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여, 안녕

그녀는 마법사였다, 이 세계가 아닌 내가 알지 못하는 다른 세계로부터 온 마법사였다. 마법사임에 분명했다, 그녀는. 그리고 나는 평범한 소년이자 학생이었다. 나는 그녀를 위해 말한다. 그녀는 나를 위해 말한다. 나는 그녀의 손을 잡고 말한다. “마법사여, 세상에 빛을!”

17살의 여름, 이라고 적으면 어딘가 아쉽고 그리운 느낌을 주지만, 그 당시 나는 하루라도 빨리 고등학교를 졸업하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다. 지정석인 창가 바로 옆자리에 앉아서 턱을 괴고 바깥을 멍하니 내다보고 있자면, 달리는 또래의 학생이라든가 열심히 호루라기를 불고 있는 체육선생이 보이는 운동장이 바로 앞에 드넓게 펼쳐져 있고, 그 뒤로 얇은 도로 하나를 사이에 둔 채 주택가가 자리잡고 있었다. 그렇지만 내가 다니는 학교는 저 집들에 사는 평범한 고등학생들이 오는 학교는 아니었다. 무언가 ‘특수한 목적’을 띠고 있다고는 하지만, 아무도 그 ‘목적’이 뭔지를 알지 못하는, 혹은 다른 목적을 아주 잘 알고 있는 평범하지 않은 고등학교였다. 거기서 ‘그녀’는 돋보이는 존재였다. 언제나 가운데 자리에 앉아서 책을 읽거나 아니면 앞을 멍하게 바라보고 있는 그녀의 존재감은 깊었다. 교실에서는 여자들 몇 명이 서로 무리지어 제각기 쓸모없는 화제에 대해 열심히 떠들고 있었지만, 오직 그녀만은 의자에 엉덩이를 딱 붙이고 앉아서 주위의 모든 소리를 차단하기라도 한 것처럼 가만히 정신을 집중하고 있었다. 같은 학급의 누구도 그녀에게 말을 걸지 못했다, 가장 자존감이 강하다는 반장 — 그녀는 내년에 학생회장을 노리고 있었다 — 조차도. 지금부터 할 이야기는 정말 이상할지도 모른다. 나도 이야기를 통해 누군가를 설득하리라 생각하지 않는다. 아니, 어쩌면 나는 중간에 ‘사라질’ 운명일지도 모르지만. 어느날 그녀는 갑자기 내게 다가왔다. 그녀는 손에 샐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의 번역본을 들고 있었다. 그녀는 그 책을 내게 빌려주었다.

“재밌었어. 내용은 잘 이해하지 못했지만.”

“그래? 너라면 분명 ‘재밌다’는 말을 할 줄 알고 빌려줬던 거야. 다행이네. 다른 책도 빌려줄까?”

“아니, 응, 그러고 싶다면 언제든지. 그런데 왜 하필이면 내게?”

“글쎄? 네가 책을 집중해서 읽고 있는 모습을 자주 보았으니까.”

“정말? 그랬나, 내가.”

기억을 되새겨 보면 그런 것 같기도 했다. 나는 심심할 때면 창가 바로 옆자리에 앉아서 문고본을 꺼내들고 시간을 죽였다. 수업시간에는 차마 용기 있게 그런 짓을 하지는 못했지만, 쉬는 시간이 되면 열에 여섯은 어김없이 책을 꺼내서 느긋하게 읽어 내렸다. 그렇게 일주일 정도 지나면 책 한 권을 다 읽게 된다. 그래서 나는 한 달에 책 네 권을 읽을 수 있었다. 공부에 치이는 고등학생에게는 꽤나 많은 양이었다. 그녀에 비하면 새 발의 피에 지나지 않지만.

“그랬어. 혼요미 군은 말이지, 언제나 책을 한 손에 들고 다른 손으로는 책장을 넘기며 쏟아지는 햇살을 받고 있었으니까. 내가 언제나 지켜보고 있었거든, 혼요미 군을.”

그러고 보면 내 이름이 ‘혼요미’ 였던 것 같기도 하다. 약간 이상한 기분이 들기도 하지만, 남자 이름으로는 나쁘지 않다는 생각도 들었다. 왜 남자 이름과 여자 이름을 나누는지 잘 모르겠지만. 그건 어쩌면 부모나 선생도 잘 모르지 않을까? 그때 나는 그녀의 이름을 아직 내가 모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녀에게 이름을 물어보는 것도 실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내 이름을 알고 있는데, 내가 그녀의 이름을 모른다는 게 그녀에게 있어서 얼마나 불편한 일일까. 그런 내 생각을 읽었는지, 그녀는 바로 그녀의 이름을 말했다.

“안녕. 내 이름은 제인 이스마일이라고 해. 제인이라고 불러줘.”

“응, 안녕 제인. 제인은 좋은 이름이구나. 가타가나로 “ジェイン” 이라고 쓰는 거야? 아니면 혹시 읽는 법이 따로 있는 거니?”

“아니, 제인ジェイン이라고 쓰든 젠ジェーン이라고 쓰든 그건 네 마음이야. 어차피 ‘읽는 법’은 같으니까. 그리고 나는 동북아시아에서 태어나지 않아서 한자 이름을 안 써. 미안, 혼요미 군.”

“아니 아니, 미안할 건 없으니까. 다시 한번, 책을 빌려줘서 고마워. 혹시 도서관에도 자주 들르니? 본 적은 없지만.”

“도서관은 가끔 들르긴 해. 나는 책을 사서 읽기 때문에 도서관에 갈 일이 별로 없지만. 가끔 구할 수 없는 책이 있거든. 예외적인 경우야. 혼요미 군은 도서관에 자주 들러?”

“아니… 나도 그다지 자주 들른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음. 책을 ‘좋아한다’고 해서 혹시나 하고. 그렇구나, 직접 사서 읽는구나.”

“하하, 혼요미 군은 재밌어. 좋아, 우리 친구友達가 되자. 친구가 되면 즐거울 일이 많을 거야. 같이 하교도 하고, 책도 같이 읽고, 밥도 같이 먹고… 그런 게 ‘친구’가 하는 일이 아닐까? 혼요미 군은 혹시 친구 있어?”

“응, 있기는 하지만…”

여기서 나는 그다지 유쾌하지 않은 기억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고등학교에 입학하고 나서 중학교 때 사귀던 친구를 몇 명 잃었지만, 그래도 지금까지 연락하는 친구들이 둘셋 정도는 있었다. 그러나 그들과는 자주 만나지 못했는데, 서로 멀리 떨어져 지내고 있기도 하고 다들 공부 때문에 바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그들 중에서 가장 바쁘다고 할 수 있었다. 왜냐면 조기졸업을 하기 위해 수업을 남들의 1.5배 정도로 들어야 했기 때문이다. 해서 내가 도서관에 가는 것은 주로 책을 읽기 위해서라기보다는 공부를 하기 위해서였다.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는 학생은 나 말고도 몇 명 있었지만, 책을 읽는 학생은 거의 없었다. 거기서 그녀를 본 적은 없었다.

“있긴 있어, 그런데 자주 만나지는 못해. 다들 바쁘거든.”

“헤에, 그렇구나. 나도 친구가 없어서 새 친구를 구하던 참이었거든. 마침 혼요미 군이 있어서 다행이었어. 혼요미 군도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것 같았으니까. 그게 누굴까?”

“부끄러워, 그런 말을 들으면. 딱히 그리워하는 사람은 없어. …아니, 한 명 있기는 하지만.”

“그래? 그 얘기도 듣고 싶은데, 같이 하교할 때까지 미루어 둘까? 혼요미 군은 어때? 괜찮아?”

“좋아. 여자하고 같이 하교한다고… 아니, 방금 얘기는 못 들은 걸로 해줘. 이상하네, 생각지도 못한 말이 나오니.”

“응, 뭐가? 그럼 좋아. 같이 하교하자.”

그녀는 즐거운 듯이 말하고는 다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나는 뒤에서 그녀가 의자에 앉는 모습을, 책상에서 교과서를 꺼내 펼치는 연속되는 동작을 빠짐없이 지켜보았다. 그녀는 보랏빛이 도는 긴 생머리를 하고 있었다. 오후의 햇빛이 느슨하게 비춰 들어와 머리카락은 연보라색에 가까웠다. 순간 그녀의 머리카락을 만지고 싶다는 욕망이 들었다. 하지만 그녀와의 하교를 위해 잠시 마음 속에 짓눌러 두었다. 이제 여섯 번째 수업이 시작하려 하고 있었다.

수업이 전부 끝나서 나서, 나는 그녀와 함께 교문을 지나 하교할 수 있었다. 여기에 특별한 의미는 없으리라 믿는다. 특별한 의미가 생긴다면, 분명 그것은 한때의 ‘아련한 추억’으로나 남아 먼 세월을 지나쳐 끊임없이 나를 번뇌케 할 것임에 틀림없었다. 하지만 나는 왜 지금 새삼스레 이런 ‘말’을 하고 있을까. 그녀는 내 옆에서 고개를 아주 살짝 숙이고 걷고 있었다. 어디를 보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녀가 매고 있는 얇은 빨간색 리본이 흔들리는 게 보였다. 리본은 진자처럼 주기를 띠고 좌우로 느리게 흔들렸다. 그것은 그녀의 걸음과 보조를 맞추어,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리본은 오른쪽으로 움직이고, 다시 한 걸음 내딛으면 리본은 왼쪽으로 움직였다. 가만히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자, 그녀가 갑자기 말을 걸었다. 나는 당황했다.

“뭘 그렇게 뚫어져라 보고 있는 거야, 혼요미 군? 설마 가슴을 보는 건 아니겠지, 후후.”

“아냐, 아냐. 리본을 보고 있었어. 흔들리는 게 재밌어서.”

“흔들리는 게? 헤헤, 역시 혼요미 군은 재밌어. 리본이 흔들리는 걸 가만히 바라보고 있다니. 그런 건 고등학생이라면 누구도 하지 않는다구. 다들 앞만 보고 달리느라 바쁘거든.”

