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자와 사자-라캉에 의한 레비나스” – 제 1장. 앎에서 욕망으로

  1. 난해란 무엇인가?

레비나스에 대해서도 라캉에 대해서도 아무런 예비지식이 없는 사람이 이 둘의 저작을 태어나서 처음으로 펼쳐서 몇 페이지 읽어본 후 어떠한 감상을 말할 것인가, 나는 거의 100퍼센트 확률로 예언할 수 있다.

그것은 ‘뭐라고 쓴 건지 전혀 모르겠다’이다.

알 리가 없다. 아는 편이 더 이상하다(그 증거는 나중에 제시하겠다).

만약 ‘처음 읽었을 때부터 막힘 없이 이해했다.’라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저서를 정독하기도 전에 이미 레비나스나 라캉의 사상과 방법론을 자신의 것으로 소화시켰다는 말이 된다. 물론 그러한 사람은 이런 초심자용 해설서에 손을 댈 리도 없을 뿐더러, 그것은 ‘당신’이 아니다.

어째서 내가 극히 단정적으로 ‘알 리 없다’며 단정적으로 말했냐면, 그것은 레비나스도 라캉도 의도적으로 ‘알 수 없게’ 썼기 때문이다. 저자가 ‘일부러’ 알 수 없게 쓴 것을 독자가 술술 읽을 수 있을 리 없지 않은가.

부조리한 말처럼 들리겠지만, 이것은 사실이다.

‘무엇을 말하고 싶은 것인지, 독자가 알 수 없도록 쓴다’라는 확신범적인 텍스트 퍼포먼스는 확실히 존재한다.

도대체 어째서 그런 일을 하는 것일까?

어려운 텍스트에 ‘무엇이’ 쓰여있는지 맞추는 것은 곤란하지만, ‘어째서’ 그런 식으로 쓴 것인지 맞추는 것은 그렇게까지 어려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해하기 어렵게 쓰는 사람에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어려운 말을 하는 것’이 지적위엄의 일부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이 사람들의 저작은 자신의 박학다식함을 늘어놓았을 뿐으로, ‘나는 똑똑해’ 이외에 독자에게 전하는 메세지가 딱히 없다. 이런 것은 깔끔하게 흘려 읽으면 된다.

물론 레비나스와 라캉의 난해함은 그런식의 장식적 난해함이 아니다. 이 사람들이 굳이 ‘무엇을 말하고 싶은 것인지 알 수 없게 쓰는 것’은 그들에게 ‘말하고 싶은 것이 있어서’라기 보다, 오히려 독자에게 ‘무언가를 시키기’ 위해서다.

내가 보기에, 그들은 다음과 같은 독자들의 질문을 유발시키기 위해 고의로 이해하기 어렵게 썼다.

“당신은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 이해할 수 없는 문체를 써서’ 나에게 무엇을 말하고 싶은 것인가?”

이것은 라캉 본인이 ‘아이의 담론’이라 명명한 질문 형식이다.

라캉은 ‘아이의 담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타자>의 욕망은 주체에 의해, 뭔가 제대로 수용되지 않는 것으로서, <타자>의 담론의 결여로서 받아들여집니다. 아이가 던지는 온갖 ‘왜?’는 사물의 이유를 요구하는 탐욕을 증언하고 있다기보다, 오히려 어른을 시험하는 것, 말하자면 ‘왜 그것을 나에게 말하는 것인가?’라는 질문인 것입니다. (자크 라캉 ‘정신분석의 네 가지 근본개념’ 「주체와 <타자>」, 코이데 히로유키 외 번역, 이와나미 서점, 2000년’ 286p)

모두 잘 알고 있듯이 아이는 어른이 기나긴 설교를 하는 도중에, 갑자기 화를 내며 “그래서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야?(So what?)” 라는 통렬한 반문으로 끼어들기도 한다. 아이가 이러한 질문을 던지는 것은, 아이가 어른들이 발화하는 언어의 표층적 의미 아래에 ‘언어화할 수 없는 욕망’이 은폐되어 있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야?”라는 직설적인 질문에 어른들은 종종 할 말을 잃는다. 어른들의 그런 낭패에, 아이들은 은밀하게 쾌재를 부른다.

