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 속에 숨겨진 색을 찾아서

— 유년시절의 긍정적 트라우마에 대해


누구나 한 번쯤은 던져봤을 법한 질문들이 있다. ‘내가 진정 좋아하는 것은 무엇일까?’ 혹은 ‘나는 어떤 삶을 살고 싶은 걸까?’ 같은 질문들 말이다. 내게 이런 질문들은 오랜 친구와 같았다. 거리를 따라 늘어선 수많은 불빛 속 때때로 방향을 잃어버린 것 같을 때면 그의 집에 찾아가기도, 혹은 군중 속 문득 마주친 옛 기억의 냄새처럼 그들이 나를 찾아오기도 했다. 하지만 그 친구들은 꽤나 과묵한 나머지 멱살을 잡고 흔들어도, 온갖 고문도구에도 기밀을 발설하지 않으려는 첩보요원처럼 쉽사리 내게 답을 주지 않았다. 결국 제풀에 지친 나는 거울을 들고 나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 고작이었다.

어릴 적 시를 한 편 쓴 적이 있다. 시라고 부르기도 창피한 것이지만 내용은 대략 이러했다. “A는 책상 위 무언가를 그리고 있다 / B는 연필로 지우개에 구멍을 내고 있다 / C는 종이를 접어 무언가를 만들고 있다 / … / 그리고 그것을 바라보는 나” 기억을 되살려보면 그곳은 한 교실이었던 것 같다. 수업이 꽤나 지루했던지 나름 열심히 수업을 듣는다고 생각했던 나도 딴짓을 하고 있었음이 분명했다. 쓰고 나서 그 행위, 그리고 시는 금방 잊혔다. 하지만 오랜 시간이 흐르고, 거울을 들어 나란 책의 페이지를 하나씩 들추자 페이지마다 희미하게 찍혀있는 그 시가 보였다.

영국 드라마 「셜록」에서 셜록은 그가 만나는 사람을 유심히 (극 중에서는 굉장히 짧은 시간만에) 관찰하곤, 그가 오늘 아침 뭘 먹었는지, 장 운동은 활발한지 같은 시시콜콜한 정보로 무안을 주는 장면이 있다. 나는 이 장면이 굉장히 흥미롭게 느껴졌다. 누군가를 단편적인 정보로 판단한다는 문제는 둘째 치더라도, 나는 관찰이란 과정 자체에서 일종의 동질감을 느꼈다. ‘지하철에 앉아 마실 것도 없이 샌드위치를 먹고 있는 저 남자, 시간은 오후 3시 남짓, 펑퍼짐한 바짓단의 정장, 두껍고 무거워 보이는 닳은 서류가방, 저 사람은 어떤 회사의 영업사원일까? 그리고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 비록 셜록처럼 빠르게, 그리고 드라마였기에 가능한 일이겠지만 정확하게, 그를 관찰하고 판단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보이는 것들과, 그 뒤에 생긴 긴 그림자의 색과 모양을 상상하는 일은 내게 큰 즐거움이었다.

그날도 나는 여느 날과 다르지 않게 글을 쓰고 있었다. 생각의 흐름을 따라 나는 피아노 건반 치듯 노트북 키보드를 끊임없이 두들기고 있었다. 질문은 여전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은 무엇인지, 이 험난한 세상에서 나는 어떻게 먹고살아야 하는지, 끝없는 순환선 지하철 같은 질문들이었다. 그러다 먼지가 수북이 쌓인 책을 집어 든 것처럼, 《어릴 적에 쓴 시》라는 역에 잠시 내리게 되었다. 나는 이제 아무도 없는, 비어버린 플랫폼에 앉아 멍하니 생각했다. 그리고 그 짧은 시가, 내가 지금까지 했던 수많은 행동들, 시도들을 꿰어내는 실이 되었음을 느꼈다.

Kallistii @Pixabay

트라우마Trauma는 일반적으로 부정적인 의미를 가진다. 강렬했던 상처, 또는 충격들은 우연한 상황 속 그에게 찾아와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들을 불러일으킨다. 나는 긍정적인 트라우마에 대해서 생각했다. ‘내 무의식 속 마리오네트의 끈처럼 나를 움직이게 만든 무언가, 그것은 바로 어릴 적 가볍게 쓴 시가 아닐까?’ 이 생각에 도달하자 나 스스로에 대한 많은 물음들이 해결되었다. “시 속 나의 행위-관찰”과 “시 바깥의 행위-씀”이 지금까지 내가 가장 즐거워했고, 또 질리지도 않고 수많은 계절 동안 행해온 것임을 알게 되었다.

사람, 그리고 그의 삶은 퇴적의 형태로 진행된다. 처음엔 작은 알갱이 하나에서, 그 알갱이가 끌어당기는 것들이 차츰 붙고 쌓이며 형태를 만들어 가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그 알갱이란 우연이건 혹은 필연이건, 그 사람 속에서 어떠한 색을 만들어 낸다. 제각각 다른, 그리고 물들어있는 색들을 유심히 살펴본다면 분명 각자의 알갱이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나는 무언가를 보고, 그것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이 좋다. 내 색은 그런 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