“나도 바쁜 건 마찬가지야. 하지만… 지금 리본을 봐 두지 않으면 나중에는 보지 못할지도 모르니까. 뭐라고 설명하면 좋을까, 잘 모르겠어. 그런데 리본이 중요하지 않으면 어떤 게 ‘중요한’ 걸까? 봐, 리본은 옷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잖아. 그렇지 않니?”

“글쎄. 리본은 실용적인 용도는 거의 없으니까. 나비넥타이도 마찬가지고. 장식을 위해서 다는 게 아닐까?”

“아냐, 그렇지 않아. 리본은 중요해. 내 생각에는 리본은 목걸이와 같다고 생각해. 목걸이는 중요하니까, 리본도 마찬가지로 중요해. 왜 몰라주는 걸까.”

내가 한숨을 쉬자 그녀는 몸을 90도 돌려서는 내 얼굴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강하게 말했다.

“아니야! 혼요미 군의 마음은 잘 알고 있어. 누구보다도 내가. 하지만 여기엔 말로는 설명하기 힘든 어려운 부분이 있어. 어려운 지점이라고 할까, 리본에 대해서는 그래.”

“맞아, 말로 하려면 너무 어려운 것 같아. 실제로 말이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는데, 사람들은 입으로 하는 ‘말’에 너무 의지하지. 지금 내가 말하고 있는 것도 마찬가지라고 하지만.”

“그래, 혼요미 군. 이러면 어떨까? 네가 리본을 그림으로 그리는 거야. 그러면 너도 거기에 대해 조금은 더 나은 ‘전망’을 가질 수 있지 않을까? 말로만 하는 것과 그림으로 그리는 건 다르잖아? 그림은 어때, 잘 그려?”

“아니, 잘 그리는 편은 아냐. 하지만 리본 정도는 어떻게든 그릴 수 있어.”

“좋아. 그럼 내일까지 리본을 그려서 내게 보여줘. 거기서부터 시작하자.”

말을 마치자 그녀는 얼마 지나지 않아 마주한 갈림길에서 왼쪽으로 가야 한다면서 손을 흔들고 사라졌다. 나는 그녀의 연보랏빛 머리칼을 더 볼 수 없다는 사실이 못내 아쉬웠지만, 그것도 같이 그림으로 그리자는 생각을 하고 앞으로 쭉 걸어갔다. 앞으로 쭉 가다보면 내가 사는 집이 나올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생각은 정확하게 들어맞았다. 나는 내 성姓이 적힌 집을 발견할 수 있었다. 집 안에는 불이 켜져 있었다. 누군가 있는 모양이었다. 맛있는 저녁을 기대하면서 나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저녁을 ‘여느 날과 같이’ 가족과 함께 먹고 — 메뉴는 메로였다. 나는 메로를 좋아하는 편이었다. 가장 좋아하지는 않지만 — , 나의 방에 들어가서 우선 내가 한 일은 색연필과 스케치북을 꺼내는 일이었다. 스케치북을 펼쳐서 비어 있는 면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림은 다른 친구들과 비교했을 때 잘 그리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리본 정도는 바르게 그릴 수 있었다. 그녀가 매고 있던 리본이 빨간색이었기 때문에, 나는 샤프로 테두리 선을 딴 뒤에 색연필을 이용해 안을 빨강으로 채웠다. 리본을 다 그리고 나서 그녀의 작은 얼굴을 그리고, 그리고 연보랏빛 머리카락을 조심스레 그려 나가기 시작했다. 그녀의 머리카락은 올이 굵은 편이 아니라 바람에 살랑살랑 흩날리는 정도였으므로, 나는 샤프를 이용해 사각사각 소리를 내며 머리카락을 그렸다. 살랑살랑, 사각사각. 그림을 그리고 있자니 밖에서 바람에 나무가 흔들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가 그녀의 머리카락이 흩날리는 소리라고 생각하자니, 그림을 그리는 나의 손도 어느새 빨라져 있었다. 다 그리고 보라색 색연필로 ‘힘을 주지 않고’ 색을 더해갔다. 이윽고 스케치북에는 그녀의 상반신이 나타나 있었다. 나는 무척 행복했고, 행복한 마음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스케치북을 품에 안고 잤다. 그날 밤에는 아무 꿈도 꾸지 않고 편하게 잠들 수 있었다.

“혼요미 군, 그림은 다 그렸어?”

“응. 그렇게 잘 그리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봐 준다면.”

“보여줘. 사실 나 어제, 혼요미 군 생각을 했거든. 혼요미 군이 그림을 그리는 생각을 했어. 리본을 그리고 내 얼굴을 조심스레 그리던 모습을…”

나는 그녀의 말에 놀랐다. 그녀는 내가 그림을 그리는 모습을 본 것도 아닌데, 어떻게 리본을 그리고 얼굴을 그렸다는 사실을 알까. 혹시 그녀에게는 텔레파시를 감지하는 능력이라도 있는 게 아닐까? 나는 그녀 앞에서 더욱 주의할 것을 다짐했다.

“자, 여기. 원한다면 뜯어서 가져가도 좋아. 네 그림이니까.”

“고마워.”

그녀는 내 스케치북을 받아서 한 장 한 장 넘기며 자신이 그려져 있는 페이지를 찾는다. 나는 의자에 가만히 앉아서, 그녀가 자신이 그려진 장을 주의깊게 보고 있는 것을 지켜본다. 그녀는 눈동자를 한곳에 고정시키고 말이 없다. 갈수록 초조한 마음이 들어서, 나는 손가락을 나무책상에 규칙적으로 두드리며 그녀가 빨리 그림을 보고 스케치북을 내게 돌려주기를 바란다.

“잘 봤어. 혼요미 군, 이건 네가 가지고 있는 게 좋을 것 같아. 여기서 뭔가 더 ‘나올 게’ 있지 않을까? 이를테면 그 날의 공기라든가, 흘러넘치는 빛이라든가, 있잖아? 혼요미 군은 나를 잘 그렸으니까, 공기나 빛도 충분히 그려낼 수 있을 거야. 그럼 기대할게!”

곧 수업종이 울렸기 때문에 그녀는 자신의 자리 — 교실의 정가운데 — 로 돌아갔다. 나는 고개를 돌려 그녀가 의자에 앉는 모습을 바라보며 뭔가 설명하기 힘든 아쉬움을 느낀다. 그녀는 늘 그랬던 대로 교과서를 꺼내서 정확한 페이지를 펼친다. 나도 다시 고개를 원위치로 돌려서 교과서를 펼치고 페이지를 확인해 본다. 여기엔 어떤 의미가 있을까. 나도 모르고, 옆에 앉아 있는 이름 없는 여자아이도 모른다. 그런데 왜 그녀에게는 ‘이름’이 없을까. 그녀에게는 ‘제인’이라는 이름이 있는데, 왜 그녀에게는 이름이 주어지지 않은 걸까. 내 이름에서 두 자를 떼서 주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나는 그런 마음을 옆에 앉아 있는 아이에게 말하지 않은 채, 펼쳐진 교과서에 의미 없는 낙서를 하기 시작한다.

수업이 모두 끝나고, 오늘도 어제와 마찬가지로 그녀와 하교를 하게 되었다. 클래스메이트는 아무도 내가 그녀와 같이 하교하는 모습에 신경쓰지 않는다. 제 갈 길 바쁘다는 듯이 그들은, 두 명이나 세 명으로 무리지어 같이 어딘가로 사라진다. 이 넓은 세계에 단 둘만 남은 느낌이 든다. 그녀는 오늘도 같은 색 리본을 매고 있다. 나는 이제 그녀의 리본이 중요한 이유를 잘 안다. 그녀도 마찬가지로 잘 알고 있는 듯하다. 그녀가 말을 걸어온다.

“혼요미 군, 혹시 내가 아까 한 말에 대해 생각해 봤어? 공기, 빛 말야.”

“응… 생각해 봤는데, 그건 좀 시간이 필요하지 않을까. 당장 뭘 그릴 수는 없어.”

“그렇겠지. 그런데 혹시 이 말 알아? “멀리 돌아가는 히나””

“갑자기 무슨 소리야? 멀리 돌아가는 히나라니?”

“아니, 그냥 예전에 들었던 말인데, 무슨 뜻인지 몰라서.”

“히나가 멀리 돌아간다는 말이 아닐까? 다른 의미가 있나?”

“모르겠어. 한번 검색해 보는 편이 좋을 것 같아.”

그래서 나는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어 얇고 긴 스마트폰을 꺼내서, 인터넷 앱을 열고 검색하기 시작한다. “멀리 돌아가는 히나” 결과 0건.

“어라? 분명히 있었던 말인데… 이상해.”

“글쎄, 혹시 잘못 들은 게 아닐까? 이를테면 ‘히나’가 아니라 ‘하나’였다든지 하는. 사소한 실수, 종종 하잖아? 나도 그런 적이 몇 번 있어. 제인도 그런 게 아닐까?”

“아냐, 분명히 ‘히나’였어. ‘하나’ 같은 말은 달라. 그건 말의 성질이 다르거든. 성격이라고 해야 하나, 속성이라고 해야 하나, 비슷한 의미로. 다시 검색해 봐. 다른 검색엔진도 있지?”

나는 그녀의 말에 순순히 따랐다. 하지만 다른 검색엔진에서도 “멀리 돌아가는 히나”는 결과 0였다. 나는 울적한 그녀의 얼굴을 처음 볼 수 있었다. 그것은 드문 일이었다.

“됐어. 이 세계에서 “멀리 돌아가는 히나”는 없나봐. 아쉽네, 재밌는 말이었는데. 혼요미 군, 배고프지 않아? 우리 저녁이나 먹고 갈까? 아는 잘 하는 식당이 하나 있는데.”

“좋아.”

우리는 사거리에서 방향을 틀어 그녀가 잘 안다는 식당으로 향했다. 해가 점점 낮아지는 늦은 오후였다.

