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계인간의 최후

briand
briand
Jul 22, 2017 · 8 min read

출간된 지 40년 된 작품을 읽는다는 것은 일반적인 독서와 다른 면이 있다. 사회가 너무 빠르게 바뀌어 당시와 똑같은 독서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은 작품을 둘러싼 현실 사회, 경제적 문제를 통한 해석이 빈번하다. 이런 해석들은 근로자와 사용자의 계급적 대립관계에 중점을 둔다. 초판해설, 신판해설 모두 대립이 키워드다. 하지만 이 책은 어디까지나 허구이고 문학이다. 문학이 가진 힘은 그것이 세기와 시대, 천년을 넘어서도 독자들에게 의미를 남기는데 있다. 고전을 읽는 이유이다. 40년 전의 대립은 이제 해소되었으니까 이제 끝이라거나 대립이 아직 해소되지 않았으니 이 책을 통해 해결방안을 찾자는 식이 아니라 세대에 맞는 해설이 필요하다.

90년대를 지내면서 세기말 분위기의 디스토피아 작품들에 매료되었다. 특히 사이버펑크 작품들이었는데, 기계와 사이버공간이 인간성을 잠식하는 우울한 미래상을 그려냈다. 이제 그 시기를 거친 밀레니얼 세대가 문화예술의 주 생산자가 되었다. 음악(future funk), 비디오(vaporwave) 등 다양한 분야에서 그 시절을 미학적으로 복고(retro)하는 양식이 재등장했다. 작품에 대한 사회경제적인 분석은 지금까지 충분히 이뤄졌으니 이번엔 이러한 세대의 관점에서 이미지들을 재조명해보고자 한다.

작중에는 기계화에 대한 인상적인 묘사가 몇 있다. 「기계 도시」에서 은강이라는 거대한 도시가 떠오른다. 수험생 윤호의 머릿속에서 떠올랐지만, 상상력을 조금 발휘해보면 도시가 정말 하늘로 떠오를지도 모른다. 기계로 가득 찬, 어둡고, 무겁고, 금속의 재질이 가득한 고철덩어리 도시다. 실제 조석 때 해면이 낮아지면 은강은 떠오른다. 은강의 넓은 면적은 아라비아 숫자 대신 한글로 늘어지게 서술되어 그 숨 막히는 삭막함을 실감케 한다(159쪽). 콘크리트로 연결된 길과 건물이 떼어지면서, 역시 콘크리트로 이루어진 속살을 드러낼 것이고 혈관과 신경 역할을 하는 각종 파이프와 선이 뜯겨져 폐수를 내뿜으며 올라가리라. 검은 기계와 검은 공장, 검은 바다와 검은 공기. 도시는 검은색이다. 이 절망적인 공간이 난장이의 가족이 낙원구 행복동 다음으로 택한 보금자리이다. 공간은 방류된 독극물이 괴물을 만들 듯 이곳의 근로자들을 검은 기계로 만든다. 쇠 부스러기가 하늘에서 내린다.

은강의 기계는 압도적이다. 빈틈없는 기계는 모순으로 가득한 사회에 비해 우월하다(164쪽). 「은강 노동 가족의 생계비」의 1인칭 서술자 난장이의 큰아들은 공장의 기계에 매료되는데, 그는 본래 공부를 하겠다며 행복동 공장을 멸시하곤 했다. 이제 그는 기계들이 내뿜는 열기에 상기되고, 자동화기계에 반한다. 헤드에서 기름이 흘러내리는 것을 영수는 땀으로 여긴다. 기계가 흘린 땀은 혹 다른 것일 수도 있다. 그는 가난해서 명희에게 거절당했었고, 이후로 이성은커녕 가족을 벗어난 관계조차 맺지 못했다. 그럼에도 형제는 공장에서 기계를 보조하는 역할에 불과하다. 선망하던 일보다 못한 업무를 맡고 그마저도 기계에 끌려 다닌다. 기계의 일정한 리듬에 그들을 맞춰야 했다. 기계는 쉬지 않으므로 그들도 쉬지 못한다. 기계가 24시간 돌아가면 작업자들도 24시간 돌아가며 쉼 없이 근무한다.

