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니Rennie

내가 그녀를 만나게 된 것은, 그러니까, 순전히 우연이었다. 사실 그녀와 만나서 이야기한 적도 단 한 번밖에 없으므로, 이렇게 자리를 잡고 앉아 이야기를 시작한다고 해도 막상 할 게 별로 없지만, 그래도 일단 부탁을 받은 이상 계속 밀고 나갈 수밖에 없다. 자, 그럼 내가 어떻게 그녀를 만나게 됐는지, 그 이야기부터 하자.


당시 나는 막 레비아탄 17-b 행성에서 돌아온 참이었다. 그래서 굉장히 피곤하고, 과중한 업무에 지친 몸으로 지구에 있는 나의 아늑한 집에서 쉬고 있었다. 아늑하다고 해도 나 혼자 사는 집이 아니었으므로, 그다지 편히 쉬진 못했다. 그래도 길바닥에 범우주용 간이 텐트를 쳐 놓고 들어가서 사는 것보단 나았기에, 불평하지 않고 먹고 자는 생활만을 계속하는 지루한 날을 보냈다. 레비아탄의 시끌벅적함과 다종다양한 사람들에 비하면 지구는 3층 건물에 자리잡은 지하실 창고에 비할 정도로 조용하고, 단 한 종의 인류밖에 존재하지 않았다. 전 우주를 살펴보면 지성체가 단 한 종밖에 존재하지 않는 행성은 꽤 많다. 그래서 지구가 인류만이 지배자라도 된 것처럼 돌아다니는 행성이라고 하더라도, 교양 있는 우주인이라면 놀라지 않을 것이다. 나야 지구인이기 때문에 당연히 지구를 모성이라고 생각하지만 말이다.

그래서 조용하고 지루한 생활을 이어 나가던 어느 날, 친하게 지내던 우주인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메시지의 내용은 “어, 지구로 돌아왔네. 모월 모일에 한번 만나자”가 다였다. 여전히 무뚝뚝한 친구였다. 나는 메시지를 잠시 들여다보다가, 마침 그날에 일정이 없었으므로 바로 승낙한다는 메시지를 보냈다. 우리는 다른 여타 지구인들과는 다르게 메일이나 전화 대신 다른 통신 수단을 이용한다. 르귄이 처음 발명한 앤서블이라고 생각했다면 유감이지만 틀렸다. 허공에 손을 가져다 대면 화면이 나타나는, 꽤나 진보한 문명으로부터 유래된 물건이다. 당연히 현 지구 상에 이 기술을 구현한 연구소는 없다. 지구 내에서 본다면 우주인만의 특권으로 보일 수도 있다. 그러면 그렇게 생각한 사람은 지구에 있을 게 아니라 당장 우주인이 되는 게 낫겠다. 충분한 돈과 시간이 있다면 말이다.

메시지를 보내고 레비아탄에서 지구로 돌아오는 동안 쌓인 잡다한 메시지를 확인하고 나니, 시간은 벌써 저녁이었다. 아뿔싸. 지구의 하루는 24시간이라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이런 멍청이, 하고 가볍게 자책한 뒤에 나는 침대에 드러누워 왜 지구에는 저녁을 만들어 방까지 나르는 로봇이 없을까, 아광속 우주선도 만드는 마당에 — 물론 핵심기술이야 선심 쓰듯 제공해 주는 우주인들에게서 얻는 거지만 — 따위의 생각을 했다. 아니, 어쩌면 일부 선진국에서는 집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을 처리할 수 있는 — 심지어 택배도 받아주고, 이메일에 답장할 수 있는 — 가사도우미 로봇이 시험 가동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지구 안에서 싼 집을 구하다 보니 하필이면 삶의 질을 나타내는 수치가 현저히 낮거나 높은 그저 그런 나라에 자리를 잡게 되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좀 더 돈을 쓸걸, 20년 전의 나를 원망해 봤자 현재가 바뀌는 것도 아니다. 푸욱 한숨을 쉰 나는 주린 배를 움켜쥐고 부엌으로 향했다.

