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디자이너는 ‘미녀’일 필요가 없다.

Yujiin
12 min readAug 19,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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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전에 일민미술관에서 들었던 박해천 선생님의 강의 중 특히 디자인계의 성비불균형 현상에 대해 미디엄에 글을 정리해 쓴 적이 있다. 대학교 강의실에만 들어가면 학생 대부분이 여자인데, 이름을 날리는 디자이너나 회사에서 직급이 높은 디자이너는 대부분 남자인 상황은 지극히 비정상적이면서도 한국에선 너무나 익숙한 광경이다. 해마다 수많은 여성 졸업생들이 사회로 쏟아져 나오는데, 사회적으로 성공한 여성 디자이너 롤모델은 눈을 비비고 찾아봐도 찾기가 힘들다.

학교의 세미나 수업에 초대되어 본인의 작업을 소개하고 학생들에게 조언을 해주는 선배 디자이너들은 올해에도 작년에도 대다수가 남자였다. 졸업앨범에서 펼쳐본 시각디자인과 교수 소개 페이지에서도 여성 교수의 모습을 찾기가 어려웠다. 때문에 나는 언제나, 그 분들과 비슷한 나이가 되었을 때의 내 모습을 상상하기가 어려웠다. 이것은 곧 졸업을 앞둔 4학년 여성 학부생인 나라는 개인이 맞닥뜨린 문제이기도 하며, 한국 디자인 업계가 인력을 얼마나 비효율적이고 비인간적으로 다루고있는지에 대한 문제이기도 하다.

그러던 중 <디자인 평론>이라는 책에 실린, 디자인계의 성비불균형 현상에 대해 이야기 한 ‘미녀 디자이너’라는 제목의 글을 보았다. 최근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던 주제이기에 관심을 가지고 읽었으나, 오히려 해당 글의 둔감한 젠더 의식에 놀라고 말았다. ‘대학교에 그리도 많던 디자인과의 여학생들은 왜 필드에 나가면 사라질까?’라는 질문에 대해 대답하려는 본 글이 내세우는 근거가 아이러니하게도 대단히 성차별적이었기 때문이다. 아직 본 글에 대해 지적하는 글을 읽은 기억이 없기에, 일종의 리뷰이자 비판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본 글은 필자가 두 명(이지원/윤여경)으로, 각각 지면을 절반으로 나누어 한 사람은 검은배경의 윗부분에, 한 사람은 하얀배경의 아랫부분에 자신의 글을 이어나가는 형식이다. 두 글은 같은 문장으로 시작한다 — 두 사람은 남자이지만 이름 때문에 ‘예쁜 여자’일 것이라 기대를 받지만, 자신이 남자인 걸 알게 된 사람들은 언제나 실망을 한다는.

“윤여경은 여자로 오해받는다. 하지만 그는 중년의 남자다. 그를 간접적으로 알다가 처음으로 대면하는 사람은 적잖은 충격에 빠진다. (…)보도국 사람들이 기대했던 늘씬한 미녀 디자이너는 없었다.” (윤)

“이지원은 여자로 오해받는다. 하지만 그는 중년의 남자다. 그를 간접적으로 알다가 처음으로 대면하는 사람은 적잖이 어색해 한다. (…)사람들은 ‘디자이너’하면 먼저 ‘여자’를 떠올린다. 그것도 예쁜 여자를 상상한다.” (이)

정말로 많은 사람들이 디자이너 하면 제일 먼저 예쁜 여자를 상상하는가? 또 정말로 일터에서 만난 남성들은 (자신의 동료가 될) 신입 디자이너가 매우 예쁠 것이라고 기대했다가, 아니면 실망하는가? 두 명의 필자가 단언하듯 두 명제가 모두 사실이라면, 그것은 농담따먹기의 소재가 아니라 심각하게 지적해야할 성차별적인 시각이리라. 필자가 쓰고있는 글이 업계의 비정상적인 성비 불균형에 대해 다루는 글이라면 더더욱 말이다. 만약 어떤 회사의 신입 디자이너가 남성이었다면, 그들은 그가 미남일 것이라고 멋대로 추측했다가 멋대로 실망했을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사람들은 남성 디자이너에게 ‘잘 가꾼 외모’로 ‘사무실의 꽃’이 되어줄 것을 기대하지 않으니까. 그렇지만 본 글을 이런 문제를 ‘위트있는’ 소재로 사용할 뿐, 문제라고 지적할 생각이 없어보인다.