‘어른에게 선수를 쳤다.’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정말로 아이의 반문은 어른의 이중성에 타격을 주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프로이트가 ‘기지(機知)’에서 인용한 것으로 잘 알려진 유대인 유머 중에는 이런 것이 있다.

열차 안의 유대인 한 명이 다른 유대인에게 물었다.

어디로 가나?”

렘베르크.”

그러자 물어본 유대인은 화내며 말했다.

대체 어째서 너는, 사실은 렘베르크에 가면서 크라쿠프에 가는 거라 믿게 만들려고 ‘렘베르크에 간다’고 말하는 거냐!”

이것은 그야말로 ‘아이의 담론’의 본질을 꿰뚫는 유머다.

화를 잘내는 유대인은(연령에 상관없이) ‘아이’다. 왜냐하면 그는 “당신은 그렇게 말함으로, 무엇을 말하고 싶은 것인가?”라는 ‘아이의 질문’을 타인에게 던지는 것을 ‘지적인 행동’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의 경험은, 인간은 진정한 목적지(즉, 욕망의 진정한 소재)가 타인에게 포착되지 않도록 ‘진정한 목적지와 다른 지명’을 말한다는 것을 가르쳐준다.

그러나, 타인에게 허를 찔리지 않기 위해 늘 주의하는 이 의심 많은 유대인은, 그 기지를 발휘해 ‘렘베르크에 간다.’고 말한 유대인의 허를 찌른 것이 될까?

이 유머의 진정한 해학성은, 상대의 허를 찔렀을 터인 인간은 언제나 허를 찔린다는 역설에 있다.

이는 즉, ‘인간은 언제나 정말로 말하고 싶은 것과 다른 것을 말한다’라고 생각하는 의심 많은 이 유대인은, 질문 받은 상대가 의심받을 것을 예상해서, 사실을 말해 그를 속일 가능성을 즉시 생각해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때도 그는 다시 같은 질문을 입에 담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사실’을 말함으로, 당신은 나에게 ‘사실은’ 무엇을 말하고 싶은 것인가?”

어째서 라캉이 이러한 질문형식을 ‘아이의 언설(담론)’이라 명명한 것인지, 그 이유를 우리들은 여기서 알 수 있다.

아무리 통렬하게 ‘어른의 언설’의 간극을 누비며 공격해도, ‘아이의 질문’은 결국 ‘아이의 질문’이다. 아이는 그야말로 ‘아이의 질문’을 던지는 것으로, 어쩔 도리 없이 ‘아이’임을 드러내고 마는 것이다.

아이의 질문’이란, 그것을 한 번 내뱉은 후에는, 질문된 그 ‘수수께끼’를 결코 따라잡을 수 없도록 구조화된 질문이다.

다시 말해 ‘수수께끼’에 대해 숙명적인 이면을 짊어진 존재, 그것이 ‘아이’의 정의인 것이다.

‘아이’의 정의를 이해했다면 ‘어른’의 정의 또한 자동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것은 자기 앞에 있는 인간이 ‘아이의 질문’을 던지도록 유도하는 방법을 알고 있는 인간이다. 무언가를 말할 때마다 “이 사람은 그렇게 해서 무엇을 말하고 싶은 것인가?”라는 의문을 듣는이 안에 심을 수 있는 인간인 것이다.

‘어른’은 발화되고 있는 내용과는 별개의, 더 깊은 욕망에 얽히는 것에 귀를 기울이도록 ‘아이’를 유혹한다.

레비나스와 라캉은 그러한 “의도적으로 이해하기 힘들게 쓰는 ‘어른’’’이다.