약속 당일. 친우로부터 전달받은 장소로 나가 보니 친우는 당연하지만 지구인의 모습을 하고 손에 커다란 바게트를 든 채로 벤치에 앉아 있었다.

“여기서 뭐 해? 이유가 있어서 날 부른 거겠지?”

“당연하지. 잠깐 앉아봐. 갈 곳이 있으니까.”

갑자기 그런 말을 들어도 말이지…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어쨌든 친우는 남을 꼬드겨 사기 칠 만한 인간은 아니었으므로 일단 그의 말을 믿기로 했다. 친우는 바게트를 들고 옆에 놔둔 꾸러미에서 양상추와 토마토, 치즈, 살라미를 꺼내더니 순식간에 샌드위치 두 개를 완성해서 하나를 나에게 주었다. 뭔데? 하는 표정으로 친우를 바라보자, 그는 부정교합의 아름다운 예라고 말할 수 있는 뻐드렁니를 드러내며 피식 웃더니 이렇게 대답했다.

“이제부터 갈 곳에선 안주를 안 파니까.”

그리고 그는 나에게 샌드위치를 건네고는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가 버렸다. 아무런 설명도 듣지 못했다는 사실에 당혹감과 함께 호기심을 느끼며, 윤기나는 샌드위치를 종이에 싸서 가방에 집어넣고 나는 친우의 뒤를 쫓았다.


“네가 말한 곳이 여기냐?”

“아아. 술로 따지면 상위에 드는 곳이라고. 분위기도 이 정도면 괜찮고.”

주위를 둘러보니 바에는 칵테일 하나를 시켜 놓고 바텐더와 시시껄렁한 소리를 주고받고 있는 우주인과 테이블에 둘러앉아 각자의 언어로 떠들고 있는 우주인들로 절반 정도 채워져 있었다. 아무래도 지구 출신은 나 혼자인 모양이었다.

“네 취향이 독특한 줄은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여긴 뭐, 지구에 떨어진 우주인들을 위한 안식처 같은 곳이라고 말하고 싶은 거야? 지금 내 귀에 들려오는 언어만 해도 벌써 셋이다 셋.”

“안식처라면 안식처지. 여기서는 전 지구에서 이곳에서만 유일하게 취급하는 특산품이 많거든. 고향을 잊지 못하는 우주인들이 즐겨 방문하지. 뭐, 가끔은 너 같은 지구인도 친우 따라 방문하기도 하지만.”

“그래, 잘 알겠군.”

우리는 일단 자리에 앉기로 했다. 자리에 앉은 다음 메뉴판을 보고 있자, 뒤에서부터 지구인의 모습으로 변장하지 않은 진짜 우주인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

“주문하시겠습니까?”

국제 공용어인 영어는 아니었지만, 은하 공용어라 다행히 응? 하는 표정을 취하지 않고 알아들었다. 친우는 아주 자연스럽게 맥주 두 병을 주문한 뒤 예의 샌드위치를 꺼내 한입 씹었다.

“지금 상황에서 샌드위치가 넘어가냐? 그리고 원래 이런 바는 음식물 반입 금지 아니야?”

친우는 뭘 새삼스레 따지냐는 표정으로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아니, 그러니까 그런 표정 짓지 말라고. 애초에 이놈 말을 들은 게 잘못이었다. 나는 지구에 살고 있는 동안만이라도 지구인의 감성을 유지하고 싶단 말이다. 너는 이해 못 하겠지만.

“그래서, 하고 싶은 얘기가 뭔데?”

나의 물음에 친우는 맛있게 샌드위치를 씹으며 잠시 생각하다가, 맥주가 나오자마자 우선 한 모금 꿀꺽꿀꺽 마신 다음에 캬! 하는 경쾌한 소리를 내고 나서 답했다.

