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1–5
헛소리를 늘어놓은 벌을 받는 모양이다. 감기에 걸렸다. 욕을 하고 싶지만 참아 본다. 감기 역시 마찬가지다. 걸리기 전에는 이런 저런 예방 비스무리한 것을 해볼 수도 있지만 일단 걸리고 나면 참는 외에는 길이 없다. 참고 참고 또 참으며 기다린다.
이 몸의 승리의 순간을. 이 몸 안에 힘겹게 지금도 생과 사를 걸고 다투고 있을 면역 체계의 전사들의 승전보를 기다리는 거다. 그리고 그런 전투의 흔적으로 고열과 기침과 가래와 코막힘 따위가 따라오는 거다. 그것 역시 그저 기다리면 그만이다.
지는 쪽은 죽는 것이고 이기는 쪽이 나를 갖는다. 나라는 한 집합체의 영토 위에 뿌리를 내리고 한동안 살아간다. 그러다 또 언제 어떻게 누구에 의해 침략을 받을지는 모른다. 그렇게 한 생이라는 시간 동안 나라는 영토를 둔 전쟁이 시시각각 벌어진다.
어찌 보면 재미있지 않은가. 심각하게 말하자면 나라는 한 개체의 생과 사까지 결정지을 수 있는 싸움에 정작 나라는 개체의 의지와 노력과 방법은 먹혀들지 않으니 말이다. 어찌 보면 생의 시작에서 그랬듯 대부분의 생의 끝에도 우리는 선택지를 쥐지 못하는 것 같다. 스스로 언제 어떻게 죽을지 결정하는 인간은 오로지 자살자 뿐이다.
이 순간 깨닫는다. 자살이야말로 가장 주체적이고 독립적이며 어떻게 보면 이런 운명이자 굴레자 저주와도 같은 생에 그야말로 직격탄을 날리는 하나의 대포라는 것을.
주워들은 바에 의하면 실제로 이런 생각으로 미련 없이 세상을 등진 예술가라는 인간들도 있다고 한다. 하지만 난 아니다. 나의 경우는 생각의 방향이 좀 다르다. 생에 반발심이 든다고 해서 그 시작을 내가 결정하지 못하고 끝 역시 그렇지 못할 확률이 크다는 이유로 그걸 지금 당장 끝내는 것만이 반항의 방식이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일종의 실험자의 입장에서 이 생을 살아보는 것도 하나의 답안이 되지 않겠나.
말하자면 자살은 답안지를 당장 펼쳐보는 승질 급한 짓 정도로 보인다는 거다. 그리고 그 맞은편에 피실험자로서의 인간이 있다. 다른 누군가의 의지에 의해 태어나 살아지고 마침내 죽게 되는 대부분의 인간들 아니 우리들 말이다. 그 사이 어딘가에 실험자는 자리를 잡을 수 있을 거다. 물론 실험 대상은 자기다. 자기 아닌 다른 대상에 이런 류의 실험을 감행했다간 실험이고 뭐고 당장 감옥에 들어갈 것이니 자기 뿐이다.
어쨌든 그렇게 살아보자는 태도로 사는 인간에게 생은 좀 흥미로워질 것이다. 지금과 같은 바이러스와의 만남 때에도 왜 하필 나야 혹은 왜 하루라도 빨리 안 꺼지는 거야 라고 불평을 하는 것보다는 말없이 이 몸의 반응과 변화를 관찰 혹은 감지하며 매 순간을 살아보는 거다. 재미있지 않은가.
않다. 하나도 재미 없다. 븅신아. 아파 죽겠어 봐라. 지금 덜 아파서 그런 거다. 진짜 아파 죽겠는 인간이 그딴 소리를 할 수나 있겠냐. 실험은 개뿔이 실험이냐. 예상 답안을 백날 적어보고 생각해보고 물고 빨고 한들 죽음은 피할 수 없고 자살을 빼고는 그 결정마저 너의 뜻과는 전혀 달리 진행될 게 뻔하다. 이게 실험이냐. 통제 하나 없이 실험은 무슨 실험이냐. 관두자. 아프니까 괜히 헛소리를 번복하고 싶어진 거다.