그들이 양산한 ‘사악하다 못해 난해한 텍스트’가 노리는 것은 ‘당신은 그러한 난해한 텍스트를 써서 무엇을 말하고 싶은 것인가?’라는 ‘아이의 질문’으로 독자를 유도하는 것이다. 또한 그 질문을 던지는 순간에 독자는 ‘텍스트의 의미’가 아닌, ‘저자의 욕망’의 소재를 묻는 ‘추적자’ 포지션으로 나아가게 된다.

텍스트의 의미를 쫓는 독해에서, 저자의 욕망을 쫓는 독해로의 전환.

레비나스와 라캉이 ‘이해하기 어렵게 쓰는 것’으로 독자에게 시키고 싶었던 것은, 바로 이것이다.


2. 질문 되돌리기

난해하다, 난해하다라고 반복해서 썼지만, 개중에는 그것을 믿지 않는 독자가 있을지도 모른다. 말보다 증거다. 둘의 문장을 조금만 읽어보자. 이야기는 그 후다. 우선은 레비나스부터다.

이야기란, 타자를 알게 됨과 동시에 자신을 타자에게 알리는 것이다. 타자는 단순히 알려지는 것뿐이 아니라, 인사시킨다. 타인은 명명된 것뿐이 아니라 도움을 요청하며 불려 나온다. 문법용어를 써서 말하자면, 타자는 명격이 아닌, 호격에서 출현한다. 나는 단순히 타자가 나에게 어떠한 것인지 뿐만 아니라, 그와 동시에, 아니 그보다 이전에, 내가 타자에게 어따한 것인지를 사유한다. 타자에게 존재하는 개념을 끼워맞추거나, 타자를 이러저러한 명칭으로 호명할 때, 나는 이미 타자를 부르고 있는 것이다. 나는 아는 것 뿐이 아닌, 관계한다.(DL, p20: 인용약어에 대해서는 권말 참조. 이하 동일)

뭐야, 하나도 안 어렵잖아, 라고 말하는 분이 있을지도 모른다.

과연 그럴까. 확실히 문장 자체는 그렇게까지 어렵진 않다. 하지만 자세히 읽어보면 상당히 복잡한 장치가 걸려였다. 그것은, 이 텍스트가 키워드인 ‘타자’에 대해, 일상어인 ‘타자’ 개념을 일단 (괄호에 넣기) 를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텍스트의 목적은 ‘타자란 무엇인가?’라는 질문 그 자체를 무효화시키는 것이다. ‘타자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이 텍스트는 ‘그러한 질문을 던지는 당신은 누구인가?’라며 갑자기 반문해온다.

‘타자’라는 주제가 여기 있는 이상, ‘타자의 타자’로서의 ‘나’는 이미 자명한 것으로 상정되어있다. 우리들은 ‘주체와 타자’에 대해 사고할 때, 그러한 구도를 관습적으로 전제한다.

그러나, 과연 이 전제가 엄밀한 기초 위에 쌓인 것이라 말할 수 있을까?

“어째서 당신은 ‘타자’란 무엇인가를 묻는 ‘나’의 리얼리티를 그렇게나 순진하게 믿고 있는 것인가?”

레비나스는 이렇게 반문한다.

레비나스의 문장에서는, 독자가 텍스트 내부의 개념에 대해 ‘그것은 어떠한 의미인가?’라고 물을 때마다 ‘그렇게 묻는 당신은 누구인가?’라고 반문해온다. 레비나스의 텍스트는 무언가를 이해시키기 위해 쓰여졌다기 보다는, “‘무언가를 이해한다’라는 것은 어떠한 것인가?’라는 것보다 ‘한 발자국 앞’의, 근본적인 문제로 독자들을 되돌려 보내기 위해 쓰여졌다. 예를 들자면 이런 식이다.