“뭐, 특별한 건 아니고. 네가 5년 만에 지구에 왔으니까 환영차. 레비아탄은 참 지독한 곳이지. 네가 어떻게 살아서 돌아왔는지 모르겠다.”

“여기 맥주 맛있네! 그런데 이건 지구에서 만든 맥주가 아닌 것 같은데?”

“네 말대로. 이건 펠라이나 행성에서 만들어서 수입해 온 맥주야. 펠라이나 행성은 자국민들에겐 세금이 왕창 붙은 맛없는 맥주를 팔면서, 수출하는 맥주는 마시다시피 제대로 만든 걸 팔지. 겉과 속이 다르다고 해야 하나, 재밌는 족속들이야.”

말을 마치자마자 남은 맥주를 벌컥벌컥 마시는 친우였다. 거 참 맛있게도 마시고 있다. 나는 우주인 웨이터를 불러 맥주를 두 병 더 시킨 다음에, 잔을 들어 아직 거품이 남아 있는 맥주를 천천히 마시며 펠라이나 행성의 주민을 생각했다. 이렇게 맛있는 맥주를 못 마시다니, 정말이지 운도 없는 주민들이군. 다음에 행성에 갈 일이 있으면 맥주를 가져가겠다고 나는 다짐했다. 나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같이 일하고 있는 직원들을 위한 선의의 목적이다.

“레비아탄에서 있었던 일을 얘기하려면 이틀 밤을 새워야 할 테지만… 지금은 그다지 이야기할 마음이 들지 않아. 그저 느긋하게 맥주를 마시고 싶어.”

“네 마음대로. 참, 좀 이따 누가 오기로 했는데. 어때?”

“이봐, 갑자기 그런 소리를 하면 어떡해. 네가 나를 부른 이유가 이야기할 게 있어서일 거라고 생각했다고.”

“처음엔 그랬는데, 여기에 한 명 더 껴도 괜찮을 것 같다고 생각해서. 싫으면 오지 말라고 연락할게.”

“아니 됐어. 어차피 술값은 네가 낼 테니까.”

오랜만에 비열한 웃음을 지으며 나는 친우의 입을 막았다.


따각, 따각.

술을 두 병쯤 마셨을 때, 누군가 지하로 내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지하라면 바로 여기를 향하는 것일 테다. 나는 ‘올 것이 왔는가’ 하는 마음으로 문쪽을 바라보았다.

지구인이었다.

갑자기 술이 깨는 것을 느끼며, 나는 친우를 향해 ‘지구인이라면 말을 하지!’ 하고 소곤소곤 말했다. 친우는 서프라이즈 파티를 위해서, 혹은 굳이 말할 필요를 못 느꼈다는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해 보이는 게 다였다. 떨떠름한 얼굴로 고개를 들어 보니 지구인은 바텐더에게 일행의 위치를 묻고 있었다. 마음의 준비를 하자. 어차피 나처럼 친한 우주인에게 딸려 온 지구인일 뿐이다. 아니, 혹시 지구인으로 변장한 우주인이 아닐까? 겉모습으로 보면 지구인이 맞는데, 모르겠군.

“안녕하세요.”

지구인은 보통의 인간 여성이 내는 목소리로 자리에 앉아 있는 우리에게 인사했다. 그제야 나는 가방에 넣어둔 샌드위치를 꺼내지 않았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어쩌지. 지금이라도 꺼낼까. 그러나 지구인은 내가 가방으로 손길을 옮기는 잠시의 시간도 허락하지 않았다. 나의 옆에 앉은 지구인은 내 가방 위에 핸드백을 내려놓고 대뜸 물었다.

“당신이 레비아탄에서 방금 돌아온 지구인인가요?”

“어… 그렇습니다만. 그 소식은 친우에게서 들으셨나요?”