헛소리 때문에 아프게 됐다는 생각이 들어 다시 그 헛소리에 반하는 헛소리를 하면 덜 아프게 되지 않을까 하는 그야말로 미신적인 생각 때문이다. 이런 식이다.
나라는 인간은 누구의 눈에도 뻔하디 뻔한 인과관계 사이에 쓸데없는 것들을 자꾸만 집어넣는다. 그런 뒤에 마치 제사라도 지내는 것처럼 하염없이 기다린다. 내가 이런 이런 것들을 상에 올리고 이렇게도 많이 빌고 또 빌었으니 어서 원하는 것을 내놔.
이런 태도고 이런 식이고 이런 믿음이다. 어쩌다 이런 버릇이 들었는지는 기억 나지 않지만 어쨌든 이게 의외의 곳에서 정확하게는 그러지 말아야 하는 곳에서 불쑥 나타나면 꽤 곤란해진다. 예를 들면 일 같은 거 말이다. 일이란 돈을 받고 하는 짓이고 돈을 받고 하는 짓이란 돈을 받아야 할 마땅한 이유를 이쪽에서 건네주면 상대는 그에 맞는 크기의 돈을 돌려주는 것을 전제로 한다. 즉 돈을 받을 만한 객관적인 결과물을 보여줘야만 한다. 그 일을 하느라 보낸 시간이 됐든 그로 인한 결과가 됐든 보여달라.
이게 돈을 주는 쪽의 주장이고 입장이고 태도다. 헌데 나 같은 인간은 여기에 꼴 같지도 않은 걸 집어넣는다. 노력 말이다. 같은 시간을 일했어도 난 좀 더 노력이란 걸 했으니 그걸 알아봐 달라고 대놓고는 아니더라도 알게 모르게 냄새를 풍겨대는 거다.
상대 입장에선 뭐 이런 새끼가 다 있어 싶을 거다. 수치로 환산될 수 없고 딱히 결과에 차이가 있지도 않은 어쩌면 결과를 일으키는 데 방해가 되었을지도 모를 노력 따위에 인정을 해주고 값을 더 쳐달라니 그야말로 지금 여기의 상식에 반하는 소리.
혹여 이런 억지가 먹힌다는 터무니 없는 가정을 해도 이후에 벌어질 일은 눈에 훤하다. 너도 노력 나도 노력 우리 모두 노력이라는 억지를 부리다 못해 결국에는 노력 하지 않는 인간을 찾아볼 수 없는 지경에 이를 것이다. 노력은 그만큼 실체가 없다.
그러니 다시 원점이다. 노력은 일단 기본으로 깔고 오로지 차이를 일으키는 수. 시간과 결과의 값이라는 두 개의 숫자에 의해 보상 혹은 급여를 지불한다. 지금 여기의 너무도 당연한 방식이다. 이렇게 모두 노력을 기본으로 알고 깔고 반쯤은 무시하고서 가는 마당에 노력 노력 노력이라며 칭얼대는 인간을 대체 누가 상대할 수 있겠나.
물론 노력의 결과를 눈에 볼 수도 손으로 만질 수도 없다고 해서 노력이라는 게 아예 있지도 않다는 말은 아니다. 우리의 대부분 감각으로 탐지 가능하듯 노력이란 건 분명히 실행가능한 일이다. 노력을 하고 하지 않고는 분명 몸으로 느낄 수 있다.
그에 들인 시간과 그로 인한 결과가 제아무리 겉보기에 같다 해도 그에 소요된 노력까지 완벽하게 일치할 것이라는 주장을 쉽게 하긴 힘들다. 노력은 있고 이것으로 많은 일이 이루어지기까지 한다. 하지만 결과에의 영향을 분리시킬 수 없다. 즉 노력을 했을 때의 결과와 노력을 하지 않았을 때의 결과를 나란히 놓고 비교해볼 수 없단 거다.