존재한다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마저, ‘존재한다’라는 동사를 사용해 구축한 질문이다. 묻고자 하는 해당 개념을 경유해 묻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물음에 대한 대답 또한 어쩔 수 없이 존재의 명명법으로 제시된다. (…) ‘무엇인가?’라는 물음은, 그것이 탐구하는 해당 개념과 상관되어 있고, 이미 그 전제에 의존하고 있다. (AQE, p.30)

이는 ‘질문’이란 무엇인지를 단적으로 말해준다.

‘존재한다는 것은 무엇인가?’(qu’est-ce quêtre?)라는 질문에는 이미 ‘존재한다’(être)라는 동사의 3인칭 현재 단수형(est)이 쓰여있다. 질문된 해당 개념을 전제하지 않는다면 질문 그 자체가 성립할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우선, ‘질문의 주체’인 자기동일적 주체, 투명한 코기토의 무반성적 전제를 자제하는 것부터 시작해야만 한다. 레비나스가 반복해 강조하고 있는 것은 이러한 것이다.

‘~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그것이 탐구하고 있는 해당 개념과 상관되어 있고, 이미 그 전제에 의존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레비나스를 향해 ‘당신은 무엇을 말하려 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진 바로 그 순간에, 우리는 깨닫지 못한 채 ‘탐구하고 있는 대상인 레비나스의 전제에 의존하는’ 입장에 빠져들고 있다.


3. ‘욕망하라’라고 라캉은 말한다

라캉의 ‘이해하기 어려움’의 사례는 말 그대로 ‘헤아릴 수 없지만’, 일단 ‘명함 대신’ 살인적으로 난해한 것으로 유명한 ‘에크리’의 서문을 인용하겠다.

우리들은 지금까지의 연구에 의해, 반복강박(Wiederholungszwang)은 우리들이 이전에 연쇄적 기호표현(시니피앙)의 자기주장(I’insistance)이라 명명한 것에 근거를 두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관념 자체는 ‘l’ex-sistance’(즉, 중심에서 벗어난 장소)와 상관관계가 있는 것이 명확하지만, 이 경우에는 또, 프로이트의 발견을 중시해야 하는 경우에는 무의식의 주체를 여기에 넣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아시는 바와 같이 상징계(le symbolique)가 영향력을 행사하는 이 장소의 기능이 상상계(l’imaginaire)의 어떠한 경로를 지나, 인간이라는 생체의 가장 깊은 곳까지 그 힘을 발휘하게 되는가, 그것은 정신분석이 시작한 실제경험 속에서 처음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라캉 ‘에크리1', 사사키 타카츠구 와 번역, 코우분도우, 1972년, 11p. 이하, 인용중 강조는 원문 그대로)

주의하기 바라는 것은, 이것이 ‘에크리’ 서문 중 한 단락이라는 것이다. 라캉의 이론을 집대성한 저작인, 첫 논문 중 첫 단락이다. 이것이 독자를 어떤 논고에 집어넣기 위해 쓰인 것이 아니라는 것은 한눈에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여기에는 ‘도입부’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들은 지금까지의 연구에 의해, 반복강박은 우리들이 이전에 연쇄적 기호표현의 자기주장이라 명명한 것에 근거를 두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라는 첫 문장은 갑자기 ‘지금까지의 연구’와 ‘이전에~명명한’이라는 ‘지금보다 이전’에 대한 언급으로 시작한다. 라캉은 대부분의 독자가 알 리 없는 과거의 성과에 대해, 마치 과거의 성과를 모르는 인간이 이 단락을 읽을 리 없다는 듯이 썼다.

독자는 서문의 한 단락을 읽은 순간에 이미 라캉에 대한 ‘절대적인 지연’을 강요받는다.

