로 그 기원들에 대해 상세히 설명한다. 놀라운 것은, 그들 모두가 마치 살아있는 인물들처럼 생생하게 묘사된다는 것이다. 그들에 대한 페소아의 묘사는 자신이 창조해낸 캐릭터에 대한 설명이 아니라, 실존하는 인물에 대한 설명처럼 보인다. 글의 말미에 페소아는 이러한 자신의 상태를 간략하게나마 설명하는데, 바로 이 대목이다.

“이 주제와 관련해서 몇 가지 메모를 추가하면……. 나는 내 눈앞에 보여, 색깔은 없지만 꿈보다 현실적인 공간에서, 카에이루, 리카르두 레이스, 그리고 알바루 드 캄푸스의 얼굴들과 동작들을 말이네. (…) 카에이루는 중키이고, 실제로는 허약했지만 보기엔 덜 허약해 보였어. 리카르두 레이스는 조금, 아주 조금 더 작은 키에다, 좀 더 다부지긴 해도 마른 체격이었어. 알바루 드 캄푸스는 키가 컸고(키가 175센티미터였으니, 나보다 2센티미터 큰 거지), 날씬하고 약간 구부정한 경향이 있었어. 모두 다 깔끔히 면도한 얼굴들이었고,(…)”

여기서 주목할 만 한 점은 페소아의 분열적 자아가 기본적으로 그의 히스테리적 면모에 근거하고 있긴 하지만, 일반적으로 문학에서 드러나는 자아 분열의 양상과는 다른 면이 있다는 것이다. 프란츠 카프카의 문학 전반에서도 (「선고」, 「판결」 등의 작품) 역시 분열적 자아가 드러나는데, 페소아의 글에 드러나는 자아 분열 양상은 프란츠 카프카의 그것과는 확연히 차이가 있다. 카프카에 의해 창조된 인물들이 그의 성장 배경에 근거한 자아의 ‘전위’에 가깝다면, 페소아에 의해 창조된 인물들은 자아의 ‘이탈’에 가깝다고 봐야 한다. 페르난두 페소아의 본명(Orthonym)으로 쓰인 시편들을 읽으면, 그 자신의 이름 또한 하나의 헤테로님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한 개인이 칠십 여개의 고유한 정체성을 만들어냈다는 것, 그들 모두가 남들과 구별되는 자신의 목소리를, 문체를, 언어 구사 능력을 가졌다는 사실은 놀랍기 그지없다. 그러나 그러한 그의 기질을 정신분열증, 즉 정신적 장애라고 보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페소아의 히스테릭한 면모는 겉으로 드러난 적이 거의 없으며,⎯“나와 다른 이들에게 다행스럽게도, 이 현상은 정신적으로 내면화되었어. 무슨 뜻이냐면,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아. 일상생활, 다른 사람들이나 외부와의 접촉에서 말이네.”⎯ 그의 글들을 살펴볼 때, 그가 정신분열증의 대표적인 증상인 환청이나 환상을 경험한 적은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그는 스스로도 자신이 가진 히스테리(적 신경쇠약)에 대해 파악하고 있었으며, 집필하는 과정에서 태어난 새로운 이름들이 그의 타고난 성향인 ‘탈-개성화’와 ‘가장’에 있다고도 설명한다. 미학자 진중권은 언젠가 그의 컬럼에서 정체성이라는 것은 근대적 강박이며, 페소아의 헤테로님들은 그 근대적 주체성을 해체했다고 평가했다. 페소아 역시 끊임없이 ‘자기-자신-모름’의 중요성을 역설한다. 그러나 내가 그들로부터 말하고자 하는 것은, 페소아가 그 과정에서 만들어낸 인물들에게 어떻게 고유한 영혼을 부여했는가 하는 점이다. 그들은 어떻게 생동하는 영혼을 획득했을까?

