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기 연습 #5



  1. 고작 며칠을 쉬었던 것만으로 손이 잘 움직이지 않는다. 머리에서 손까지의 거리는 멀고도 멀다.
  2. 세 편의 일기를 읽으며 그런 생각을 했다. 예쁜 얼굴은 왜 예쁘고, 못생긴 얼굴은 왜 못생겨 보이는가. 상업사진가 시절 나는 천육백 퍼센트로 확대한 눈동자에 캐치 라이트를 일일이 그려넣다가 새삼 깨달은 적이 있다. 아저씨건 아가씨건 사람들 눈은 다 비슷하게 생겼구나. 사실 코도 그렇고, 입술도 마찬가지다. 확대해 놓으면 다 비슷하게 보인다. 물론 다르다. 나는 구별할 수 있다. 하지만 미묘한 차이일 뿐이다.
  3. 생물학은 생명체를 분자-세포-조직-기관-개체로 구분한다. 개체의 아름다움에는 현격한 차이가 있지만 기관, 즉 여러 눈들이 지닌 아름다움의 격차는 그만큼 크지 않다. 기관을 구성하는 살이라는 조직 수준까지 내려가면 거의 똑같을 것이다. 약간의 촉감과 매끄러움 정도일까. 세포는 누구의 것이든 다 똑같이 생겼겠지. 분자는 말할 것도 없다. 완벽히 동일하다.
  4. 그렇다면 개체의 아름다움은 어디서 오는가. 조화인가, 그러나 예쁜 이들은 숨소리만 들어도 예쁘다. 속눈썹, 머리카락, 손톱 같은 것들도 예쁘게 보인다. 물론 이건 좀 우스꽝스럽다. 뽑아 놓은 눈썹이나 머리카락 같은 걸 구별할 수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5. 글의 아름다움은 어디서 오는가. 매끄럽고 단단한 문단의 구성, 유려하고 섬세한 문장, 풍부하고 적확한 단어 같은 것들에서 오는 걸까? 이삼 년 전이었다면 그렇게 대답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잘 모르겠다. 매끄럽고 유려하고 풍부하지만, 퍼석퍼석한 글들을 아주 많이 보았다.
  6. 당신의 글에는 어딘가 예쁜 구석이 있다. 단지 그 이유를 설명하는 데 내가 계속 실패하고 있을 뿐. 예쁜 건 그냥 예쁜 거야, 라고 말한 적은 몇 번 있지만 아마 그런 말은 안 믿겠지. 저것 봐, 또 우는 애 달래듯이 말한다, 하고 생각할지도. 하지만 이런 문장이나 단어는 참 예쁘잖아, 그래서 이 글은 예쁜 거야, 라는 말은 과연 성립될 수 있기나 한 것일까?

<수습기자의 일기장>을 보고 조금 놀란 건 단어들 때문이야. 한자어가 너무 많아서. 한 문장에 이렇게 많은 한자어가 들어가는 경우가 학술서에도 그리 많지는 않아. <옥상 위의 사람들>에도 간혹 무겁고 무거운 한자어들이 툭툭 튀어나와서 내심 고쳐놓을까 했는데, 고치니까 예전의 무게가 사라지는 것 같아서 그대로 두었지.

한 세대 위의 편집자들은 토박이말 사용에 대해 격렬히 논쟁했던 적이 있어. 한자어를 최대한 토박이말로 대체해야 한다는 쪽이 있었고, 한자어 역시 한국의 문화적 자산이므로 오히려 한문을 병기하며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한다는 쪽이 있었어.

그런 논쟁을 깨끗하게 정리한 이는 고종석이야. 저널리스트이자 파리 고등사회과학원에서 언어학을 전공한 학자인 그는, 누구보다도 아름답고 정확한 한국어 문장을 구사하지. 그런데 고종석의 주장은 모든 언어는 ‘감염된 언어’이며, 인위적으로 ‘순화’하는 모든 시도는 부자연스럽고 무모한 일이라는 거였어. 하지만 고종석은 한국어를 깊게 이해하고 그것의 특징을 잘 드러내는 요령에 대한 여러 편의 글을 썼지. 아직 읽지 않았다면 추천해 주고 싶은 글들이야.

나는 한자어를 최대한 사용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편이야. 토박이말에 대한 애착 같은 건 전혀 없어. 오히려 KBS우리말 바로쓰기 같은 캠페인들은 좀 숨막힌다고 생각해. 그리고 한자어가 없으면 이미 우리의 언어생활은 성립할 수가 없다는 것도 알아.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에는 한자어보다 토박이말들이 의미의 층위가 더 복잡하고, 질감이 느껴지기 때문이야. ‘익명화된’에는 ‘이름이 없어진’과 같은 질감이 없어. ‘소멸’에는 ‘사라짐’의 시각성이 없어. 한자어는 태생적으로 더 개념적이고, 더 정확하게 대상을 지시해. 그렇기 때문에 대부분의 한자어가 지닌 의미의 층위는 더 단순해. (물론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지. 예를 들어 ‘생’이라는 말은 ‘삶’이라는 말보다 더 처연하게 들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그렇다는 거야)

그런 맥락에서 나는 함부로 새로운 토박이말들을 되살리려는 이들을 오히려 경계해. ‘시나브로’, ‘웅숭깊다’, ‘톺아보다’ 처럼 억지로 되살려진 단어들에는 단 하나의 뜻밖에 없어. 이런 말들은 메마르고 퍼석퍼석하잖아.

반면 사람들이 잘 모르는 자신만의 단어들을 쓰는 건 괜찮은 일인 것 같아. ‘타불타불하다’라는 단어는 훌륭해. 뜻을 모르지만 대충 짐작할 수 있어. 그렇기 때문에 의미의 폭이 넓어져. 신형철은 ‘버성기다’라는 말을 즐겨 썼었지. 하지만 이제는 사용하지 않아. 자주 사용하다 보니 의미가 고정되고, 오히려 단물이 다 빠진 단어처럼 느껴지는 걸 거야.

나는 네 문장들을 몇 개 들어내서 고쳐 보려다가 계속 실패했어.

뇌과학자 김대식은 감각의 해상도보다 언어의 해상도가 더 낮다는 말을 했어. 정말 그럴 거야. 아무리 미문을 써도 언어는 투박해. 감각의 해상도를 따라가지 못해. 어쩌면 우리는 글을 쓰는 것을 통해 감각이나 마음을 이해할 수 있는 어떤 것으로 바꾸려고 하는 걸지도 몰라. 뉴스를 통과한 죽음이 이해할 만한 것이 되듯이.

나는 네 글에서 느끼는 걸 온전히 다 글로 표현하지 못하고 있어. 문장력에는 나름 자신이 있었지만, 감각의 해상도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한 것 같네. 하지만 아직은 포기할 생각은 없어.

난자당하다, 구더기와 더불어 썩어간다, 권력을 휘두르다, 모진 흉기다, 얼굴 가죽을 긁는다, 살인미수로 고소한다,

이런 흉폭한 단어를 쓰는 아가씨라니, 문장과 문장 사이의 텅 빈 공간들, 산처럼 쌓인 투박한 한자어, 지독히 무겁고, 그러나 서늘한 온도의 글. 자세히 보지 않으면 발견하기 어려운, 아름다움에 대한 미세한 감각.

대체 너는, 어떻게 된 아이인 거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