독자를 텍스트에 대해 ‘절대적으로 뒤쳐진’ 포지션에 위치하게 하는 것, 그것이 이 텍스트의 전략이다. 독자에게는 선택지가 두 가지밖에 없다. 이렇게 무례한 인간의 저술은 읽지 않겠다며 책을 집어던질 것인지, ‘라캉에 비해 나는 뒤쳐진 상태다’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것인지의 양자택일이다. 라캉이 이미 분절시킨 세계, 라캉이 ‘게임의 룰’을 이미 정해버린 세계의 독자는 ‘들어갈지, 말지’의 양자택일을 강요받는다. 그리고 라캉이 채용한 글의 스타일을 받아들이고 페이지를 넘겨 계속 읽어나갈 결단을 내린 독자는 그 순간에 ‘상징계’발을 들여놓은 것이 된다.

라캉은 뭐라고 썼을까?

아시는 바와 같이 상징계가 영향력을 행사하는 이 장소의 기능이 상상계의 어떠한 경로를 지나, 인간이라는 생체의 가장 깊은 곳까지 그 힘을 발휘하게 되는가, 그것은 정신분석이 시작한 실제경험 속에서 처음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상징계가 영향력을 행사하는 이 장소’란, 다름이 아닌 ‘에크리’의 서장인 이 텍스트 자체다.

상상계에 머물러 있는 독자(즉, 라캉을 욕망하는 방법을 배우지 않은 사람들)의 ‘가장 깊은 곳에서’ 라캉이 어떻게 ‘그 힘을 발휘하게 되는지’를 알고 싶다면 페이지를 넘겨라. 라캉은 이렇게 쓴 것이다.

그 순간, 독자는 ‘아버지’를 갈구하는 여정에 발을 들이게 되고, 자신이 라캉을 계속 읽고 있다는 ‘실제경험’ 속에서, 자신의 독서를 전진시키는 ‘추진력’ 속에서 ‘그 힘’을 ‘처음으로 이해하게’ 된다.

‘에크리’의 서장의 이 단락에 라캉 이론에서 가장 근본적인 가르침이 이미 적혀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 텍스트 안에서 근본적인 기능을 완수한 것은 ‘반복강박’이나 ‘상징계’ 같이 난해하기 짝이 없는 학술용어가 아닌, 누구라도 이해할 수 있는 두 표현, ‘지금까지의 연구에 의해~알게 되었습니다.’(notre recherche nous a amené à reconnaîtreque~)와 ‘아시는 바와 같이’(on le sait)인 것이다.

이 두 표현은 모두 독자에게 ‘당신은 나에 비해 뒤쳐져 있다.’라고 고하고 있다. 그리고 그 ‘지연’을 받아들인 순간에 독자는(라캉을 이해하고 있든 아니든) ‘이미 라캉주의자’인 것이다.

‘라캉을 욕망하라. 왜냐하면 당신은 자기자신이 왜 라캉을 욕망해야만 하는지 이유를 모르지만, 나는 알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지금 인용한 ‘에크리’ 서문의 인용부분을 ‘의역’하는 것이 용서된다면, 나라면 이렇게 옮길 것이다.

레비나스와 라캉, 이 두 사상가는 고유개념의 정의나 사유법을 독자와 공유하기 위해 쓴 것이 아니다. 독자에게 ‘언어의 의미’가 아닌, ‘저자에게의 욕망’에 초점을 맞춘 독해를 시작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그들은 독자에게 ‘앎에서 욕망으로’(au désire du savoir) 전환할 것을 요청하고 있는 것이다.(EC, P.109)


4. 욕망의 커뮤니케이션

사실 ‘앎에서 욕망으로의 전환’(이것은 라캉 본인의 말이다.) 자체는, 커뮤니케이션 자체로서는 그렇게 특수한 것이 아니다.

인간은 다양한 형태의 커뮤니케이션을 행하는데, 그 중에는 ‘커뮤니케이션 방법을 지시하는 커뮤니케이션’이라는 것이 있다. ‘메타 커뮤니케이션’이나 ‘커뮤니케이션의 커뮤니케이션’ 등, 다양한 용어로 불리는데, 말하자면 여기서 말하는 메세지의 ‘컨텐츠’가 아닌, 거기서 메세지가 오가고 있다는 ‘컨텍트’를 사실확인하는 것이 우선되는 커뮤니케이션이다.

