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1–3
남은 선택지는 둘이다. 정신에 육체를 맞추어 당장 죽이든가. 육체에 정신을 맞추어 어떻게든 내리누르고 살아가든가. 하나를 택해야 하고 지금 이 글을 쓰기도 읽기도 하는 나는 후자다. 적어도 아직까지는 이 싸움에서 매번 후자가 이긴다.
그렇게 육체에 의해 내리눌리고 찌부러지고 짓이겨진 정신이 갈 곳을 잃고 하나 둘 터져나오기 시작하는 게 지금의 병이고 증상이고 반응이다. 살만큼만 산다면 이러한 귀찮은 과정은 없을 거다. 유전자 전달에 필요한 딱 그만큼의 생만 주어졌다면 이런 데 쓸 여유 따윈 없이 그야말로 정신 없이 먹고 마시고 씨를 뿌리기에 급급했을 것이다.
말하자면 이 병에 걸린 인간은 이 병에 걸린 최초의 그 순간이 바로 육체의 한계 육체의 수명 육체의 기한이었던 거다. 이미 그때 죽어버린 몸을 어떻게든 질질 끌고서 한 걸음 한 걸음 여기까지 지금까지 이 순간까지 걸어온 것이다. 다시 한 번 산 송장.
하지만 안타깝게도 내 경우의 그 최초의 순간을 기억하진 못한다. 이런 것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시작을 잘 기억하지 못한다. 기억력 자체의 부족과 시작에 대한 관심 그것 역시 부족하기 때문이다. 어렴풋이 느끼기로는 상당히 오래 전이고 상당히 어린 나이였고 또 상당히 나쁘지 않던 상황이었다는 것 정도다. 꼬마이던 내가 낮잠을 자고 일어난 뒤의 일이다. 그때 처음으로 이런 생각을 했다. 이게 다 뭐지. 이게 다 뭐라고.
굳이 허무라는 단어까지 들먹이고 싶지 않지만 그런 류의 기분이 든 것만큼은 사실이다. 그야말로 이게 다 뭐냐 이게 대체 무슨 짓이냐 이래서 남는 게 뭐냐는 생각을 이불 속에 두 다리를 넣고 앉은 자세로 한참 했다. 너무도 당연하게 당시 난 답을 찾지 못했고 여전히 적어내지 못하고 있다. 이게 다 뭐냐. 대체 무슨 짓이냐. 뭐가 남냐.
물론 답까진 아니어도 풀이 과정 정도는 있다. 열심히는 아니지만 때때로 이런 질문을 다시금 곱씹으며 시간을 보내곤 했던 결과기도 하다. 하나의 답안 후보는 바로 합리화다. 인생이라 불리는 개념은 합리화에 지나지 않는다. 사람의 생 사 그 둘 사이의 의미는 다름 아닌 합리화에 의해 억지로 억지로 짜맞춰진 그림이다.
인간을 포함한 생명의 전제 조건은 이미 밝혔듯 사다. 죽음이다. 죽음만이 생을 가능케 한다. 죽지 않는 생이란 생이 아니다. 달리 말해 모든 태어난 것은 죽음을 향해 전속력으로 달려간다. 하지만 그 사실을 어떻게든 인식하지 않고 참아내기 위해 우리
인간은 생이란 개념을 발명했다. 훌륭한 역발상이 아닌가. 물이 반 밖에 물이 반이나 뭐 이런 논리인 모양인지 뭔지 몰라도 아무튼 인간은 사를 뒤집어 생을 받아들였다.