그녀가 나를 안내한 식당은 높이가 낮은, 나무로 지은 오래돼 보이는 곳이었다. 안으로 들어가 보니 공간은 두 명이 들어가 앉기 좋은 방으로 하나하나 구분되어 있고, 저 끝으로 여러 명이 모여서 대화하기 좋은 넓은 방이 하나 있었다. 우리가 들어가자 바로 앞에서 대기하고 있던 종업원이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를 지으며 안내한다.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능숙하게 안내를 받아 넓은 방을 제외하고 안쪽에서 두 번째 방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나도 그녀를 따라 방 안으로 조심스럽게 들어갔다. 차를 따르는 작은, 미세한 소리가 들려왔다.

“어때? 좋지? 혼요미 군이라면 분명 좋아해 줄 것 같아서, 예약을 하고 온 거야. 여기는 원래 차를 파는 곳이지만, 예약을 하면 ‘정식’을 먹을 수 있거든. 정말 맛있어. 기대해도 좋아.”

“으응. 차만 마셔도 배가 부를 것 같긴 하지만. 하하.”

그녀는 나를 여기에 데려온 게 내심 기쁜지 물을 따르기도 하고 젓가락을 놓기도 하면서 부산이었다. 나는 그녀와 함께라면 뭘 먹든 좋았지만, 그런 말을 그녀 앞에서 주의깊지 않게 내지는 않았다. 그녀, 제인은 크고 반짝이는 두 눈동자에 바로 위에 걸려 있는 등롱의 불빛을 담아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혼요미 군, 나 말이지. 네가 그려준 그림에 대해서 계속 생각해 봤거든, 수업이 끝날 때까지. 혼요미 군이 그려준 거라서 우선 기뻤는데 말야, 기쁨이 가라앉고 나니까 그림 ‘그 자체’에 집중할 수 있었어. 나를 그렸잖아, 그렇지? 그런데 그 모습은 내가 알고 있는 나의 모습이 아니었던 거야. 내가 생각하는 나의 모습은 좀 더 어둡고, 어두침침하고, 음기가 나올 것만 같은 불안정한 모습이었거든. 그런데 혼요미 군의 그림 안에서 나는 밝고, 반짝거리고, 생기가 넘치고, 곧 밝은 웃음을 터뜨릴 것만 같았어. 그게 나는 너무 신기해서 계속 그림을 생각했던 거야. 아까 공기와 빛 얘기를 하긴 했지만, 혼요미 군의 그림에 그게 없었던 건 아니었어. 오히려 너무 잘 드러나 있어서 이상했던 거야. 무슨 말인지 알겠지? 설명이 이상하지만.”

“잘 알 것 같아, 네가 말한 건. 그림이라… 음. 그럴 수도 있겠지. 나는 너를 앞에서 직접 보고 그림을 그리지 않았으니까, 실제 너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 나올 수도 있어. 그게 좋았다면 다행이지만.”

나는 그녀 앞에서 말하는 데에 따른 긴장으로 짧게 말을 마치고 물을 한 모금 마셨다. 아직 차는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그녀도 마찬가지로 물을 마실 수밖에 없었다. 우리 둘 다 물을 마셨다. 생각해 보면 물은 놀라운 물질이 아닌가. 서로를 이어주기도 하고 반대로 서로를 떼 놓기도 하는 물, 물이란 모순적이면서도 하나의 성질을 가지고 있다. 인간은 결코 단 하나의 성질을 갖지는 못한다. 아무리 이름으로 제약을 걸어 한 가지 성격으로 귀착시켜 보려 해도, 인간의 실존은 이름을 우습다는 듯 쉽게 벗어나버린다. 내 이름이 ‘혼요미’라고 하지만, 이건 그녀가 내게 붙여준 이름이 아닌가. 나는 그녀에게 “책을 열심히 읽는 남학생”으로 각인되었다. 그리고 그녀는 스스로 자신을 ‘제인’이라 이름붙였다. 여기엔 인간의 인식으로는 파악할 수 없는 우물이 몇 개 있었다. 이런 생각을 하는 사이에 차가 나와서, 우리는 종업원이 따라주는 차를 천천히 마셨다. 정식의 시간은 길었다.

“혼요미 군, 그림 얘기는 재미없지?”

“아냐. 재밌긴 한데, 뭐라고 표현하면 좋을까, 너무 다른 것 같아. 그림하고 말은. 말은 한정된 사태나 사물밖에 표현할 수 없어. 아무리 단어를 덧붙여 묘사를 하려고 해도, 풍경이나 사물은 금방 말 밖으로 벗어나버리고 말지. 나는 이 ‘말’이라는 데 대단한 회의감을 가지고 있거든. 제인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말’이라는 것에 대해서?”

“흠. (하는 소리를 내며 생각하는 표정을 짓는 건 그녀의 오래된 습관이었다.) 맞아. 말은 한정적이야.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은 토대를 창조해 내. 여기에 말의 신비로움이 깃들어 있는 게 아닐까? 토대라고 말하지 말고 어떤 프레임이라고 생각해도 좋아.”

나는 여기에 대해 예전에 생각해 보았지만, 결국 현실이라는 것은 말 밖에 있다. 말로 아무리 현실을 묘사해 내려고 해도, 언제 어디서나 현실이 말을 벗어날 ‘구멍’은 존재한다. 말은 수챗구멍 속으로 빠져나가는 현실을 그저 넋 놓고 바라볼 수밖에 없다. 그게 말의 한계다.

“말이 틀을 짜 낸다는 건, 반은 동의하지만 나머지 반은 동의할 수 없어. 자, 시를 생각해 보자. 시에서 사용되는 ‘말’은, 분량에 따라 다르지만 한정적이지. 시가 그려내는 작은 세계가 있어. 그건 시의 수만큼이나 무한할 테고. 하지만 나머지는 시를 읽는 독자가 채워 넣어야 해. 시인이 의도한 바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만, 말의 사이사이에는 빈 구멍이 있어. 너도 동의하겠지만, 말의 사이사이를 채워넣는 과정에서 감상이랄 게 생기지. 감상은 곧 ‘구멍 채우기’에 다름 아닌 거야.”

“맞아, 혼요미 군. 하지만 이런 경우를 생각해 봐. 만약에 네가 소설 속 등장인물이라고 하면, 소설가가 너를 쓰지 않으면 ‘혼요미’라는 존재는 존재하지 않던 게 되잖아? 아니면 반대로 생각할 수도 있어. 네가 어떤 소설을 쓴다고 해 봐. 너는 쓰지 않은 소설의 등장인물을, 그가 참다운 의미에서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니?”

한 방 먹은 느낌이었다. 그녀에게는 도무지, 어떻게, 무슨 수를 써도 이길 수 없다. 그녀가 나를 이곳, 정식을 겸하는 찻집에 데려온 것도 바로 이를 위해서였다. 그녀는 나의 존재근거, 요컨대 내가 생각한다면 반드시 존재한다는 존재의 제1근거를 허물어버린 것이다. 여기서 내가 무슨 말을 하든 그녀는 다음 수를 준비해 두어, 적절한 말로 나를 궁지에 몰아세울 게 틀림없었다. 그녀가 그런 ‘의도’를 가지지 않았다고 너그럽게 이해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녀는 이미 나를 세 보 앞서 있었다. 묵묵히 앉아서 차를 마시는 것밖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이곳에서 나는 무력했다.

“왜 그래? 얼굴이 안 좋아 보여.”

누구 때문인데 그래. 나는 그녀의 지금 모습을 그림으로 그리는 것으로 복수를 만족해야 했다. 머릿속으로 스케치를 끝냈을 때 정식이 나왔다. 맛있는 음식을 좋아하는 나는 그녀의 존재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젓가락을 들었다. 한 시간이 지나고, 우리는 후식을 먹게 되었다.

“오늘 저녁 먹어서 좋았어. 다음에도 이럴 수 있으면 좋겠네.”

“나도 마찬가지로.”

밥값을 그녀가 냈기 때문에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밥값을 그녀가 냈다는 데 불만이 있다는 게 아니었다. 이 모든 상황들이 계획되어 있다고 한다면, 내가 그녀의 식사 제의를 거절하고 집에 혼자 돌아가는 일은 불가능했다는 말이 된다. 그래서 나는 속절없이 식사에 만족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리본과 얼굴을 길게 보는 것을 즐기면서.

“혼요미 군, 그림은 언제 다시 그릴 생각이야?”

“사실 아까 밥을 먹을 때 생각해 뒀어. 주말에 그리려고. 이번엔 좀 더 크게.”

“와! 얼마나?”

“A3 정도 될까? 너무 커도 별로지만.”

“그럼 내가 액자를 살게. 혼요미 군에게 받은 그림을 끼워둘게.”

“뭐, 그럴 것까지야. 잘 그리는 것도 아닌데.”

“아냐! 아까 말했잖아, “너무 잘 드러나 있다”고. 이런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혼요미 군 하나뿐이야.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전혀. 나를 과대평가할 수 있는 사람은 적어도 나는 아니거든.”

“헤헤. 여전히 재밌는 소리를 하는구나. 그럼 다음 주에 봐!”

그녀가 손을 흔들며 사라져 간다. 밤이라 연보랏빛 머리카락은 잘 보이지 않는다. 가로등 불빛에 반사된 그녀의 머리카락은 오히려 짙은 보라색이다. 남색같아 보이기도 한다. 나도 화답해 손을 흔들며 그녀가 골목 저 끝까지 사라지는 모습을 지켜본다. 집에 돌아가면 끝없는 어둠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내일부터 주말이었기 때문에, 나는 공부에 대해 생각하지 않고 바로 잠들었다. 고요하고 침울한 밤이었다.