생은 게임이 아니다. 한 번은 노력을 해서 살아보고 다음 한 번은 노력 같은 건 생각도 안 하고 마구 살아보는 일 따윈 가능하지 않다. 생의 한 시기에 노력을 하고 또 다른 시기에 노력을 놓는다 해도 둘의 비교는 마땅하지 않다. 여러 조건이 달라진 뒤의 시도기 때문이다. 실험의 관건은 통제다. 변화를 일으키고 싶은 요인을 뺀 나머지에는 그 어떤 변화도 일으켜서는 안 된다. 그렇지 않고서는 한 요인의 영향력을 다른 것들과 분리시킬 수 없다. 노력이 아직까지 검증도 인정도 그에 따른 보상도 못 받는 이유다.
이제 의문이 든다. 그래서 열심히 살라는 거야 말라는 거야. 답은 기준에 따라 달라진다. 결과만 놓고 보면 후자다. 그 누구도 당신 그리고 내가 열심히 사는지 아닌지 따위엔 관심이 없고 그에 값을 쳐줄 생각이 없으니 이쪽 역시 괜한 데 자원을 쏟아부을 필요는 없다. 결과만 생각하면 열심히 안 사는 편이 마음도 몸도 생각도 편하다.
전자를 지지하는 기준은 감각이다. 결과가 어찌 됐든 몸이 안다. 노력을 하는지 안 하는지 그것의 주체 혹은 실행체인 몸은 시시각각 파악하고 기록하고 기억을 한다.
철저히 내부적 관점이고 기준인 감각에 따르면 노력을 하지 않는 건 이 인간의 생이 언제 어떻게 끝나고 상관이 없어 보인다는 신호다. 말하자면 이런 저런 명령어를 들이밀어도 좀처럼 말을 듣지 않는 기계에는 반드시 따라 붙는 고장이라는 딱지가 이 몸 속 어딘가에 들러붙어 조만간 괴사할 위기에 처한다는 거다. 쓸수록 더 잘 쓴다.
용불용설까지 갈 것도 없다. 근육 하나만 보면 안다. 근육은 쓰면 쓸수록 몸이 그 손상된 정도를 회복하기 위해 전보다 많은 양의 단백질을 채워넣어 새 근육을 키워 낸다. 그리고 이런 손상을 가하는 짓거리 즉 노력을 그만두는 날에는 몸의 노력도 역시 끊긴다. 있던 근육을 뽑아내고 단백질을 채워넣지 않는다. 필요 없는 곳에 자원을 넣지 않는 너무도 당연한 이치에 따른 행동이고 결과다. 이렇게 몸 속 누군가는 안다.
이 인간이 애를 쓰는지 안 쓰는지 대충 사는지 그래도 좀 살아볼 마음이 있는지 시시각각 탐지하고 결과값을 지켜보고 그들의 처신을 결정한다. 말하자면 건강이다.
이것은 비단 근육과 같은 물질적인 부분에만 한정되는 소리가 아니다. 마음과 정신이라 불리는 몸의 다른 부분의 활동과 반응 역시 마찬가지다. 이것 역시 쓰지 않고 방치해두면 마구 녹이 슬고 안쪽에서도 더 이상 자원을 투자하지 않는다. 단적인 예로 뇌가 있지 않은가. 기억이라는 체계의 핵심은 반복이다. 반복해 꺼내지지 않는 기억이 향할 곳은 폐기장 뿐이다. 뇌는 이 인간이 한 기억을 어마나 자주 열어보냐에 따라 그 기억의 중요도와 우선순위를 판단하고 순위표를 매 순간 고친다. 기억할수록 기억한다.
이런 예들을 떠올리면 노력할 이유는 충분하다. 굳이 외부의 보상을 기대할 수 없어도 내부적으로 꽤 괜찮은 수익을 올릴 수 있는 투자기 때문이다. 노력하는 당사자 적어도 그 한 명에게만큼은 인정을 받을 수 있는 나름대로 괜찮은 도박이기도 하다.