“네. 갑자기 저를 이런 이상한 바에 불러내서 뭘 할 속셈인지 도무지 알 수 없었지만요. 당신 얘기는 그에게서 들었어요. 재밌는 사람이라고 하더군요. 그런데 겉으로 보기엔 평범한 지구인인데?”

“평범한 지구인이라니, 레비아탄까지 다녀온 지구인이 지구 상에 얼마나 된다고 그래? 소개하지. 이 친구는 레니, 지구 이름으로 인경이라고 하네. 나는 지구 이름 쪽이 더 마음에 들지만.”

친우는 지구인의 말을 정정한 뒤에 대뜸 그녀의 이름을 말했다. 레니라… 우주에서 사용하기론 그리 나쁘지 않은 이름이군. 그나저나 인경이라면 혹시 한국인인가?

“저기, 국적을 묻는 게 실례가 될지도 모르겠습니다만… 혹시 한국인이신가요?”

“맞아요. 어릴 때는 영국에서 살았지만 중학교부터는 한국에서 다녔지요. 혹시 그쪽도?”

“아, 제 국적은 공식적으론 은하 제3연방입니다. 태어나긴 지구에서 태어났습니다만, 대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연방에 취직했기 때문에.”

“대단하시군요. 대학을 졸업하고 바로 연방에 취직하는 경우는 드물지 않나요? 보통 박사 이상을 받는 걸로 알고 있는데.”

“알고 있는 바대로입니다. 저는 사정이 좀 있어서… (자연스레 웃음이 피어오르는 걸 막을 수 없었다) 연방에 취직했다고 해도 고위직은 결코 아니고, 말단 중의 말단입니다.”

특유의 웃음이 처음 만난 지구인에게도 통할지 어떨지 가늠하며 나는 내 소개를 간신히 끝마쳤다. 술만 안 마셨어도 좀 더 점잖게 답했을지도 모르는데. 지구인은 내 말을 듣고 나서 잠시 고개를 끄덕이더니 웨이터를 불러 맥주 한 병을 주문했다. 그리고 친우를 돌아보며 빨개진 그의 얼굴을 놀렸다.

“하하, 지구인으로 변장한 우주인이 술을 마시면 바로 드러나거든. 얼굴 빨개진 것 좀 봐라.”

“그렇게 놀리지 말란 말야. 나라고 얼굴이 빨개지고 싶어서 빨개지는 줄 아나. 네 얼굴이 빨개지면 똑같이 놀려주지. 각오하라고.”

“후후, 내 얼굴은 술을 아무리 마셔도 안 빨개지거든요? 홍당무씨.”

홍당무씨로 불린 친우는 졌다는 듯 두 손을 어깨 위로 들고는 테이블 위에 준비된 한 병을 따서 골골 잔에 따랐다. 술에 취한 와중에도 술 따르는 법을 잊지 않는 친구를, 나는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아, 레비아탄은 지구보다는 더 발전된 행성이네요. 저도 한번 레비아탄에 가 보고 싶어요. 그럴 기회가 있을지는 잘 모르겠지만.”

“레비아탄은 지구에서 아주 멀긴 하지만, 기회를 노려본다면 아예 갈 수 없는 곳도 아닙니다. 레니 님이 어디에 속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출장으로도 갈 수 있고 아니면 여행을 떠날 수도 있죠. 왕복 우주선값이 좀 비쌉니다만, 그거야 뭐 어떻게든 모은다고 치고…”

“정말 그랬으면 좋겠어요. 매번 화성이나 알파 센타우리까지밖에 못 가서 심심하던 차였거든요. 알파 센타우리도 재밌긴 하지만, 그래도 역시 우리 은하 밖으로 한번 나가보고 싶거든요. 여기 있다 보면 갇힌 기분이 들어요.”