2. 이름은 영혼을 발현한다

나는 때로 어떤 사물이나 사람도 이름을 가지지 않았던 시기를 상상해본다. 그때도 의사소통을 위해서 알아듣기 힘든 소리를 내며 그들만의 방식으로 서로를 부르기는 했을 테지만, 나는 그 시기의 사람들에게는 영혼이 비교적 ‘적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지극히 개인적인 믿음이다. 이름의 기원에 대해서 나는 아는 바가 거의 없다. 그러나 추측하기로, 최초의 이름을 갖게 된 누군가는 그가 가진 고유한 개성, 혹은 특성으로 불렸을 것이다. 이를테면, 한 부족의 우두머리가 있다고 가정해보자. 그 우두머리가 큰 체격을 가졌었다면, 부족민들에게 ‘큰 사람’ 혹은 ‘거인’ 등의 이름으로 ‘불리었을’ 거란 얘기다. 이것은 현대에 우리가, 호명할 가치가 부족하다고 여겨지는 사물들을 지칭하는 방식과도 비슷하다. 우리는 그러한 사물들을 부를 때, 그것의 기능, 질료, 색, 개발자 등으로 부른다. 예를 들면, ‘빵 봉지 묶는 그것’, ‘회 밑에 까는 그것’, ‘과일을 감싸는 그것’, ‘새 신발을 사면 들어 있는 그것’과 같은 식이다. 당연하게도, 위에 언급된 모든 ‘그것’들은 공장에서 생산될 때 기재되는 각자의 고유한 명칭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의 기능과 특징에 의해 지어진 이름으로 통용된다. 다시 말해, 우리는 그들의 이름을 불러줄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호명이라는 행위의 의미를 생각해보면, 이것은 애석한 일이다. 다시, 이름을 누구나 가질 수 없어 이름이 귀했던 시기, 사람들이 하나 둘, 사물과 사람에게 이름을 붙이고, 그것을 부르기 시작하던 시기로 돌아가 보자. 그들에게, 이름을 붙이기 전과 후의 대상은 분명히 엄청나게 달라보였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사람들이 그 과정에서, 영혼의 징후를 발견했을 것이라 확신한다! 영혼을 가진 누구도 ‘밭일 하는 걔’, ‘키 작은 걔’, ‘웃지 않는 걔’따위로 불리고 싶지는 않다. 이름은 영혼을 발현하는 표현이자, 영혼의 단위이다.

“모든 사물은 세 줄이 교차하는 지점이다. 그 세 개의 줄이 사물을 형성한다. 일정 분량의 질료, 우리가 사물을 지칭하는 방식, 그리고 사물이 자리 잡고 있는 환경. 내가 글을 쓰고 있는 이 책상은 나무라는 물질이며, 내 방의 다른 가구들처럼 하나의 가구다. 이 책상에 대한 내 인상을 재현하자면, 다음과 같은 진술들로 이루어진다. 나무로 만들어졌다는 것, 그 나무 덩어리를 내가 책상이라고 부르며 그것에게 어떤 용도와 목적을 부여한다는 것, 그리고 그 위에 놓인 물건들과 그 물건들의 배열에 책상의 외적인 영혼이 있고, 물건들은 책상에 자신의 존재를 반영하며, 책상으로 침투하고, 마침내 책상으로 변신한다는 것. 책상의 색채, 색채의 희미해짐, 그리고 얼룩과 균열, 이 모두는 분명 외부에서 온 것이 확실하지만 책상의 재료인 나무가 그러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영혼을 책상에게 부여한다. 또한 영혼의 내부라고 할 수 있는 책상이라는 존재성, 책상의 개성도 외부로부터 책상에게 주어진 것이다.” ― ‘1930년 4월 6일’ 중에서

페소아에 의하면, 영혼은 외부로부터 획득되는 것이다. 나는 페르난두 페소아가 창조한 인물들에게 영혼을 부여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 모두에게 고유한 이름을 부여하고, 호명했기 때문이라고 믿는다. 다시 말해 알베르투 카에이루라는 인물이 책상이라면, 그의 질료는 그의 생몰년도, 출생지, 성장배경 등이고, 그것의 외부에서 그에게 영혼을 부여하는 것은, 그의 제자인 리카르두 레이스, 알바루 드 캄푸스, 그리고 페르난두 페소아다. 레이스나 캄푸스, 테이브 남작을 비롯한 다른 모든 헤테로님들 또한 마찬가지다. 페소아는 그를 둘러싼 외부에서 받은 영향들로 구축된 존재이고, 그는 다시 자기 내부-헤테로님-의 외부가 되어 또 다른 자아에게 영향을 미치며, 영향을 받은 헤테로님들은 다시 외부로서 페소아에게 영향을 준다. 그것이 페소아의 헤테로님들이 생동하는 이유이다. 그는 새로운 인물들을 창조해내고 그의 이름을 호명하면서, “돌담 곁 거무튀튀한 흙바닥, 축축하게 젖어 뭉개진 시커먼 지푸라기 같은 똥무더기 위에 찬란한 햇빛이 비칠 때, 모든 우중충한 사물이 황금빛으로 빛나게 되는 그 순간의 가능성”을 발견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더 이상 새로운 경험은 아니다. 과거 처음으로 이름을 짓기 시작했던 인간들 역시 그러한 경험을 했을 것이다. 페소아는 이에 덧붙인다. “모든 것은 외부로부터 온다. 그리고 어쩌면 이제는 인간의 영혼조차, 환한 빛을 발하면서 우리의 육신이라는 똥무더기를 지상으로부터 분리시켜주는 태양광선은 더 이상 아닐 것이다.”라고.