은강에서 인간은 기계가 된다. 영희는 기계마냥 일분에백이십걸음 한시간에칠천이백걸음을 정확히 걸어야 한다. 「클라인씨의 병」에서 영수는 어머니와 대화에서 인간다운 삶을 간절히 바란다. 사는 모습이 인간보다는 기계이기 때문이다. 목사는 공원들 스스로가 생산자임을 자각하지 못함을 지적한다. 노동의 결과를 알지 못하는 그들은 기계 부품에 다름없다. 꿈을 못 이룬 공장 과학자의 목에서 쇳소리가 난다. 하이라이트는 영수가 더러운 바다에서 헤엄치는 장면이다. 이보다 더 검을 수 없는 폐기름이 영수의 목까지 온몸을 감싸는 시각적 이미지가 강렬하게 제시된다. 닦아도 피부에는 찌꺼기가 남아있다. 헛구역질로 아주 소량의 기름을 게워낼 뿐이다. 기계는 영수의 몸을 덮는다. 시커메진 사람들은 눈이 먼 채 출근한다. 노사협의 회의장에서 영수가 입을 댄 유리잔에 기계기름이 묻어 나온다. 난장이가 무기물로 생명을 잃듯 그의 큰아들은 기계가 되어 이성을 잃는다(167쪽). 다만 영수는 자조적으로 꿈을 먹고 죽은 아버지와 달리 기름이 삼킨 자신의 육신을 희생한다. 김영수와 한지섭은 암울한 시대에 종교적인 인물로 그려진다.

기계적 속성은 서술 형태에서도 드러난다. 각 단편의 화자가 자주 변하며 시점이 다양하다. 시간의 연속성이 깨진다. 한 명의 화자가 직접 얘기하거나 그 화자를 따라가는 시선이 존재한다면 인간적이겠지만 작품의 다양한 화자 사이를 무심하게 오가며 영화의 교차편집처럼 시간과 시점을 넘나드는 형식은 기계적인 가공과 개입을 느끼게 한다. 필름은 기계로 편집한다. 짧은 문장들은 무심하면서 냉정한 금속성을 가진다. 특정 이미지는 기계적으로 반복된다. 난장이 가족의 유일한 식사라도 되는 듯 등장하는 보리밥과 감자는 마치 기계에 주입하는 연료 같다.

가장 주인공에 가까운 영수를 기름이 집어삼켰지만 기계화에 대항하는 인간성의 발버둥이 없진 않다. 감각적인 묘사가 두드러지는데 앞서 검은색의 이미지가 강렬했다면 다른 색채들이 대비되는 속성으로서 제시된다. 자살을 결심한 윤호에게 은희가 찾아온 날 흰 눈이 내린다. 윤호가 처음 만난 경애는 상하의 모두 흰색이다. 둘은 모순된 세상에서 윤호를 안아주는 유이한 인물들이다. 은희-윤호-경애로 이어지는 구조가 있다. 은희가 윤호를 안았을 때 그는 아직 자신의 죄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가 경애를 안을 때 둘은 ‘기계 아닌 인간’의 죄를 깨닫는다. 그 죄란 은강에서, 지금 이 세상에서 기름을 먹으며 기계가 되는 자들이 있을 때, 자기들만 고고히 사람의 가죽을 유지하는 것이다. 흰색은 이상이다. 회의에 참석한 영이가 입은 흰 원피스 흰 구두의 활력은 기름에 찌든 영수와 대비되어 마치 다크나이트와 백기사의 인상을 주지만, 흰색 원피스는 곧바로 더럽혀지고 영이는 힘을 잃는다. 이상적인 흰색은 쉽게 더러워진다. 그래서 경애는 다음날 검은 옷을 입는다. 기계가 되는 이들에 대한 공감이다. 이에 윤호는 결혼을 결심한다. 사람의 눈물을 잃지 않는 영희는 영이에게 진보라색 꽃을 달아준다. 클라인씨의 병이 안팎이 따로 없듯 이들에게 기계세상을 헤쳐 나가는 해결은 결코 흑백으로 나눌 수 있는 이분법적인 것이 아니다. 붉은색도 생명력을 강렬하게 보여주는데, 난장이를 보호하는 신애의 생선 칼에 묻은 피, 기계는 때려야 작동한다는 듯이 감독이 옷핀으로 영희의 팔을 찔렀을 때 작업복에 번진 피는, 그들 자신이 기계가 아니라고 외친다. 윤호가 가는 음침한 호텔의 빨간 주단은 음울한 사회의 뒷골목을 보여주는 듯해 시각적으로 인상적이다. 미래를 배경으로 한 펑크 장르 작품에서 자주 등장하는 이미지가 신기하다.