로만 야콥슨은 이를 ‘친교적 기능’(fonction phatique)라고 명명했다. 야콥슨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메세지 중에는 전달을 시작하거나, 연장하거나, 끊어내거나, 혹은 회선이 작동하고 있는지 확인하거나(‘여보세요, 들리시나요?’), 대화 상대의 주의를 끌거나, 상대의 집중이 이어지는지 확인하는(‘저기, 듣고 계시나요?’라거나, 셰익스피어 풍으로 말하자면 ‘귀를 빌려주시게’, 앞의 수화기에 대고 하는 ‘네, 네.’) 역할을 하는 것이 있다. (…) 이것은 또한 유아가 최초로 확득하는 언어기능이라서, 유아는 정보가 담긴 메세지를 발신하거나 수신할 수 있게 되기 이전에, 이미 전달을 행하고 싶어하는 것이다.(로만 야콥슨 ‘일반언어학’, 카와모토 시게오 감수, 미스즈 서점, 1973년, 191p)

친교적 커뮤니케이션의 사례 중 하나로, 야콥슨은 ‘신혼부부의 회화’를 든다.

‘자’ 라고 청년이 말했다. ‘응.’하며 그녀가 말했다. ‘도착했어.’라는 그. ‘도착했네.’라는 그녀. ‘맞아, 드디어 왔어.’라는 그. ‘응.’ 하는 그녀, ‘응, 그래.’라는 그.(동서, 191p)

그들 간에 오가는 언어는 그저 한 가지 ‘욕망’밖에 운반하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들 사이에는 컨텍트가 성립해 있다.’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싶다는 욕망이다. 컨텍트가 성립해 있다는 것, 상대의 말을 듣고 있다는 것을 상대에게 가장 확실하게 전하는 방법은 상대의 말을 반복하는 것이다. 그래서 두 사람은 상대방의 말꼬리를 우로보로스의 뱀처럼 ‘서로 먹고 있다’.

오즈 야스지로는 커뮤니케이션의 친교적 수준에 초첨을 맞춰 시나리오를 쓰는 방법을 아는 특이한 영화감독이다. ‘안녕하세요’의 후반부에서, 사철 역앞에서 헤이이치로(사다 케이지)와 세츠코(쿠가 요시코)의 대화는 다음과 같다.

헤이이치로 “여, 안녕.”

세츠코 “안녕. 어젯밤은 고마웠어.”

헤이이치로 “아냐.”

세츠코 “어디가?”

헤이이치로 “잠깐 니시긴자에.”

세츠코 “아, 그럼 같이 가자.”

헤이이치로 “그래, 날씨 좋네.”

세츠코 “그러게, 좋은 날씨네.”

헤이이치로 “이 상태면 이삼 일 계속되겠네.”

세츠코 “그러네, 계속되겠네.”

헤이이치로 “응, 저 구름, 재밌게 생겼네.”

세츠코 “응, 정말 재밌게 생겼어.”

헤이이치로 “뭐랑 닮은 것 같은데.”

세츠코 “맞아, 뭐랑 닮은 것 같아.”

헤이이치로 “날씨 좋네.”

세츠코 “정말로 좋은 날씨야.”

세츠코는 헤이이치로의 말을 반복할 뿐, 헤이이치로가 세츠코에게 받는 유의미한 정보는 0이다. 하지만 “어디가?”라고 물은 세츠코는 목적지를 알아내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이는 “어디에 가든 당신의 걸음에 하늘의 은혜가 있기를.”이라고 축복하는 수사학적 물음이다.

