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들리다

눈을 떴을 때 흔들리는게 눈 앞에 놓인 술병인지 이 집 전체인지 승환은 가늠하기 어려웠다. 동이 틀 시간이 되었지만 밖은 여전히 어두웠다. 집 안은 따뜻해도 어딘가 한기가 느껴졌다. 승환은 거실 소파에 누워 있었다. 비틀거리며 상체를 겨우 일으키고야 약한 지진이 있었음을 알았다. 승환과 빛나에게는 시너지를 일으키는 각자의 인테리어관이 있는데 벽에 못질하지 않는 것, 그리고 불필요한 장식을 들이지 않는 것이다. 새로 칠한 하얀 벽에 상처를 내면 아무래도 그렇지, 빛나는 말했다. 승환은 아무렴 싶었다. 그저 먼지 쌓인 잡동사니를 털고 닦을 일만 없었으면. 그래서 이 집엔 떨어질만한게 없다. 돌이켜보면 둘은 늘 충돌을 피했다. 서로 의도하지 않았는데 부딪힐 일이 없었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그의 입에서 절로 욕이 나왔다. 이유를 몰랐다. 지진은 그들의 집에 생채기 하나 남기지 못하리라. 지랄맞게 현명했군, 승환은 자꾸 본의 아닌 말을 뱉었다. 지랄맞아 아주.

자리에서 일어나며 승환은 다소의 빈혈기를 느꼈다. 잠시 머리에 퓨즈가 나가더니 몸의 균형이 흔들렸다. 키는 작아도 다부진 그의 몸은 그러나 쉽게 굴복하지 않았다. 발이 시려워 보니 덮고 있던 짧은 담요는 빛나의 것이었다. 그들은 캘리포니아로 이사 오며 각자의 물건을 따로 구비했다. 공동으로 쓰는 물건은 반반 부담하거나 비슷한 다른 물건을 마련하는 식이었다. 동부에서 빛나가 대학을 마치고 승환이 이 곳의 정보기술 업체에서 일을 구하며 둘은 해변가의 하얀 집을 구했다. 주인 집에 딸린 차고를 방 몇개와 결합 개조해 세를 낸 집이었다. 승환과 빛나는 합리적이고 독립적인 둘의 관계가 너무 이상적이어서 이상하다고 웃곤 했다. 둘은 하얀 집에서 살았다. 승환이 취업비자를 연장하지 못하기 전까지의 이야기다. 모든 것은 그 때부터 시작되었다고 승환은 생각한다.

승환은 위스키병을 집었다 도로 내려놓는다. 술 말고 단게 먹고 싶었다. 두 개 남은 허쉬초콜릿을 집었다. 금박지를 벗겨 입에 넣고 오물거리자 드디어 집 안을 가득 메우던 정적을 치웠다. 집 안팎은 무척 고요했다. 빛나는 말수가 적은 승환을 힐난하곤 했다. 물론 실직한 이후의 이야기다. 그럼에도 승환은 자신이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굳게 믿어 의심치 않았다. 말이 아닌 행동으로 보여주는게 승환의 소명이었다. 중소 매니지먼트사에서 일하는 빛나의 수입만으론 세를 감당하지 못했다. 승환은 아직 하얀 집을 버릴 때가 아니라고 여겼다. 지난 수개월간 승환은 그러나 어떤 것도 증명해 보이지 못했고 말은 아예 하지 않았다. 그는 끝에 다다름을 느꼈고, 빛나는 오늘밤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단 걸 먹었으니 이제 술을 먹자, 승환은 위스키를 잔에 따랐다. 발이 시려우니 얼음은 넣지 않았다. 물을 섞는 건 쪽바리나 하는 짓이야, 그는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지 못했다. 집, 빛나, 미국. 모두가 그를 괴롭게 했다. 그가 가진 전부이며 동시에 갖지 못한 것들이었다. 날이 밝아지지 않았으면 했다. 밖은 여전히 어두웠다. 지진이 멈추지 않았으면 바랐고, 빛나가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지 않길 했다. 모든게 멈추었으면. 지금 상태 이대로, 아직 아무 것도 잃지 않은채로.

그 순간 지진을 느꼈다. 아까완 달랐다. 승환의 몸이 힘없이 좌우로 말을 듣지 않았다. 이 집에 떨어질 물건은 없다. 손에서 놓친 술잔도 깨지지 않았다. 승환은 대리석으로 마감한 바닥에 무릎을 꿇으며 쓰러졌다. 숨이 차올랐지만 무릎은 깨지지 않은 듯 했다. 현관쪽 암막커튼 뒤로 오렌지색이 가득차 있었다. 승환은 커튼이 쳐진 줄조차 몰랐다. 세상은 한순간 조용했다가 새벽부터 나서는 온갖 차소리에 진동했다. 하늘엔 열대과일이 어둠을 찢고 나왔다.

승환은 몸을 일으켰다. 몸이 가벼웠다. 승환은 시원한 공기를 맞고 있다. 그는 침실로 갔다. 이불 안은 따뜻했다. 얼은 발을 녹이고 싶었다. 이불 속에서 잠든 빛나의 온기를 느낄 수 있었다. 새벽이 지나 아침이 오고 승환은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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