생명력은 인간 육체가 강하게 내뿜는다. 차가운 눈이 내리던 날 은희는 알몸으로 윤호를 안았다. 경애는 고문모의에서 독자에게 알몸을 내보인다. 속에서는 뜨거운 것이 북받친다. 다시 은희를 안을 때 윤호는 구체적인 행동방안을 생각한다. 흰색의 이미지와 포개어져 구원, 정화, 희생의 이미지가 다소 고루하게 내비친다. 그런데 육체란 윤호의 누나와 다른 여자아이들처럼 착취당하거나 죄를 지을 소지가 있다. 셀 모임에서 마리아상을 앞에 두고 남녀 아이들이 상의탈의하고 춤을 추는 장면에서 성과 생명의 이미지는 그래서 묘하다. 그들은 어린 활력을 양껏, 원시적으로 드러내 보인다. 실은 고2 17세 소년소녀가 모여 십대 공원을 주제로 토의하고, 먹고 마실 때도 술 대신 우유를 준비했으니 순수한 면모가 있다. 그들은 경애가 윤호를 끌어들였던 것처럼 자신의 욕구를 위해 죄도 짓고 쉽게 싫증을 낸다. 자극만을 추구하는 이들은 공원들이 겉으로, 피부로 기계를 받아들일 때 속으로 차가운 금속성을 드러냈던, 미라가 되길 원한 경애의 할아버지처럼 되려고 한다. 육체의 이러한 양면성은 경훈에게 농락당하는 여성들에게서 그 취약한 속성을 다시 드러내는 동시에, 가능한 다른 미래를 암시한다. 여자아이는 경훈의 손끝에서 달아올라 ‘파르르 떨었고,’ 난장이 큰아들은 기계에 압도되어 ‘파르르 떨었었다.’ 여자아이와 영수는 파괴적인 존재 앞에서 똑같이 무기력하게 흔들렸지만, 차이점이 있다면 기계는 앞으로도 계속 상대를 떨게 할 것인데 반해 경훈은 여자아이의 육체에서 생명의 젖줄을 새삼 놀라며 깨달은 것이다. 경훈은 여자아이와 공원들과 지섭과 아버지의 사랑을 생각했다. 육체가 발산하는 생명력은 사랑을 갈구하며 비뚤어진 이들의 내면을 자극했다. 기계를 운용하는 기계적인 인간들에게 가능성을 내포한다. 물론 경훈은 가능성을 외면했다.

문학은 시대를 초월한다. 이 작품은 시대를 비판한 사회적인 소설인 동시에 허구로서도 오늘날에도 충분히 통하는 영상의 이미지를 선명하게 발산한다. 설령 한국의 땅에서 70년대와 같은 생존의 문제가 어느 정도 극복되었다 하더라도 여전히, 그리고 약간 다른 방식으로 읽을 수 있다. 하지만 시대와 시간을 초월하는 것은 문학성만이 아니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에서 제시된 현실사회문제와 대립의 세계는 그것이 특정시대에 국한되지 않고 앞으로 계속될 것임을 드러낸다. 교차편집적인 서술은 시간을 뒤섞어 이를 초월해버렸다. 난장이의 열 개가 넘는 쇠 공구 세트는 아들딸 대에 이르러 기계로 전습된다. 목사는 공원들이 기계가 지배하는 공장에서 일하는 최초의 세대임을 지적했다(211쪽). 그들은 기계세대다. 기계는 사람의 도움이 필요하지만 그게 일방적, 절대적이지 않다는 점에서 난장이의 공구와 다르다. 전 세대를 죽인 파괴적인 새 시대 속에서 윤호와 난장이의 큰아들과 경훈은 기계와 인간 중 선택할 수 있었다. 인간성과 기계성은 안팎에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둘 중 하나에 구속되어 갇히는 것도 아니다(228쪽). 이 세계를 아직 대립으로 해석하고 있다면 40년이 지난 지금이 과연 ‘선택 가능한’ 시대인지 궁금하다. 어쩌면 예술이 선명한 이미지를 통해 과거의 현재를 그리며 미래를 예언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갈 수 없는 별들을 떠올리게 한 기타 소리처럼 말이다. 기타는 최후의 시장에서 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