여기서부터, 그러니까 그녀와 만난 다음 날부터 나의 생활은 180도 뒤바뀌었다. 나는 이제 예전만큼 열심히 공부에 열중하지 않았다. 오히려 공부는 다른 학생들이 하는 정도로만 했다. 그리고 그 대신 그림을 하루에 하나씩은 꼭 그렸다. 모델은 주로 그녀였지만 — 달리 그릴 만한 상대도 없었으므로 — , 그녀를 그리는 게 따분할 때면 공원이나 학교에 스케치북을 들고 앉아서 주위의 모습을 천천히 그렸다. 나는 ‘넓은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 넓은 그림은 내게 맞지 않았다. 대신 나는 내 반경 2m 정도에 자리잡은 풍경을, 잘 깎은 연필을 들고 세심히 관찰하면서 그려 나갔다. 어떤 때는 도화지에 나무가 그려졌다. 또 어떤 때는 달리는 사람이나, 움직이는 꽃이나, 바닥에 깔려 있는 낙엽들이 화폭에 자리잡았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나의 그림은 점점 더 세밀하고 능숙해져, 나중에는 친구에게 콘테스트에 한번 내 보는 게 어떻겠냐는 제의를 받은 적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내 그림을 어딘가에 내지는 않았다. 별로 내키지도 않았고, 누군가를 위해, 혹은 보상을 위해 그림을 그린다는 생각을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 그림을 봐 줄 사람은 그녀 하나만으로 충분했다. 적어도 그 때는 그랬다. 방학을 맞이하고, 해는 길어졌다가 점차 짧아지기 시작했다. 이제 가을이 다가오고 있었다. 추운 가을이.

그녀를 다시 볼 수 있었던 건 가을학기가 시작하고 사흘이 지나서였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그녀는 개학일과 그 다음 날에 학교에 등교하지 않았다. 선생도 그 이유를 잘 모르는 눈치였다. 반 아이들은 물론 그녀의 거취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내 옆자리에 앉은 아이에게 혹시 이유를 물어볼까 하다가, 곧 그만두었다. 그녀라고 제인이 왜 학교에 오지 않는지 알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이틀간의 걱정을 훅 불어서 날려보내기라도 하듯, 그녀는 경쾌한 모습으로 등교했다. 나는 곧바로 그녀의 자리로 향했다.

“안녕, 제인. 오랜만에 보는 것 같네.”

“안녕. 혼요미 군, 내가 왜 학교에 오지 않았는지 궁금하지? 궁금해서 미칠 것 같지?”

“그러지 마, 짓궂게. 어차피 네가 말해줄 거라고 믿고 있어. 그러니 괜찮아.”

“정말? 그런데 이를 어쩌나, 나는 바로 말해줄 생각이 없는데.”

“괜찮아. 언젠가는 말해줄 테니까.”

“…농담이야. 나중에 하교할 때 말해줄게. 조금만 기다려.”

말의 끝에 그녀는 나를 향해 가볍게 눈웃음지었다. 나도 거기에 화답해 고개를 한번 끄덕였다. 교실 앞에서 반장이 HR을 알려서 나는 자리로 돌아갔다. 오늘은 옆자리에 앉는 아이가 늦는 모양이었다. 나는 거기에 큰 주의를 두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오늘은 그녀가 왔으니까.

수업이 어떻게 지나갔는지도 모른 채 나는 하루의 1/3을 보냈고, 이윽고 하교시간이 다가오자 이미 책가방을 챙기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가방을 메고 교실을 나왔을 때 그녀는 이미 나를 기다리고 서 있었다. 우리는 손을 잡았고, 서로의 체온을 확인하며 정문까지 쭉 걸었다. 방학이 시작하기 전부터 이미 우리가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소문이 나 있었지만, 둘 다 그런 소문에 연연하지는 않았다. 이제 우리는 서로를 가장 잘 안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보다는 그녀의 믿음이 더 강했던 것 같았다. 그녀는 말했다.

“혼요미 군, 요즘도 그림 그려?”

“어, 그려. 요즘은 그냥 주위의 모습을 그리고 있어. 잘 되는 것 같기도 하고, 그렇지 않은 것 같기도 해. 봐 줄 사람이 없으니 잘 모르겠지만. 보여줄까?”

“나중에. 지금은 걷는 데 집중하자. 벌써 가을이 왔어. 자연에 가을이 만연해. 울긋불긋한 단풍이 가장 아름다워지는 계절이야. 멋지지 않니?”

“멋져. 너랑 같이 단풍을 볼 수 있다는 게. 이 시간이 얼마나 지속될 수 있을까?”

“헤에, 마치 혼요미 군은 내가 곧 사라져버릴 것처럼 얘기하네. 그럴 것 같아?”

“모르겠어. 여름방학 동안에는 계속 그림을 그렸어. 네 생각을 하기도 하고, 때때로 멀리 떠나고 싶다는 생각을 하면서. 그러면서 그림을 그리면 왠지 아무 생각도 안 하고 그릴 때보다 더 명징하게, 선명하게 그려진다는 느낌을 받아. 그리고 나는 그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거지,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처럼.”

“그래. 잘 알아. 나도 마법을 쓸 때는 그런 느낌을 받거든. 평소에는 아무 느낌이 없지만.”

제인이 ‘마법’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나는 그녀에게 마법이 무엇인지 물어보고 싶었지만, 굉장히 껄끄러운 질문이 될 수도 있었기 때문에 이번에는 묻지 않았다. 나중에 그녀가 내게 설명해 줄 때가 올 것이다. 참을성 있게 기다리기로 하자, 그녀가 입을 열 때까지. 우리는 언제나 헤어지는 갈림길에서 헤어졌다. 그녀가 손을 흔들고 사라지는 짧은 시간이 어느 때보다 길게 느껴졌다. 나는 손에 스케치북을 들고 있었다. 이제 나는 그녀를 그릴 것이다. 조금 더 선명하게, 조금 더 아름답게. 그녀는 마법사였다.

나가노에 살고 있는 친척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던 순간, 대학교 4학년이던 나는 집에서 졸업논문을 수정하고 있었다. 모두가 말하는 것처럼 학위논문을 쓰는 일에는 그리 많은 노력이 필요하지 않았다. 하지만, 친척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나는 이 작업이 매우 어렵고 지난한 작업이 될 것임을 예상했다. 우선, 나는 나가노로 가는 교통편을 알아보았다. 도쿄에서 나가노까지 신칸센으로 1시간 30분, 버스로는 5시간 정도. 고속버스는 4시간 정도면 나가노에 갈 수 있었다. 나는 버스를 예매했다. 버스표를 예매한 뒤에 나는 늦은 점심을 먹으러 밖으로 나왔다. 점심은 후지소바에서 먹을까, 아니면 요시노야에서 먹을까. 당시 나는 수중에 가진 돈이 얼마 없었으므로, 한 끼를 500엔 안에서 해결해야 했다. 그래서 나는 후지소바 아니면 요시노야, 편의점 아니면 맥도날드에서 점심 세트, 이렇게 정하고 매일매일 가게와 메뉴를 바꿔가며 식사를 해결했다. 그리고 오늘은 버스표를 예매해서 정말로 수중에 남은 돈이 얼마 없었다. 나는 후지소바에 가기로 했다. 갑자기 텐푸라소바가 먹고 싶어졌기 때문이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나는 제인에게 내가 쓴 글을 보여주었다. 제인은 내가 손으로 쓴 글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말했다.

“이건 네가 쓴 거니?”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제인은 알았다는 듯이 웃었다. 나와 함께 있을 때면, 그녀는 언제나 친절하다.

“좋아. 혼요미 군의 말을 믿어보겠어. 달리 다른 방법도 떠오르지 않으니까. 자, 그래서 이 글을 통해 너는 무슨 말을 하려고 한 거야?”

나는 제인에게 설명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그것은 시간이 조금 걸리는 작업이었다.

“모르겠어. 눈을 뜨고 보니, 나는 글을 쓰고 있었어. 긴 글이었지만, 줄이고 줄여서 종이 한 장에 다 담을 수 있었어. 그리고 나는 이것을 제인에게 보여줘야 할 필요가 있다고 느낀 거야.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제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고개를 끄덕임에 따라, 그녀의 머리에서부터 자라 있는, 나뭇잎처럼 보이는 연보랏빛 머리카락이 바람이 불어오듯 살며시 흔들렸다.

“하지만 내가 처음에 무슨 말을 하고 싶었는지는, 도무지 생각해 내려고 해도 생각해 낼 수가 없어. 금방 다른 생각으로 넘어가게 돼. 제인은 무슨 말인지 알 거야. 그래서 내가 쓴 ‘글’에 제대로 집중할 수 없어.”

내 말을 듣고 제인은 말했다.

“그렇구나. 그럼 이건 혼요미 군이 쓴 글이 아닐 거야, 분명. 혼요미 군이 모르는 누군가가, 혼요미 군의 입을 빌려서 무언가에 대해 말하려고 한 게 분명해. 그래서 혼요미 군은, 자신이 쓴 게 확실한 — 확실하다고 알고 있는 — 글에 대해 알고 있는 정보가 거의 없는 거지. 저기, 혹시 다른 글도 보여줄 수 있어?”

응. 하고 나는 제인에게 말했다. 사실 저것 말고도 쓴 글이 하나 더 있었던 것이다. 어쩌면 두 개 있는지도 몰랐다. 나는 우선 주머니에 넣어둔, 두 번 접은 종이를 펼쳐 제인에게 보여주었다. 글은 아래와 같았다.

나는 세상에 대해 아이들이 하는 것과 같이 떼를 쓰고 싶어했는지도 모른다. 세상에게 계속 떼를 쓰다 보면, 내 입에 떡이라도 넣어주지 않을까 해서. 하지만 세상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 세상은 절대 노동하지 않는 자에게 점심을 주는 법이 없다. 그게 세상이 굴러가는 법칙이었다. 나는 이하토프로 가는 길에 만났던 꼬마의 일을 떠올렸다. 생각해 보면 그 꼬마는, 먼 과거의 내 모습과 무척이나 닮아 있었다.