3. 공상가의 이름

“종종 나는 생각한다. 내 꿈들을 서로서로 연결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함으로써 영원히 이어지는 삶을 창조해낸다면, 탁자에 둘러앉은 상상의 벗들, 가공의 인간들로 이루어진 삶을 만들어낼 수 있다면 얼마나 황홀할까.”

페르난두 페소아는 자신을 범람한 자이다. 그는 상상, 몽상, 공상으로서 살기만을 원했다. 그리고 그것은 철저히 자신의 기질-“아주 이른 나이에 나는 감수성과 이성의 동시적이고 공통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상상의 삶이야말로 좀 허약해 보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나와 같은 천성에는 가장 적합하다는 확신을 얻었다.”-에 입각한 것으로, 자신의 영혼에 충실할 수 있기만을 지독하게 원했다. “가치를 지닌 모든 영혼은 삶을 극단까지 몰고 가기를 원한다.”, 그는 자신의 삶, 즉 공상과 현실을 합친 그의 생애를 극단까지 몰고 가기 위해, 자신을 극단적으로 점유했다. 그는 “내 것이 아닌 인상으로 살아”가는 자이며, “체념을 남용하는 자이고, 내가 나로 존재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매번 다른 이가” 되는 자이다.

나는 이름의 신비성을 믿는 자이다. 페르난두 페소아의 이름에서 보이듯, ‘페소아’라는 성은 포르투갈에서도 흔치 않은 성으로, ‘사람’을 뜻하는 단어다. 나는 한 개인의 삶은 호명되는 이름의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고 믿으며, 따라서 사람들이 자신의 이름을 스스로 선택해야 한다고 굳게 믿는 자이다. 페소아가 “우리의 것보다 한 차원 높은 세계의 존재를 믿고, 그 세계를 구성하는 존재들을 믿으며, 이 세계를 창조했다고 가정하는 초월적 존재에 이르기까지 세심하게 구별 지을 수 있을만큼 다양한 차원의 영혼성에 대한 경험”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아돌푸 카사이스 몬테이루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밝히고 있듯, 나는 페소아 역시, 같은 종류의 신비성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고 믿는다.

『불안의 서』의 역자인 소설가 배수아는 책의 말미에 ‘이름은 하나의 징후다 Nomen est omen’라는 글을 썼다. ‘Nomen est omen’은 고대 로마의 극작가 티투스 마키우스 플라우투스의 『Persa』에 쓰인 유명한 문장이다. 배수아 역시 페소아의 이름을 하나의 징후라고 설명하며, 책을 덮을 무렵 독자들은 “페소아”라는 이름에 모든 것이 들어 있음을 설명 없이 깨달을 것이라 쓰고 있다. 나는 그것에 더해, 이름이 영혼의 징후임을, 더불어, 영혼을 발현하는 주체임을 주장한다. 문득 파스칼 메르시어―이 역시 페터 비에리의 가명이다!―의 아름다운 소설인 『리스본행 야간열차』에 등장하는 문장을 떠올려본다.

‘이름은 다른 사람들이 우리에게,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입히는 보이지 않는 그림자다.’

이 글을 읽는 대부분의 독자들은, 이름이 귀했던 시기의 사람들에 비하면 너무나도 쉽게 영혼을 획득한 이들일 것이다. 우리는 날 때부터 이름을 가지고 태어난다. 심지어 세상에 나오기 전부터도, 우리의 이름은 우리의 어머니와 아버지로부터 불려진다. 그리고 세상에 태어난 뒤에는 스스로 선택하지 않은 이름으로 평생을 살아간다. 나는 이 과정이 우리들의 삶과 닮아 있다고 생각한다. 페소아가 말했듯, “가치를 지닌 모든 영혼은 삶을 극단까지 몰고 가기를 원한다.”페소아 식으로 말하자면 이것은 다시 말해 우리가 쉽게 부여받은 영혼에 가치가 없다는 뜻이다. 페소아에게 ‘가치 있는 영혼’이란, 스스로 가치를 터득하는 영혼이다. 나는 가치 있는 영혼이라면 이름이라는 소명을 달성할 필요가 있다고 믿는다. 아직까지 흔치 않게 뜻을 지닌 이름을 짓는 나라에서 태어난 사람으로서, 나는 페소아와 같은 삶을 꿈꾼다. 나는 나를 극단적으로 점유하고, 이름을 달성하는 삶을 살길 원한다. 내 이름이 내 영혼을 그대로 재현하고, 발현하길 원한다. 페르난두 페소아가 그랬던 것처럼, 영혼이 이름을 따르고, 이름이 영혼을 따르길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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