오즈는, 그저 ‘컨텍트가 성립해 있다’라는 사실을 반복해 집요하게 계속 확인하는 이 두사람에게, 전형적인 사랑의 말을 한 마디도 시키지 않는다. 하지만 서로를 갈구하는 그들 욕망의 격렬함을, 관객들은 그 ‘집요함’ 속에서 올바르게 감지할 것이다.


5. 생성적인 읽기

일찍이 모리스 블랑쇼는 작가와 작품의 관계에 대해 이렇게 썼던 적이 있다.

작가는 그 작품을 통해 처음으로 자신의 위치를 알게 되고, 자신을 형태로 만든다. 작품보다 이전에, 작가는 자기자신이 무엇인지 모를 뿐더러, 그 무엇도 아니다. 작가는 작품 이후에 처음으로 존재하기 시작하는 것이다.(Maurice Blanchot, ‘La littérature et le droit à la mort’ in La Part du Feu, Gallimard, 1949, p.296)

이 말은 텍스트와 독자의 친교적 관계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블랑쇼의 ‘작가’를 ‘독자’로 고쳐쓰면 이렇게 읽을 수 있다.

‘독자는 그 읽기를 통해 처음으로 자신의 위치를 알게 되고, 자신을 형태로 만든다. 읽기보다 이전에, 독자는 자기자신이 무엇인지 모를 뿐더러, 그 무엇도 아니다. 독자는 읽기 이후에 처음으로 존재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읽기 전에, 텍스트의 ‘의미’는 미확정 상태이고 독자의 ‘아이덴티티’ 또한 미확정 상태다. 그것은 읽고 있는 텍스트와 독자의 상호적인 얽힘을 통해 천천히 연성되어가는 것이다. 레비나스도 텍스트와 독자의 상호작용에 대해 이렇게 썼다.

우리들 현대인도 곧잘 이렇게 말하지 않는가. ‘이 상태가 되고 나서야 파스칼의 그 말이 겨우 이해됐다.’ ‘몽테뉴의 그 말의 의미를 겨우 이해했다.’. 위대한 텍스트가 위대하게 존재하는 것은, 바로 텍스트에 이끌려 사실이나 경험과 만나, 그 사실이나 경험이 텍스트의 심층을 역으로 비춰주는 상호작용 때문이 아닐까.(QLT, p.89)

이는 우리들도 경험적으로는 숙지하고 있는 사실이다. 나츠메 소세키를 어린시절에 읽을 때와, 중년이 되고나서 읽을 때, 텍스트의 표정은 일변한다.

우리들은 같은 텍스트에 완전히 다른 양상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리고 만약 우리들이 ‘어른’이 되었기 때문에 나츠메 소세키의 텍스트를 그렇게 읽게 되었다면, 그 성숙에는 이미 어린시절에 나츠메 소세키를 읽은 경험이 관련되어 있는 것이다.

독해능력은 독서경험을 통해서만 쌓인다. 이는 말하지 못하는 갓난아이가 어머니의 발화를 통해 언어를 습득하는 과정과 닮았다. 우리들은 텍스트를 읽는 것을 통해 텍스트를 읽을 수 있는 능력(리터러시)를 익힌다. 텍스트가 빠진 리터러시도, 리터러시가 빠진 의미도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읽기란 본래 ‘친교적’, ‘대화적’인 의미라고 생각한다. 나는 이 생각을 레비나스에게 배웠다.

탈무드의 텍스트 그 자체는 다양한 중요질문을 아우르는 지적격투이며, 그 질문에 대한 새로운 시잠을 제시하고 있다. 그 질문에 접근한 순간, 해석자는 사소한 의논의 외견에 현혹되는 일 없이, 자신의 길을 개척해 나가야만 한다. 왜냐하면 그러한 언뜻 보기에는 공허한 의논 속에야말로 현실에 대한 통찰이 숨어있기 때문이다. 반어적이고 건조한 문체로 이야기하는 탈무드의 페이지는 조촐하고 간단하면서도 각종 독해가능성에 대해 뜨겁게 열려있다. 탈무드는 구전율법이 우연히 기록되어 문자화된 것이니, 그 본연의 대화적, 논쟁적인 생명을 되살릴 필요가 있다. 그때, 다양한(그러나 자의적이지 않은) 의미가 문장 하나하나에서 떠올라 중얼거리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런 고로 탈무드는 대립을 추구하고, 독자에게 자유와 발명의 재능과 대담함을 원하는 것이다. (QTL, pp.13–14)

이 짧은 인용 속에는, 레비나스 텍스트론의 근본적 사상이 적혀있다.