“이, 이, 이제야 이, 이, 이하토프에는 눈, 눈이 아니라 눈이 내린다고 했습니다, 그 아이는, 그 아이는 그렇게 말했지만, 저는, 그러니까 저는 그 말을 반신반의했는데, 왜, 왜 그랬냐면 그건 이, 이미 ‘동화’라는 게 읽혀지지 않기 때, 때문이었습니다. 그, 그러자 그 아이는, 그 아이는 눈, 눈이 아니라 눈을 동그랗게 크게 뜨더니 이, 이,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눈, 눈이 내린다구요, 모든 것을, 아니 그래도 하늘을 덮을 순 없겠지만, 모든 것을 덮어버리는 눈이 내려와버린다고 말, 말입니다. 그래서 그 말을 듣고 저는 이렇게 말했지요. 얘야, 세상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단다. 눈 정도로 세상은 가라앉지 않아. 그러나 꼬마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제, 제 친구인 네리가 말하기를, 세상은 예전에도 물로 뒤덮인 적이 있다고 했어요. 저는 이제 ‘세상’이라는 게 무엇인지 조금 알고, 그리고 또 왜 세상을 ‘끔찍하다’고 말하는지도 조금은 알게 되었기 때문에, 꼬마의 말을 듣고 잠시 생각하는 표정을 지었습니다. 그리고 말했습니다.

“그래, 하지만 물로도 지울 수 없는 죄라는 게 있단다.”

꼬마가 마지막으로 무슨 말을 했는지 똑똑히 기억합니다. 아이는, 눈이 아니라 눈을 날카롭게 뜨며 놀이용 다트라도 던지는 것처럼 서늘하게 말했습니다. “눈으로 죄는 지울 수 없겠지만, 그, 그래도 끔찍한 모습을 잠시나마 가려줄 순 있잖아요.” 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실로 그 말 그대로일지도 모릅니다. 하늘에서 눈이 내리면, 모든 것은 ‘눈이 내리는 풍경’으로 변하고 맙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풍경을 낭만으로 소비하며 즐기지요. 나는 꼬마가 일찍 죽어버릴 것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꼬마의 입은 거짓을 말하는 법이 없습니다. 설령 그것이 세상의 이치를 벗어난 ‘기적’이라고 할지도요. 저는 그대로 이하토프에서 열흘이나 있었습니다. 열흘이라면 긴 시간이 아닙니다. 하지만, 누군가에게는 충분히 긴 시간입니다.

제인은 글을 다 읽고 가볍게 한숨쉬었다. 나는 그런 제인의 얼굴을 바라보는 일을 즐겼다. 제인은 누구에게라도 화를 내는 법이 없었다. 아니, 아예 ‘화를 내는 법’ 자체를 모른다고 해야 할까. 나는 제인이 누군가의 질문이나 요청에 짜증을 내거나, 화를 내는 일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실제로 제인에게 그런 식으로 말을 걸어오는 사람도 적기는 했지만. 제인은 나에게 할 말을 생각하고 있는 듯했다. 그녀의 입술이 조금씩 움직이는 모습이, 나의 눈에 들어왔다. 뭔가 말하고 싶어하지만, 금방이라도 입을 열면 원래의 의도와는 다른 말이 튀어나올 것 같아서 경계하는 그녀의 의도를 그대로 드러내는 것마냥, 작고 귀엽게 움직이는 입술. 나는 그녀의 입술에 키스하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없다. 아니, 한 번은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제인에게 내가 그런 생각을 했다고 말한 적은 없다. 제인은 드디어 결심했다는 듯 입을 열었다. 그리고 그 귀여운 입에서는, 뜻밖의 말이 튀어나왔다.

“혼요미 군, 이건 그러니까… 정말로 슬픈 글이야.”

“응? 뭐라고?”

“혼요미 군은 단지 누군가의 글을 옮겨 적은 것에 불과하기 때문에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지만 말이지, 여기서 “이하토프에 눈이 내렸다”는 건, 꼬마가 곧 죽을 거라는 걸 암시하는 문장이야. 이 꼬마를 생각하면 나는 가슴이 차가워지는 걸 느껴. 혼요미 군, 이건 너무나 슬픈 글이야.”

나는 제인의 말에 아무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제인이 그렇다면 그건 ‘슬픈 글’이었습니다. 제인은, 그러니까 나의 가장 소중한 친구 제인은, 내가 누군가의 의지에 따라 옮겨 적은 글을 보고 대단한 슬픔을 느꼈음에 분명했습니다. 나는 제인에게 해 줄 말을 몰라 그저 가만히 그녀의 눈을 보고만 있었습니다. 아아, 저는 대체 무엇을 할 수 있는 걸까요. 맛있는 푸딩을 사 주면 그녀의 마음이 조금은 따뜻해질까요, 혹은 그녀를 위해 준비한 그림을 보여준다면… 밖은 높게 자란 나무와 전신주를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침울하게 흐렸습니다. 흐린 어둠 속을 낮게 나는 까마귀가, 소리도 내지 않은 채 허공을 빠르게 가로지르고 있었습니다. 나는 제인에게 말하는 일을 포기한 채, 가만히 턱을 괴고 눈이 내린 이하토프의 풍경을 상상했습니다. 눈이 내리면 아이들은 눈이 내린 언덕 위에 올라 뛰어놀 것입니다. 아이들이 즐겁게 노는 모습을 상상하니, 자연스럽게 나 또한 눈시울이 붉어지는 듯해서, 제인의 옆에서 나 또한 침묵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구식 난로에서 타닥타닥 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지만, 소리는 이내 그치고 주위를 깊은 침묵이 감싸고 있었습니다. 지난 밤에 제인과 내게 있었던 일은, 정말로 이것이 다입니다.

‘눈이 녹을 무렵’이라는 의미를 가진 단어로 경칩이 있다. 경칩이라는 말에는 겨울잠을 자던 개구리가 겨울이 물러감을 느끼고 잠자리에서 일어난다는 속뜻이 담겨 있는데, 실제로 내가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긴 겨울이 지나갔을 때, 나는 따스한 언덕 위에 대자로 누워 초봄 상쾌한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곁에는, 언제나처럼 제인이 이야기를 하거나, 아니면 내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어? 혼요미.”

제인이 물어왔을 땐 대답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이 우리 둘 사이의 불문율이었다. 풀꽃을 하나 뜯으며, 나는 대답했다.

“아무 생각도. 아, 이것도 생각이라면 모르겠지만, 겨울에 대해.”

“겨울? 봄인데, 겨울에 대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말이야, 혼요미?”

아아. 물론 제인은 분위기를 깨는 나를 책망하기 위해 위와 같은 질문을 던진 것은 아니다. 처음으로 제인의 추궁을 듣는 사람이라면 물론 오해하겠지만, 제인은 절대 다른 사람에게 죄책감을 부여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것은, 누구에게라도 쉽게 자신에게 죄가 없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제인이 ‘모든 이’를 용서한다고 생각하면 곤란하다. 그녀는 누구도 용서하지 않는다.

“응. 겨울에 대한 생각을 하고 있었어. 봐, 연못 위에 얇게 깔린 얼음이 녹으면 개구리는 땅에서 나와 울기 시작하잖아. 개구리는 어떻게 봄이 왔다는 것을 알고 있는 걸까 하고, 혼자 질문해 본 것 뿐이야. 제인, 그보다 ‘마지막 수업’은 잘 되고 있어?”

“아니. 보다시피 모든 점에서 엉망이야. 저번에는 사소한 계산 실수로 시약을 하나 태워먹어서, 덕분에 하루종일 마른 하늘에 날벼락이라도 맞은 듯한 머리를 하고 다녔어. 얼마나 끔찍했던지.”

에휴, 하고 제인은 낮게 작은 한숨을 쉰다. 그 모습이 귀여워서 내가 질문한다는 걸, 그녀는 알까 모를까. 나는 제인에게 ‘학교생활’의 다른 면에 대해 더 물어보고 싶었지만, 제인의 표정이 그렇게 좋지 않았기 때문에 이번에는 할 수 없이 포기하고, 대신 다른 질문을, 하나 더 던져 보았다.

“저기 말인데, 제인. 이번에 네가 만든 세계는 정말 멋졌어. 농담이 아니라 정말로. 나는 네가 어떻게 보지도 않은 세계에 대해 그렇게 자세히 알고 있는지, 심지어 어둠 속에서 빛나는 가로등의 선명한 빛깔이나 나무결의 섬세함마저도, 매번 놀랄 뿐이었는걸. 제인, 대체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한 거야?”

예상하건대, 제인은 내가 제기한 질문에 답하기 위해 애쓰는 한편으로, 그녀 혼자 간직하고 있는 것들에 대해 ‘피조물’인 내게 밝히기를 매우 꺼려할 것이다. 제인은 고민하기 위해 잠시 눈을 감았다. 그녀의 고민이 내게로 전해지는 듯했다. 나는 작게 한숨쉬었다.

“혼요미, 그러니까 이건 말이지, 너와 나의 작은 세계에 대한 문제보다는 훨씬 더 복잡한 문제라는 사실을 알아줬으면 좋겠어. 너는 내가 만든 ‘세계’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겠지만, 나는 내가 만든 ‘모든’ 세계에 대해, 너를 포함해서 누구보다도 가장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거든. 내가 너를 사랑한다는 것, 그것만 알아줬으면 좋겠어. 지금 이 순간을 우리가 분유하고 있는 동안은.”

제인은 나에게 어려운 답을 던진다. 잠시나마 나는 제인에게, 그녀가 답하기 어려운 문제를 제기한 사실을 반성한다. 나는 잘못된 질문을 한 것이다. 그리고 아마 그녀도, 내 질문을 받자마자 그 사실을 깨닫고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던 것에 틀림없으리라. 나는 제인이 어리석은 문제로 나를 책망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감사하며, 마지막에 그녀가 남긴 ‘사랑한다’는 말을 되짚어보았다. 그녀는 내게 사랑한다고 말했다. 나 또한 그녀를 사랑하고 있는 걸까? 대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나는 대답을 대신해서, 그녀의 마르고 얇은 긴 손을 잡았다. 뼈마디가 있고 힘줄이 있는, 살아 있는 인간의 손이었다.

“혼요미, 저기, 음, 그러니까… 이건 말이지, 사랑한다고 모두가 상대의 손을 잡는 건 아냐.”