친우는 이제 모자 쓴 홍당무가 되어 자급자족하며 술을 열심히 마시고 있었고, 지구인은, 아니 레니는 자신의 꿈을 열심히 나에게 설명하고 있었다. 레비아탄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해 주었더니 굉장히 고무된 모양이다. 실제로 가 보면 우주인이 많이 사는 잘 꾸며진 — 그리고 가스 대신 메탄 토양이 행성을 잠식하고 있는 — 목성 정도인데, 역시 자신이 가 보지 않은 곳에 대한 환상을 품게 되는 건 누구나 똑같은 것 같다. 나도 연방에 취직하기 전만 해도 지구에 사는 걸 답답하게 여기며 매일 행성과 알파 센타우리의 모습을 검색하며 꿈을 키워왔으니 말이다. 그런데 그녀는 이미 알파 센타우리에 갔다 와 보았다고 했다. 내가 대학생인 시절만 해도 알파 센타우리로 가는 건 극소수에게나 가능한 일이었는데… 세상이 — 정확히는 우주교통이 — 발전했음을 새삼 느꼈다.


“자. 이제 그만 일어나야겠습니다. 오늘 즐거웠습니다.”

“저도 거대한 행성 레비아탄과 외우주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들을 수 있어서 좋았어요. 제가 레비아탄에 가게 되면 꼭 사진을 보내드리도록 하죠.”

“나도 고향에 돌아가고 싶다. 지구에 처음 왔을 때만 해도 신기한 것들이 많아서 즐거웠는데 말이지. 언제부턴가 지구에 사는 게 너무 답답해졌어. 왜 주변에 우주인들이 고향에 돌아가고 싶다고 염불을 외는지도 알게 됐어.”

한편에선 레니가 즐거웠다는 표정을 짓고 있고, 다른 한편에선 친우가,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자랑스러웠던 그가 고향에 돌아가고 싶다고 늘어진 목소리로 칭얼대는 이상한 광경이 내 주위로 펼쳐지고 있었다. 레니는 맥주를 두 병이나 마셨음에도 멀쩡한 모습이었다. 아무리 마셔도 안 빨개진다는 그녀의 말이 사실이었다 보다고 생각했다. 나는 얼굴로 손을 가져다 대어 미약한 열이 오르는 것을 확인한 뒤, 술을 깰 요량으로 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이래봤자 술이 안 깬다는 걸 알면서도 말이다. 처음에 말한 대로 우리 셋이 마신 술의 계산은 친우가 했다. 레니는 자신이 마신 술은 자신이 계산하겠다고 했지만, 친우는 그럴 필요 없다고 말하며 자신의 카드를 바텐더에게 내밀었다.


친우를 한쪽 어깨에 둘러메고, 우리가 만났던 장소인 이태원이 아니라 혜화동 근처에 집이 있다는 레니를 그녀의 방으로 떠나보내고 난 뒤에야 비로소, 나는 가방 속에 박혀 있던 샌드위치에 손도 대지 않았다는 걸 떠올렸다. 샌드위치는 가방 안에서 압력을 받아 절묘하게 우주선 모양으로 눌려 있었다. 이 네모난, 마름모꼴의 빵은 방금 우주에서 돌아온 나를 환영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면서, 동시에 지구에 나의 자리가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것처럼 무언의 압박을 내게 주고 있는 것 같기도 하였다. 아마도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라면 샌드위치를 열어서 한입 베어 문 다음에, 가장자리부터 한 걸음 한 걸음 그 도도한 모양을 파괴해 나가는 것일 테지만, 지금은 벌써 자정을 넘긴 시간인 데다가 길거리를 활보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혼자서 샌드위치를 먹을 만한 분위기가 아니었다. 한숨을 쉬고 나는 집에 가서 간식으로 먹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먼 시간을 지나서 찾아온 지구의 밤거리는 현란하고 밝고, 그리고 시끌벅적했다. 막차를 타기 위해 지하철로 가는 도중에 나는 친우의 뺨을 한 대 때렸다. 그는 잠깐 정신을 차리더니 이렇게 말했다.

“여기가 어디야?”

글쎄, 이 질문에 내가 대답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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