그렇게 장례식보다 더 자주 생일을 축하하고 죽음에 도착하기까지 걸린 시간을 수명이란 개념으로 바꾸었다. 그리고 거기에 의미 부여를 하기 시작했다. 생은 축복과 행운이며 그러니 마땅히 감사하는 게 당연하다는 개념을 도입하여 그야말로 온 마음을 다해 믿어대기 시작했다. 여기에서의 모순은 인간에게만 적용되는 지극히 인간중심적 합리화라는 거다. 생이 축복이고 행운이고 마땅히 감사해야 한다면 닭의 생 돼지의 생 소의 생 해충의 생 그 숱한 바이러스의 생은 어쩔 것인가. 그들은 왜 그들의 생을 축복 행운 감사로 여기면 안 되는 건가. 그러면 그럴수록 인간의 생이 불행해지기 때문인가.
이처럼 생이 합리화라는 첫 번째 후보 답안은 인간을 제외한 생명체들의 반발이 가능해지는 순간 부서지고 말 것이다. 그들도 그들 나름의 합리화를 시작할 것이고 그 결과 인간의 축복과 소의 축복과 각종 바이러스의 축복이 충돌하여 생은 전쟁이다라는 결론에 도달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 두 번째 가능한 답안은 전쟁이다.
지극히 다윈적인 관점이라 오해하기 쉬운 이 단어는 사실 다윈의 적자생존과는 상당히 떨어진 개념이다. 적자생존과 진화의 핵심은 앞서 밝혔듯 죽음이다. 적응하는 개체가 사는 것보다 그 나머지 개체들이 죽는 것이 진화의 비밀이자 레시피다. 진화를 이루는 수식이 나머지가 없이 딱 떨어진다면 이 지구는 다시 비생명의 상태로 돌아갈 것이다. 진화는 나머지의 반복이고 축적이고 나머지에 대한 나눗셈의 반복일 뿐이다.
전쟁은 아니다. 나눗셈이 아니다. 철저히 뺄셈이다. 둘이 만나면 하나가 남는다. 이게 전쟁의 공식이다. 생의 공식이기도 하다. 자연이라는 한정된 자원을 두고 벌이는 뺄셈의 현장이 생이다. 이 관점에서 보면 우리를 포함한 모든 생명은 이미 각자의 몫을 쥐고 태어난다. 도박으로 치면 패다. 그리고 그 패를 하나씩 하나씩 내밀어 이기면 하나 더 갖고 지면 하나를 잃는 식이다. 패를 다 잃으면 시간은 끝이고 언젠가는 그렇게 된다.
이유는 간단하다. 나보다 뒤에 게임장에 들어선 인간과 생명들이 쥔 패가 보다 더 많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만큼 그들의 패에 적힌 숫자가 내 패의 것보다 클 확률은 크다. 그러니 점점 더 지고 점점 더 잃고 결국 완전히 꼬라박고 집으로 간다.
생은 가진 것을 두고 벌이는 전쟁이다. 그리고 언젠가는 누구든 질 수밖에 없다.
여기서 패는 실제로 지닌 물리적 자원일 수도 점유하고 있는 공간 자원일 수도 또 누구에게나 공평하다고 소위 일컬어지는 시간 자원일 수도 있다. 각자 지닌 이러한 패를 두고 인간은 뺏고 뺏긴다. 이것은 적응의 문제까지 갈 것도 없이 그저 도박판에 지나지 않는다. 가진 게 더 크면 무조건 이기는 그야말로 간단한 산수의 싸움이다.
그리고 지금 여기의 인간은 상당히 여기에 근접해 있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인간은 수에 열광한다. 적응과 비적응과 생존과 비생존과 번식과 비번식에 아무 상관이 없는 순간에도 인간은 큰 수에 목을 맨다. 이걸 보면 생이 더 큰 것을 확보하기 위한 전쟁이라는 데는 이견이 없는 게 당연해 보인다. 정말 그런가? 정말? 아닐 거다.
이번에도 역시나 반발의 깃발은 인간이 아닌 쪽에서 들어올려진다. 단적인 예로 바이러스만 들자. 바이러스와 인간의 생을 나란히 비교했을 때 눈에 들어오는 결정적인 차이는 무게와 크기와 규모와 그 복잡성이다. 인간은 지나치게 무겁고 크고 규모를 못 키워 안달이고 복잡하면 복잡할수록 신이 나는 종이다. 바이러스는 정확히 반대다.