“알고 있어, 제인. 하지만 나는 제인을 사랑하고 있는 건지, 아니면 단순히 제인의 곁에 있다는 사실이 좋았던 건지 잘 구분되지 않았어. 그렇다면 손을 잡을 수도 있지 않을까?”

“정 그렇다면.”

제인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말이 필요하지 않았고, 그건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봄날의 햇살은 기분 좋게 땅으로 떨어져 내린다. 그리고 언덕 위 두 사람은, 잠시간 둘에게 주어진 여유를 탐닉한다.

잠에서 깨니 이미 한낮이었다. 옆으로 돌아누워 시계를 보았더니, 시침은 벌써 오후 12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나는 일어날 준비를 하려고 몸을 일으켰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할 수 없이 나는 침대 위에서 몸을 빙그르르 굴려, 바닥에 떨어진 뒤에야 드디어 몸이 말을 듣게 만들 수 있었다. 나는 잠시 신음했다. 떨어질 때의 아픔보다 더더욱, 직전까지 꾸었던 꿈의 여운이 나를 몰아붙였음은 물론이다. 대체 그 꿈은 무엇이었을까? 왜 제인과 나는 함께 풀밭에 누워, 내가 알 수 없을 사실들에 대한 이야기를 한 걸까?

생각을 거듭해도 답은 나오지 않았으므로, 나는 대충 이불을 정리한 뒤에 햇살 가득한 나의 방을 나와, 욕실로 이동해서 샤워를 하기 위해 옷을 벗었다. 오늘은 일요일, 학교에 가지 않고 무엇을 해도 용서받을 수 있는 날이다. 옷을 벗으며 나는 화장실에 가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는, 옷을 벗은 그대로 화장실로 향했다. 쪼르르… 하는 소리가 들리는 잠깐의 시간 동안 나는 다시 꿈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제인은 내게 뭘 말하려고 했던 걸까? 그리고 나는 제인에게 어떤… 갑자기 얼굴이 붉어져 왔다. 나는 다시 욕실로 들어가, 가볍게 샤워를 한 다음에 욕조에 틀어박혀서, 오늘 같은 휴일에는 뭘 하면 좋을지 생각해 보다, 공원에 가서 그림이라도 그리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어, 그대로 실천에 옮기기 위해 욕실에서 나와 옷을 챙겨입고, 스케치북과 잘 깎은 연필, 지우개가 들어 있는 작은 천케이스를 들고 밖으로 나왔다.

늦가을의 공기는 늦가을 이전에 맞는 공기와는 질적인 측면에서 확연히 다르다. 하나의 계절이 끝나고 다른 계절이 시작되려는, 막연한 기대감을 품고 있는 공기는 살짝 차갑고, 손을 밖으로 꺼내면 금세 포켓 안으로 집어넣고 싶어진다. 근처의 자주 가는 공원에 도착한 나는, 우선 짐을 푼 뒤에 편의점에서 사 온 도시락으로 가볍게 요기를 하고, 따뜻한 녹차를 한 잔 마신 뒤에 바로 작업에 들어갔다. 시작은 저번주 목요일부터 했는데, 아직 풍경의 윗 부분을 대강 스케치하는 데 그치고, 밑은 아예 손도 대지 못했다. 적어도, 한 달 정도는 걸릴 것 같았다. 혹시나 해서 가져온 작은 연필깎이는 꽤 도움이 되었는데, 그것은 내가 작업할 때마다 한 번씩 심을 부러뜨리는 경우가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처음부터 깎기도 귀찮은 일이라서, 나는 심을 뾰족하게 만들기 위해 작은 연필깎이를 이용한다. 그리다 말다를 반복하는 동안 그림은 점차 형체를 더해갔고, 그림이 형체를 더해가는 것에 맞추어 해가 조금씩 서쪽으로 넘어가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내가 그림을 열심히 그리는 동안, 공원에는 몇 명의 사람들이 휴식 등을 이유로 왔다 사라졌다. 다들 내가 그림을 그리는 모습을 유심히 관찰했지만, 누구 하나 말을 거는 사람이 없었다. 아마, 할 말이 없었던 것에 더 가까울 테지만. 해가 뉘엿뉘엿 질 무렵, 나는 화구를 챙기고 집으로 돌아갈 준비를 했다. 그 때였다, 제인이 공원 건너편에서 모습을 드러낸 건. 나는 적잖이 놀랄 수밖에 없었는데, 그도 그럴 것이, 제인이 주말에 공원에 모습을 드러내는 일은, 지금까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먼저 가볍게 인사하고, 화구를 든 채로 나 또한 가볍게 인사했다. 제인이 먼저 말을 꺼냈다.

“여긴 어쩐 일이야? 일요일에 공원에 와서 그림을 그리고 있다니. 자주 오는 거야?”

“으응, 자주는 아니고 한 달에 두세 번 정도. 오늘은 밑그림을 조금 그렸어. 아직 보여줄 단계는 아냐. 완성되면 제인에게 가장 먼저 보여줄게. 약속이야.”

“약속은 됐어. 우리 사이에 약속 같은 게 필요하지는 않아. 그나저나 혼요미 군, 문제가 생겼어. 나 혼자서 이 문제를 해결하기는 조금 어려울 것 같아. 잠깐 손을 빌릴 수 있을까?”

“문제? 어떤 문제?”

“그게, 오늘 내가 학교에 가서 긴히 도와야 할 일이 하나 있었는데, 깜빡하고 못 찾아갔거든. 그래서 말인데, 혼요미 군, 네가 먼저 학교에 가서 자초지종을 설명해 줄 수 있을까?”

“자초지종?”

제인의 말을 정리하자면 이렇다. 그녀는 오전에 부모님의 — 하지만 제인의 부모님에 대해, 누구도 아는 바가 없음은 물론이요, 제인에게 부모님이 존재하는지조차 클래스메이트들은 몰랐다 — 일을 돕고, 오후 늦게서야 이곳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오늘 학교에 가는 일이 불가능했고, 부모님의 일로 매우 지쳤기 때문에, 나를 대신 보내서 사정을 설명하고 싶었다. 그러니 부디 양해를 바란다, 시간을 빼앗아서 미안하다는 것이었다. 나는 집으로 돌아갈 채비를 마친 상태라, 처음에는 제인의 부탁을 거절해 볼까 생각도 해 보았지만, 마침 학교에도 볼일이 있었던 것 같기 때문에 나는 제인의 부탁을 들어주었다. 조금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가끔 이런 일도 있는 법이다. 제인은 내게 편지 하나를 건네주었는데, 겉에는 고풍스러운 필치로 이렇게 적혀 있었다. “제인의 학교 담당에게, 제인의 부모로부터.”

“이게 자세한 내용이 담긴 편지야? 나는 편지를 그 분에게 전해주면서 자초지종을 설명하면 되는 거고?”

“그래. 그렇게 하면 될 거야, 아마도. 내용은 영어로 적혀 있겠지만, 뭐, 문제 없겠지.”

“잠깐? 영어라고? 혹시 읽지 못하면 어떡하려고 그래? 귀찮겠지만 일본어로 다시 적는 편이 낫지 않을까? 나중에 복잡한 문제가 되면 해결하기 더 어려워질 거야. 제인, 내용을 알고 있어?”

“아니. 사실 나도 내용에 대해서는 잘 몰라. 그저 부모님이 잘 써 주셨겠지 하는 마음일 뿐. 혼요미, 걱정할 것 없어. 어차피 학생회장은 겉만 보고 안의 내용물은 절대 보지 않을 테니까.”

“학생회장이라고? 그럼 더 문제가 심각해질 텐데.”

“괜찮아. 내 말을 듣고 실패한 적이 있었니? 이번에도 잘 될거야.”

나는 제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녀의 말을 듣고 실패한 적은 없었다. 물론 그것이 반드시 성공으로 이어졌다고 말하기도 애매하지만. 여하간 나는 제인의 말을 들었다.

“알았어. 그렇게 할게. 대신 다음에는 꼭 라멘을 먹으러 같이 가자. 잘 아는 데가 있어.”

“그럼, 물론이지. 기대할게, 혼요미.”

나는 더 하고 싶은 말이 있었지만, 할 수 없이 속으로 삼키고 제인이 준 편지를 포켓 속에 소중히 넣어둔 다음, 학교로 향했다. 학교는 공원에서 걸어서 10분 거리에 있었다. 빠르게 걸어가면 그렇고, 대로를 따라 천천히 걸어가면 15분 정도는 걸릴 거리였다. 하지만 나는 학교로 가는 지름길을 알고 있었다. 교문으로 들어서자, 가방을 들고 하교하는 여학생 한 명이 보였다. 나는 그녀에게 우선 말을 걸어보았다. 혹시나 하는 마음을 품고.

“혹시 학생회장이 어디에 있는지 아시나요? 아니면, 벌써 집으로 돌아가셨나요.”

“학생회장? 글쎄. 나는 학생회 소속이 아니라서 잘 모르겠는데. 학생회는 3층 복도 맨 구석에 있으니까, 그쪽으로 한번 가 보는 게 어때?”

그럼, 하는 인사를 남기고 그녀는 교문 밖으로 사라져간다. 고마움을 표현할 기회를 잃어버린 나는, 교사 안으로 들어가 3층까지 돌계단을 타고 오른 뒤에, 복도 맨 구석에 자리잡은 학생회의 현판을 확인하고 주저 없이 바로 안으로 들어갔다. 안에는 학생으로 보이는 사람이 세 명, 테이블을 가운데에 두고 작업에 매진하고 있었다. 아마도 다음 주면 열리는 학교축제를 위한 준비인 것 같았다.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제인이라는 여학생에게 부탁을 받고 찾아왔습니다만…”

“아아, 거기 앉아요. 지금 많이 바쁘니까, 15분 정도 기다려 줄 수 있으려나? 차라도 한 잔 마실래요?”

