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숙 선생님

이따금, 아니 사실 많이 생각나는 선생님이 계신다. 12살, 초등학교 5학년 담임 이민숙 선생님이다. 선생님이 첫날 “피아노 반주할 줄 아는 사람?!”이라고 물어서 일단 손을 어깨까지만 들고

“아…곡 몇 개는 칠 줄 아는데 다른 건 칠 줄 몰라요…”

라고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랬더니 선생님은 날카롭고 알맹이 있는 목소리로 “그럼 할줄 아는 거지 뭐 길게 말해” 하셨다.

그때 바짝 쫄았고 무서웠는데 왠지 마음의 고삐랄까 그런 게 하나 풀린 느낌이었다. 이민숙 선생님이 선생님의 목소리로, 말투로 말했기 때문에 그랬다. 나도 저렇게 되고 싶다는 생각도 했고.

친해지고 싶어서 선생님한테 들이댔다. 그때부터 선생님이 뭔갈 많이 물어보셨다. 한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는 질문들이었고 몇 개는 이상했다.

“혜림아 나뭇잎이 왜 초록색으로 변할까? 왜 빨간색, 노란색으로 변할까?”
“혜림아 밤섬에 철새 모이주러 가봤니?”
“혜림아 TV로 자동차 바퀴 굴러가는 거 보면 왜 거꾸로 돌아가는 것처럼 보일까?”
“혜림아 데미안 읽어봤니?”

아아, 다 모르는 거여서 질문하실 때마다 무서웠다. 근데 재밌었다. 너무 재밌었고 무서웠고 행복했다.

나뭇잎의 색소는 계절마다 변했다. 클로로필 다음엔 안토시안, 초록색 다음은 빨간색이 됐다. 그 계절 동안 데미안을 읽었다.

데미안은 성경의 카인이라는 인물을 ‘살인자’로만 규정하지 않고 인류를 한 단계 도약시킨 사람이라고 말했다. 나는 싱클레어만큼이나 충격을 받았다. 책을 덮을 수도 있었지만 어느 새 내 손은 책장을 넘기고 있었다. 이제 싱클레어에게 카인은 데미안일 것이고, 세상은 온통 데미안일 것이었다. 싱클레어의 새는 언제나 알을 깬다. 원하는 대로 살고 싶지만, 언제나 그것은 그토록 힘든 일일 것이다. 이건 나뭇잎 색이 변하는 것과 너무나도 다른 일이었다. 같으면 좋으련만.

마지막에 싱클레어는 환상 같은 걸 보는데, 여지없이 데미안이 나온다. 싱클레어는 죽는 순간까지 데미안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이건 나뭇잎 색이 변하는 것과 같았다. 불행히도.

이민숙 선생님과 그해 겨울 밤섬에 철새 모이를 주러 갔다. 이후론 가지 않았다. 선생님도 중학교 올라가서 쫌 뵙다가 어느순간 연락이 끊겼다. 두고두고 마음 아프다. 장성초등학교 다니셨는데 정말, 아시는 분 없나요ㅠㅠ 뵙고 싶어요 선생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