그들은 가능한 줄이고 줄이고 또 줄인다. 이유는 하나. 복제에 드는 자원을 줄여 그에 따른 복제의 가능성을 늘리기 위해서다. 인간은 가급적 복제를 미루는 쪽을 향해 가고 있다고 봐도 좋고 바이러스는 그런 인간의 등에 올라타 가급적 복제를 가속한다.
바이러스의 생에 있어 전쟁이 있다면 그건 뺏는 전쟁이라 할 수 없다. 그들에겐 몸에 뭔가를 더 지니는 것이 환영할만한 일이 아니다. 오히려 지닌 것을 버리고 도망을 치면 칠수록 상대에게 맡기고 털어버리고 다른 곳으로 거주지를 옮기는 횟수가 잦으면 잦을수록 이기는 좀 이상한 전쟁이다. 버리는 전쟁이고 뺏기는 전쟁이고 지는 전쟁이다.
즉 생이 전쟁이라는 표현은 같을지언정 그 속에 담긴 의미는 인간과 딱 반대다.
이렇게 상반된 두 가지 의미를 동시에 품는 단어는 정답이 될 수 없다. 동그라미 그리고 엑스를 동시에 표현할 수 있는 기호를 발명하여 제아무리 답지에 적어낸다한들 점수를 얻을 순 없다. 하나를 택해야 한다. 그리고 하나를 택하는 순간 절반의 답이다.
생은 전쟁이라는 한 단어로 정리하기엔 좀 지저분하다는 게 일단의 결론이다.
세 번째로 가능한 답안은 바로 위에서 여러 번 언급한 복제다. 이 개념이라면 위 두 가지 답을 엮는 일도 가능하다. 생은 복제를 위한 준비 과정이자 실행 과정이란 말이 맞다면 그 과정을 고통 없이 고민 없이 그야말로 맹목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필요한 게 합리화고 또 그 일에 누군가는 성공하고 누군가는 실패하는 것을 두고 전쟁이란 말로 담아낼 수도 있을 것이다. 인간이 더하고 더하고 더하며 복제를 해내고 바이러스가 빼고 빼고 뺴며 복제를 해내는 것의 공통점은 결국 그 두 활동의 종착역이다. 복제.
지극히 인간적이고 고상한 단어로 표현하자면 번식이다. 좀 더 인간성을 더하면 내 새끼를 낳아 기르는 행위 말이다. 매미를 떠올리면 매우 간단히 이해 가능한 답이다. 매미는 생의 대부분을 번식을 위해 할애하고 번식 후엔 미련 없이 죽는다. 우수수수수. 떨어져버린다. 그리고 이 과정을 수 없이 많은 세대에 걸쳐 반복한다. 낳기 위해 산다.
인간의 경우 이미 말했듯 낳고 난 뒤의 결정을 번복한 경우다. 새끼를 기른다는 명목 하에 짧게는 몇 년 길게는 수십 년을 더 살아보자고 합리화를 한다. 심지어 그런 합리화가 더는 통하지 않을 순간에도 인간은 살고 살고 또 산다. 다른 합리화를 통해.
복제의 렌즈로 인간을 들여다보면 이만큼 낭비가 심한 종도 없을 것이다. 이런 낭비의 정도는 차차 심해지고 있는 실정이기도 하다. 번식 그 자체에 거부를 드러내는 개체들도 속속 등장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복제의 눈으로만 보면 이것은 철저한 위반이고 명령불복종이고 오류다. 인간은 복제라는 프로그램의 버그다.