꾸벅 고개를 숙이고 자리에 앉았다. 학생회장이 찬장에서 다기와 티백을 꺼내 차를 우려내는 동안, 나는 제인이 말했던 내용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았다. 학생회장과 제인은 무슨 관계인 걸까? 어째서 그녀는, 아니, 제인은 학생회장의 일을 돕기로 약속했던 걸까? 생각이 미치지 않는 영역에서 그 둘은 움직이고 있었다. 옆에서는 그런 나를 전혀 신경도 쓰지 않으며, 열심히 종이를 가위로 자르거나, 인쇄한 스티커를 붙이거나, 인쇄물을 봉투에 넣느라 분주하다. 나는 포켓 속으로 손을 집어넣어 보았다. 손끝으로 제인이 준 편지봉투의 감촉이 느껴졌다. 저 책상 위에서 이뤄지고 있을 법한 봉투들의 일련의 움직임과 비교했을 때, 제인의 봉투는 마치 다른 세계에서 온 것처럼, 조용히 잠을 자고 있는 것만 같았다. 15분 정도 기다렸을까, 학생회장이 작업을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약간 잠긴 듯한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제인이 어떻게 내게 말해달라고 부탁했죠? 나는 그녀의 일이라면 뭐든지 알고 있으니까, 거짓말 할 생각은 말아요. 편지를 하나 가져온 것 같은데, 그것도 같이 보여준다면 더할 나위 없겠네요.”

나는 나의 걱정이 현실이 된 것에 놀라고, 사태가 제인의 말대로 흘러감에 다시 한번 놀랐다. 그녀라고 부르는 편이 좋을까, 학생회장은 야무진 타입의 여성으로, 겉으로 봤을 때는 전혀 여성으로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교복 또한 남성과 동일한 교복을 입고 있었으니 더더욱 그랬다. 내가 학생회장이 여성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던 유일한 이유는 그녀의 가슴이었다. 학생회장은 편지를 꺼내 몇 줄 읽어보더니, 그것을 다시 봉투에 집어넣고는 내게 말했다. 조금 더 차가워진 듯한 목소리로.

“알겠어요. 이 이상 당신에게 추궁하지 않을 테니까, 제인이 어떻게 내게 변명해 달라고 부탁했는지, 되도록이면 자세하고 진실되게 설명해 주세요.”

그녀의 말대로 나는 제인이 내게 한 말을 그대로 그녀에게 전달해 주었다. 학생회장은 입을 닫고 내가 하는 말을 가만히 듣고 있었다. 이야기가 끝났을 때, 그녀는 볼일이 다 끝났다는 듯 편지를 서랍 속에 집어넣더니 나를 보고 한 마디 덧붙인다.

“제인은 아마, 실례가 아니라면 당신을 좋아하는 것 같군요. 둘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 사실만은 잘 알 수 있었어요. 제게 더 묻고 싶은 말이라도 있나요?”

“제인은 거짓말을 한 게 아닐 거라고 생각해요.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는 저도 잘 모르겠지만, 이상하게 그런 기분이 들어요. 제인이 제게 거짓말을 할 때는 자신의 머리카락을 빙글빙글 감는 습관이 있는데, 오늘 제 앞에서는 그런 행동을 전혀 보이지 않았거든요. …잘 모르겠어요. 어쩌면 제인이 거짓말을 했을 수도 있지만, 그러나 제게 있어서만큼은 그녀가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거짓말을 지어냈다곤 생각하지 않아요.”

“그렇다는 믿음이 당신에게는 분명하게 자리잡고 있다, 이 말씀인가요?”

“네, 어쩌면.”

“오해가 하나 있어서 교정하자면, 저도 제인이 거짓말을 했다고 믿고 있지는 않아요. 우선 그녀는 거짓말을 할 정도로 능수능란한 타입의 인간이 아니고, 또, 편지의 내용이 진실을 증명하고 있으니까요. 저는 다만, 제인이 당신에게 무슨 말을 ‘정말로’ 했는지, 그게 궁금했을 뿐이에요.”

학생회장과 나를 제외한 둘은 말 없이 작업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 아니 그녀라고 불러야 할까, 이제 잘 모르겠다. 어쨌든 학생회장은 서랍을 열었다 닫기를 반복하더니, 대뜸 나를 향해 화살처럼 물었다.

“제인이 오늘 바로 ‘여기’에 나와야 했던 이유를, 혹시 당신이라면 짐작할 수 있으려나요?”

그건 내가 알 도리가 없는 일이다. 내가 제인이 아닌 이상, 제인이 ‘맡아야 했던’ 일에 대해 내가 공의 실밥 하나라도 알 수 있을까. 그러나 학생회장은 내게서 뭔가를 기대하는 눈치였으므로, 조금 생각해 본 뒤에 나는 정말 입에서 나오는 대로, 되는 대로 지껄였다. 지껄이면서 말하는 수밖에 없었다.

“아마, 음, 영어가 능숙한 사람이 한 명 필요하지 않을까 싶습니다만. 제 추측이 맞나요?”

“아깝네요. 틀린 답이지만, 그래도 정답에 조금 가까웠어요. 힌트를 하나 드리자면, 그녀의 ‘직업’과 관련 있는 일이에요. 그녀의 사랑을 확인한 이상, 당신 또한 그녀가 정확히 누군지 알 거라고 생각해요. 자, 답은?”

“…이제야 제인이 오늘 바로 ‘여기’에 왜 오지 않았는지, 그 이유를 알 것 같은 기분이 드는군요. 여기는 뭔가 잘못됐어요. 물론, 잘못된 것을 알고서도 부탁을 거절하지 않은 제인에게도 문제가 있지만, 그래도 이건 아냐. 아니라고 생각해요, 저는. 혹시 봄을 기다리고 있나요, 당신은?”

학생회장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올바른 답을 말했다는 표식이리라. 그녀 혹은 그는 한 손에서 갑자기 볼펜을 꺼내더니, 책상 위에 있던 종이에 대고 뭐라고 휘갈겨 적었다. 그리고 그것을 한 손으로 내게 건네주었다. 종이는 중력을 거슬러 나를 향해 ‘날아왔다’. 그녀는 이어서 말했다. 굵은 실로 이어진 구슬들이, 서로를 향해 맹렬한 속도로 달려와 맞부딪치며 내는 소리 같았다.

“혼요미. 그것을 제인에게 전해주세요. 내일 학교에서 만나자마자 곧바로. 제인이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하네요. 이건 그녀를 위한 배려이기도 해요. 이제 용무는 끝났으니 그만 나가보는 게 어떨까요?”

“네. 그럼.”

나는 인사도 하지 않고 방을 빠져나왔다. 문이 덜커덕 하고 잠기는 소리가 뒤에서부터 들려오고, 안에서 잠기기라도 한 것처럼 문은 두 번 다시 열리지 않았다. 학생회장이 준 종이를 펴서 내용을 읽어보려고 했지만, 휘갈겨진 필적은 인간이 읽을 수 없는 글씨였다. 이를테면, ‘인간’이 읽으라고 쓴 글이 아닌 것 같았다. 나는 종이를 두 번 접어서 포켓 안에 넣은 뒤에, 학교에 두고 온 책을 들고 곧장 집으로 되돌아왔다. 오랜만에 가족 전원이 모이는 밤이었다. 제인과 종이에 대해 생각할 겨를도 없이, 침대에 누워 잠에 깊이 빠졌다.

꿈을 꾼 것 같다. 하지만 꿈의 내용은 전혀 생각나지 않는다. 교복을 입고 버클을 잠그며 나는 과거와 미래에 대해 생각했다. 오지 않은 미래를 알 수 있는 방법이 존재한다면, 나는 어떤 선택을 했을까. 과감하게 미래로 갔을까, 아니면 과거인 현재에 안주했을까. 책과 종이를 가방 속에 집어넣고,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등교길에 올랐다.

“학생회장이 무슨 말 안 했어? 안색이 별로 좋지 않아 보여, 혼요미 군.”

아침의 교실은 시끌벅적하다. 마치 시장통을 그대로 교실 안으로 옮겨온 것 같다. HR이 시작하려면 아직 10분 가량 남아 있었다. 10분은, 사랑하는 두 사람에게는 너무도 긴 시간이었다.

“제인 덕분에. 아, 책 잘 읽었어. 재밌더라, 이번에 골라준 소설도. 작가 이름이 뭐였더라? 벌써 잊어버렸네. 그리고 이거, 학생회장으로부터 받은 종이야. 열어보든 말든 맘대로 해. 별로 중요한 것도 아니니까.”

제인은 물론 종이를 열어본다. 여전히 손바닥은 마르고, 손가락은 바늘처럼 가늘고 길다. 아침 햇살 아래서 보니 더 창백해 보이는 것 같기도 하다. 제인은 종이를 뚫어져라 쳐다보다, 이내 관심이 사라졌다는 듯 그것을 구기더니 쓰레기통에 던져넣는다. 종이뭉치는 멀리 있는 학생들을 피해 아름다운 포물선을 그리며 쓰레기통으로 떨어진다. 옆에서 몇 명이 놀라는 소리가 들려온다. 아랑곳하지 않으며, 제인은 책을 받아들었다.

“작가 이름이라면 봐, 여기 적혀 있잖아. 레이먼드 카버.”

“아, 정말이네. 미안, 보기만 해도 깜빡하는 습관이 내게 있는 것 같아. 정말로 미안해.”

“아니, 혼요미가 미안해 할 건 없지. 이건 어디까지나 과거의 활자를 모아 놓은 종이다발에 지나지 않으니까. 문제는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고, 우리가 나누고 있는 말이 아닐까? 어떻게 생각해, 혼요미 군?”

나는 선생님이 오지 않나 재빨리 뒤를 돌아보았지만, 문으로부터는 아무도 들어올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쉽게 절망하는 것은 과거의 사람, 어렵게 낙관하는 것은 미래의 사람. 주문을 외듯 속으로 되풀이해서 문장을 외고, 쓰레기통을 곁눈질로 바라보며 나는 가까스로 대답한다.

“제인. 미래가 중요한 것처럼 과거도 우리에게는 중요한 것 같다. 현재는 과거와 미래로 나눠질 테니까.”