다른 예를 떠올려 보자. 사랑 같은 거 말이다. 사랑 역시 도박이다. 좀 더 직접적 표현을 들자면 구애 보다 솔직한 심정을 드러내자면 번식과 복제를 향한 시도 말이다.
이것만큼 도박성이 짙은 짓도 없다. 노력이 통하지 않는 일도 없다. 이런 구애를 받는 상대의 입장에선 이쪽이 노력을 하는지 안 하는지 전혀 그야말로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 물론 태도를 본답시고 이런 저런 허튼 짓을 시켜보는 인간도 없지는 않으나 그 짓거리를 충실히 이행했다고 해서 결과로 번식과 복제의 성공을 돌려주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숱한 수컷과 암컷들은 서로를 향해 노력이란 걸 한다. 일 따위엔 어떤 노력도 쏟을 생각이 없는 인간이라도 구애 활동에 있어서만큼은 나름의 최선을 다한다.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그래도 한 가지를 꼽으라면 다른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이미 가진 패 안에서 최대치의 조합을 끌어내는 게 노력이라면 그 노력을 하는 편이 아무렇게나 손에 잡히는 대로 내는 쪽보다는 승률이 높을 것이라는 걸 은연 중에 알아서가 아닐까. 그리고 이런 노력이라는 일이 필요한 건 먹고 사는 일보다는 복제를 위한 일 즉 짝짓기가 아닐까라는 나름의 감을 잡은 것은 아닐까. 모를 일이다.
적어도 난 이 부류가 아니니까. 앞서 밝혔듯 나는 구애와 번식과 복제에 노력을 들이는 게 헛된 짓이라고 보는 쪽이다. 그럴 시간이 있으면 몸을 쓰고 머리를 쓰는 데 시간과 자원을 투자하는 편이 보다 정직한 결과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이 노력에는 상대라는 변수가 없지 않은가. 내가 백날 노력을 한 결과가 싫은데로 돌아올 리가 없지는 않은가. 말하자면 절대평가와 상대평가. 짝짓기 즉 성선택은 상대평가다.
아담과 이브의 시절에는 아담도 이브도 구애 따위에 노력을 들이지 않았을 게 분명하다. 제아무리 노력을 해도 얻을 것은 상대 말고는 없지 않은가. 그러니 그 시간 동안 배나 채우고 입이나 즐겁게 하자고 선악과나 따먹고 다닌 것이겠지. 헌데 이제는 그런 호사를 누릴 처지가 아니다. 아담이 수 억쯤 되고 이브 역시 그와 비슷하게 있다.
선악과나 따먹고 배나 채우고 쩝쩝거리고 돌아다니는 아담에게 대부분 이브는 눈길조차 주지 않고 이는 반대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가진 선악과의 대부분을 상대에게 바칠 정도로 사랑을 얻는 일에 노력을 하는 아담만이 이브만이 그나마 눈길 한 번 얻을 수 있는 게 당연하다. 내가 안 해도 다른 아담 혹은 이브는 그런 짓을 할 거기 때문이다.
상대평가. 이게 정말 무서운 거다. 지금 여기 인간들의 생 대부분을 짐어삼킨 게 바로 이 상대라는 개념이다. 상대가 없었다면 말하자면 여전히 아담과 이브의 시대로만 머물렀다면 우리는 대부분 여가라는 걸 그야말로 생의 한계까지 끌어올려 누렸을 거다. 허나 상대가 나타난 순간 더 이상 그럴 수 없다. 이기고 지는 것만이 중요해졌고 정말로 중요하다. 이기고 지는 것 말고는 남는 게 없다. 이기면 짝을 구하고 지면 그냥 뒤진다.
그러니 노력이라도 붙들고 늘어지는 수밖에. 설사 결과가 없어도 그럴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