반대의 상황을 가정한다면 이해는 더 쉬워진다. 인간이 그야말로 그 어떤 번뇌 없이 복제에만 충실히 온 생을 바친다고 치자. 그러면 온 인간은 신체의 능력에 맞추어 생식 능력이 생기는 시기까지 온 힘을 다해 먹이를 먹고 가능한 빨리 씨를 뿌리고 낳고 최소한의 생존이 가능한 정도까지 길러낸 뒤에 죽어줄 것이다. 맞다. 죽어주는 것이.
이러한 시기를 결정하는 데는 저울이 필요하다. 부모라는 대체자에 의해 구해진 자원과 새끼라는 당사자가 손수 구한 자원의 크기를 비교하여 후자가 커지는 순간이다. 물론 가능하다면 온 가족이 총동원되어 자원을 구하는 편이 낫고 맞고 그럴 거다.
허나 자원을 구하는 일은 간단하지 않다. 웬만한 경우 생이라 불리는 시간 단위 즉 하루의 전부를 할애하거나 대부분을 할애해도 넉넉하게 얻을 수 없는 게 자원이다.
그 결과 분업이 등장한다. 한 가정 내에 일부는 자원을 구하고 일부는 새끼를 기른다.
그리고 무엇보다 생을 유지하는 데에는 그 자체로 자원이 소요된다. 복제까지 도달하든 도달하지 못하든 그 어떤 생이라도 잠시 잠깐 이곳에 머물기 위해서는 어떤 형태로든 자원이 필요하다. 즉 두 번째 저울의 등장이다. 한 개체가 지금 여기 머무는 데 소요되는 자원과 그 개체로 인해 벌어들일 수 있는 자원의 비교다.
아마도 매미의 경우 이 저울의 균형추를 보고 미련 없이 결정을 내린 게 아닐까. 그렇게 복제의 임무까지만 수행한 개체들이 빈 틈을 만들어주면 거기에 다음의 복제를 위한 선수들이 입장하여 같은 시간을 견디고 번식을 행하고 죽음을 감행하는 것이다.
생이 복제를 위해 설계된 프로그램이라는 이 세 번째 후보지를 가만히 본다면 한 가지 의문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그게 뭐? 복제하면 뭐? 그러면 뭐 달라져?
그렇다. 이미 우리가 알다시피 제아무리 부모의 유전자를 고스란히 반씩 받고 심지어 외형적 특징까지 하나도 빠짐없이 쏙쏙 입력시킨 새끼라 해도 적어도 우리의 눈에는 별개의 개체다. 무엇보다 지금 이 글을 읽고 쓰는 나 역시 부모와 의식은 커녕 그 어떤 신체도 무엇도 공유하고 있지 못하다. 그리고 결정적인 자원 할애와 분배와 경쟁의 순간이 온다면 그 누구라도 부모 혹은 새끼보다는 지 몫을 우선할 것이다.
말하자면 복제라는 개념을 들먹이기 위해선 개체 단위보다 큰 가상의 개념을 먼저 언급하고 인정하고 믿어야만 한다는 거다. 다윈과 당시의 상식에 따르면 종이다.
인간이라는 종 자체의 복제를 위해서는 이런 개체의 무관심을 극복해야만 한다. 는 주장을 마침내 하는 것이다. 그래도 의문은 남는다. 여전한 의문이다. 인간이라는 종 그게 마구 복제를 해서 그야말로 온 지구를 덮어버린다고 치자. 그래서 뭐? 어쩌라고?
인간 개체에서 인간 종이란 말만 바뀌었을 뿐 의문은 풀리지 않는다. 대체 뭐가 좋은가. 대체 뭐가 남는가. 대체 무슨 이득이 있길래 그런 일에 시간과 공간을 들이나.
이제 네 번째 답이 나올 순간이다. 무. 무다. 없다. 정답 없음이다. 생의 의미와 이러한 생으로 인해 남는 나머지에 대한 물음에 그딴 건 애초에 없고 그러니 묻지 마라. 는 주장이다. 꾸중이다. 혼꾸녕이다. 합리화고 전쟁이고 복제고 뭐고 다 쓸 데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