그것은, 텍스트의 의미는 하나가 아니라 독자의 수 만큼 존재하며, 그런 고로 독자에게 ‘영광’이 있다면, 그것은 ‘자유와 발명의 재능과 대담함’을 발휘해 그 문장에서 전대미문의 의미를 건져올리는 것에 있다는 말이다.

현대비평이론을 어느정도 아는 사람이라면 독해에 대한 이런 생각이 그닥 특이해 보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 읽기의 ‘자유’와 ‘다양성’을 지탱하는 논리는 예상하는 것보다 복잡하다.

탈무드 해석에 자유와 발명과 대담함이 허락되는 이유로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텍스트는 ‘완전기호’이며, 그렇기 때문에 독해가능성의 정의상 ‘무한’하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그 ‘완전기호’의 의미 때문에 전통적인 ‘독해훈련’을 받아야만 한다는 것이다.

탈무드의 텍스트는 ‘완전기호’이며, 그로부터 퍼올릴 수 있는 의미에 한계는 없다. 그러나 무한한 의미를 퍼올리는 방법은 한정되어있다.

모순된 독해이론이다.

관습적 발상에 따르자면, 텍스트로부터 무한한 의미를 퍼올리기 위해서는, 무한한 독해법이 필요하고, ‘무한한 독해법’은 독자 개개인의 고유한, 자유롭고 개성적인 독해법일 것이다. 그러나 레비나스는, 텍스트에서 무한한 의미를 퍼올리기 위해서는 ‘정해진 독해법’을 사용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 논리는 단순하지 않다.

보통, ‘정해진 독해법’으로 읽는 독자는 어느 텍스트에서든 단일한 의미밖에 발견하지 못한다. 어떠한 텍스트를 앞에 두더라도, 반유대주의자는 거기서 ‘유대인의 세계지배’의 징후만을 읽어내고, 마르크스주의자는 거기서 ‘계급의식’의 표출만을 읽어낸다. 이것은 말하자면 ‘감축시키는 읽기’다. 여기서 독자는 미리 설정해둔 의미를 ‘다시 발견’하기 위해 텍스트를 읽는다.

그렇다면 ‘자유로운 읽기’는 어떨까. 어떤 기존의 독해규칙에도 따르지 않는, 극히 창조적이고 경련적인 읽기야 말로 ‘읽기의 왕도’라는 말일까?

이 또한 있을 수 없다. 우리들이 ‘나는 온갖 예단으로부터 자유로운, 진정으로 단단한 독자다.’라는 전제를 무반성적으로 채용하는 순간, 우리들의 읽기를 결박하고 있는 무수한 사회적 제약(성별, 연령, 인종, 종교, 정치적 입장, 가정환경, 섹슈얼리티, 질병이력, 트라우마 등)을 조직적으로 간과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정해진 읽기’는 ‘정해진 의미’로 밖에 귀결되지 않고, ‘자유로운 읽기’ 또한 ‘정해진 의미’로 돌아온다. 그렇다면 대체 ‘무한한 의미’로 향하는 길은 어떻게 담보되는 것일까?

레비나스는 이 곤란한 질문에, ‘완전기호’의 독해법은 스승을 따르며 배울 수 밖에 없다는, 의표를 찌르는 대답을 내놓는다.

One clap, two clap, three clap, forty?

By clapping more or less, you can signal to us which stories really stand ou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