“역시. 그렇게 대답할 줄 알았어. 아, 선생님 오셨어.”

제인이 속삭이는 말에 나는 반쯤 젖힌 상체를 앞으로 되돌렸다. 제인의 말대로 — 그녀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 선생님이 교실에 들어왔고, 반장의 구호에 맞춰 모두가 밝은 목소리로 선생님을 향해 인사했다.

제인과 아침에 만나 인사를 한 바로 다음 날, 학교에서 국제올림피아드에 나가는 선배를 독려하기 위해 수업을 한 시간 쉬고 교장 선생님의 말을 듣는 시간이 마련되어 있었다. 올림피아드라니, 듣기만 해서는 대단하게 여겨지지만, 막상 그 선배는 태연한 표정을 하고 맨 앞자리에 앉아 있었다. 모두가 자랑스러워 할 만한 일이었지만, 정작 본인은 그 모든 관심과 기대와 바람과 경외를 넘어 저 높은 곳에 유유히 떠 있는 것만 같았다. 프로젝터는 넓은 화면에 대강당의 모습을 비춰주고 있었다. 교장의 지루한 연설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는 끊임없이 말했다, 쉬지도 않고. 옆을 슬쩍 보니 그녀는 여학생들 사이에 앉아서 가만히 한 곳을 응시하고 있었다. 두 손은 가만히 무릎 위에 얹은 채였다. 그녀가 무엇을, 누구를 보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교장을 보고 있지는 않다는 것만은 명확했다. 나는 휴대전화를 꺼내 그녀에게 메일을 보냈다. 저녁에 약속이 있냐는 메일이었다. 휴대전화의 진동이 느껴졌는지 그녀가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어 메일을 확인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녀가 내 쪽을 바라보아서, 나는 휴대전화를 흔들어 보였다. 그녀는 내 메일에 다만 짧게 답장했다. 성의가 느껴지는 메일이었다.

“이제 막 약속을 잡은 참이야. 저녁에 보자.”

그녀의 메일을 확인하고 나는 휴대전화를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나 말고도 휴대전화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몇 명 있어서, 그리고 그들도 별다른 제지를 받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걱정하지 않고 휴대전화를 쓸 수 있었다. 그녀와 할 일을 생각하고 있자 앞에서 교장이 연설하는 내용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 내용은 이랬다.

“OO군은 우리 XX고등학교의 명예를 드높이고 나아가 세계에서 인정받는 올림피아드에 출전하게 됨으로써 본인의 위치를 최고로 끌어올리고…”

아무래도 좋을, 시답잖은 내용이었다. 아마 연설을 듣고 있는 선배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게 틀림없었다. 나는 나보다 몇백 배나 머리가 좋을 그 선배에게 처음으로 동질감을 느꼈다. 연설은 그리고도 20분이나 더 이어져, 선배가 말을 시작했을 때는 이미 15분밖에 시간이 남지 않아 있었다. 그리고 선배는 5분만에 짧게 말을 끝냈다. 선배가 말을 끝내자 강당에 있던 모든 학생들이 박수를 쳤다. 그는 진정으로 찬사받을 만했다. 남은 10분은 교실에 돌아가서 쉬는 시간으로 활용했다. 그녀는 내 메일을 보고 놀랐다고 말했고, 나는 의외라고 답했다. 날은 흐렸지만 비가 올 낌새는 보이지 않았다. 아직 단풍나무 가지에 그리 많지 않은 단풍이 쓸쓸하게 매달려 있었다. 나는 단풍을 가리켰고, 단풍을 바라보며 그녀는 말했다.

“꼭 우리 처지 같네. 그래도 낙엽은 땅에 떨어져 흙에 섞여 자양분이 되겠지. 우리는 나중에 죽고 나면 뭐가 될까? 혼요미 군은 그런 생각, 해 본 적 없어?”

“해 본 적이 없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진지하게 고민한 적은 없어. 언제나 잘 모르겠다는 결론이 나서. 아직 어리기도 하고, 일단 살아봐야 알 수 있는 게 아닐까?”

“혼요미 군은 어른스럽게 말하네. 나와는 다르게 이미 혼요미 군은 어른이 되어버린 게 아닐까? 혼요미 군의 그림을 보고 그런 생각을 했어. 아, 이 소년은 벌써 어른의 눈을 가지고 있다고. 어른의 눈을 가지는 것, 어른이 된다는 건 그런 거야.”

“그럼 궁금한 게 어른의 눈이 뭔데? 뭘 보고 그걸 알 수 있는 걸까?”

“글쎄. 그건 다른 사람에게 물어봐도 잘 모르지 않을까. 나도 마찬가지고.”

그녀는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내 눈을 지그시, 오랜 시간을 들여서 훑어보았다. 나도 그녀의 눈을 자세히 바라볼 수 있었다. 그녀는 눈동자에 바다와 함께 하늘을 품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그녀의 눈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기분이 들었다. 그것은 아주 넓고도 깊은, 내가 알지 못하는 드넓은 세계였다.

수업이 모두 끝난 뒤에 우리는 같이 함께 저녁을 먹는 라멘집으로 향했다. 아직 맥주는 마실 수 없었지만, 식당에 사람이 없을 때는 평생 라멘만 끓여온 얼굴을 한 주인 아저씨가 우리를 위해 작은 잔에 생맥주를 담아 주었다. 그녀는 술을 마시지 않았기에 맥주를 마시는 것은 언제나 내가 되었다. 그 날도 손님은 샐러리맨 한 사람이 있었지만, 바로 먹고 나가 버려서 아저씨는 우리 앞으로 생맥주 한 잔을 탁 하고 놓아 주었다. 아저씨는 말했다.

“라멘에는 생맥주가 빠지면 섭섭하거든. 가볍게 한잔 해.”

언제나 하는 말씀이었지만, 나는 대답하는 대신 맥주잔을 들어 한 모금 깊게 들이삼켰다. 아직 맥주맛은 잘 몰랐지만, 라멘의 진득함을 맥주가 중화시켜 주는 듯했다. 그녀는 내가 맥주를 마시는 것처럼 우롱차를 마셨다. 시간은 벌써 저녁을 지나 어두운 밤이 되어 있었다. 겨울다운 긴 밤의 시작이었다.

“혼요미 군, 라멘 먹고 나서 잠시 시간을 내 줄 수 있어? 할 말이 있거든.”

“나는 딱히 상관 없지만, 왜?”

“이유는 그때 가서 말해줄게. 괜찮지?”

“그래. 제인 좋을 대로 해. 언제나처럼.”

“좋아. 고마워, 혼요미 군.”

이제는 익숙해질 법도 됐는데, 제인의 상냥한 말투는 나를 무방비하게 만든다. 다른 누구도 아닌 나에게 그런 식으로 상냥하게 말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리고 꼬박꼬박 붙이는 ‘혼요미 군’이라는 이름도, 가끔은 이게 정말로 내 이름이 맞나 싶을 정도다. 그렇다고 내 진짜 이름이 어딘가에 따로 있지는 않겠지만 말이다. 제인은 자기 몫의 라멘을 다 먹고 나를 기다렸다. 나는 맥주와 함께 라멘을 천천히 먹었다. 아직 밤이 되려면 멀었다. 나의 마지막 밤이.

제인이 나를 사람이 아무도 없는 공터로 불렀을 때, 이미 나는 그녀가 무슨 말을 하게 될지 모두 잘 알고 있었다. 잠깐만, 나는 방금 공터라고 했다. 그런데 그녀가 나를 공터가 아닌 다른 곳, 예컨대 자신의 집이나 도서관으로 불렀어도 사정은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든다. 여하간 그녀는 나를 공터로 불러들였다. 우선 그녀는 교복을 벗었다. 두터운 겨울용 교복 안에는 그녀의 내밀한 몸이 아니라 마법사들이 입을 법한 로브가 있었다. 그녀는 로브를 잡아당기며 말했다.

“안녕, 혼요미 군. 이제 내 정체를 밝혀야 할 것 같아서 이렇게 불렀어. 내 이름은 제인 이스마일이 맞아. 그리고 나는 이제 막 마법학교를 졸업하는 마법사야. 이제부터는 그냥 자연스럽게 말할게.”

그녀는 잠깐 목을 가다듬었다. 다시 입을 열었을 때, 목소리는 전혀 다른 자의 것이 되어 있었다.

“책 읽는 자여, 거기 그대로 서서 나의 말을 들으라. 그대에게 주어진 임무는 단 하나, 나의 마지막 시험의 주인공이 되는 것이다. 그대는 이제 그대가 맡은 모든 일을 마땅히 일이 그래야 하는 대로 잘 수행하였으므로, 다시 무로 돌아가 영원한 안식을 맞으라. …”

말을 마치고 그녀는 주문같아 보이는 말을 외었다. 그녀가 주문을 전부 욀 때, 나는 내 몸이 양초처럼 녹아 흘러내리는 것을 알았다. 그녀의 눈동자는 여전히 푸름을 가지고 깊고 넓었다. 녹아 내리지만 나는 그녀의 눈 속에서 평생 살아갈 것임을 직감했다. 그녀는 아름다운 두 눈으로 나를 응시했다. 나도 마지막으로 형체를 유지하는 두 눈으로 그녀를 노려보았다. 내가 녹아내림과 동시에 나를 둘러싸고 있던 세계도 함께 녹아내려, 제대로 형체를 유지한 채 버티고 서 있는 것은 오직 그녀밖에 없었다. 나는 그녀에게 감사했다. 그녀는 이제 훌륭한 마법사로 살아갈 것이다. 그리고 나는, 이제부터 나는… 마지막으로 그녀는 심지처럼 낮아진 내 머리를 짚었다. 그녀는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아주 작게 말했다.

“그대와 함께 한 모든 시간이 빛으로 가득하기를. 세상이여, 안녕.”

이윽고 빛이 사라졌다. 그녀와 함께.

Like what you read? Give alice b. a round of applause.

From a quick cheer to a standing ovation, clap to show how much you enjoyed this 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