또한 두 글쓴이는 성비불균형 현상에 대한 글을 쓰면서, 각 성별의 stereotypical한 단어를 쓰는 것을 서슴치 않는다. 아니, 오히려 글 거의 전부가 그런 스테레오 타입으로 뒤덮여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글쓴이는 남성의 디자인은 논리적이고 진지하지만, 여성의 디자인은 감성적이고 비효율적이라고 한치의 망설임 없이 단언한다.

내가 알고싶은 것은 늘어나는 여성 디자이너가 과연 여성의 본성이자 장점인 여성성을 발휘하는 디자인을 할 수 있는지의 여부다. 모든 그래픽 디자이너가 여성이라 한들, 그들이 지난 100년과 다를 바 없이 남성적 디자인을 고스란히 계승한다면, 성비의 변화 따위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이)

디자이너는 문제를 해결하는 전문가 행세를 한다. 문제와 해결. 목적 중심적 사고. 합리와 효율. 단일성과 명확성. 그렇다. 디자인은 남성성을 요구하는 분야다. (이)

모순과 방황을 만끽하는 인간 본연의 면모를 반영하고자 디자이너는 이제 비즈니스 세계의 디자인 전문가의 가면을 벗고 디자인의 여성성을 추구해봄 직하다. (이)

프로세스, 즉, 과정을 중요시하는 자세는 목표지향주의를 벗어난다는 면에서 디자인의 여성성을 발굴하는 데 있어 큰 도움이 된다. (이)

중요한 것은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디자인이 필요한 만큼, 감성적이고 비효율적인 디자인이 필요한 곳도 넘처난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다. (…) 디자인학과 강의실 문을 열어보라. 미녀 디자이너가 넘쳐난다. 그들이 디자인을 통해 펼칠 아름다운 여성성을 기대해보자. (이)

생산사회의 디자인은 제품 그 자체가 디자인이다. 제조업 중심의 공장문화는 조직적인 남성 중심 문화이다. 서로간의 열정과 유대감이 중요하면서도 안정을 추구한다. 효율적인 대량생산을 위해서는 장식이 적고 단순한 안정된 형태가 유리했다. (…) 이런 디자인은 확실히 남성적인 느낌을 준다. (윤)

반면 소비사회 디자인은 서비스업 중심의 백화점 문화이다. (…) 익숙함보다는 이미지 개선을 위한 새로움이 선호된다. 그래서 남성적 디자인에 비해 장식적이다. 이런 디자인은 여성적인 느낌을 준다. (윤)

남자들이 자신의 기준으로 만든 남성적 디자인진지한 맛이 있지만 여성적인 발랄함이 떨어진다. (윤)

미술, 혹은 디자인 작업에 대해 이야기할 때 ‘남성적’ 혹은 ‘여성적’이라는 수식을 관습적으로 사용한다는 것은 어느정도 이해한다고 치더라도, 본 글은 성별을 지칭하는 수식어를 너무나도 빈번하고 확장적인 의미로 사용한다. 나는 인터넷과 책에서 수많은 디자인 작업물들을 봐왔지만, 그것이 어떤 특정 성별의 디자이너의 작업이라고 추측한 적도 없으며, 그럴 필요를 느끼지도 못했다. 설상 내가 그러고 싶더라도 작업만을 보고 디자이너의 성별을 추측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왜냐하면 21세기에는 (물론 이전 어느시대에서도 그러지 않았지만) 여성 디자이너라고 모두 산뜻한 색상 위에 공예적 장식을 더한 ‘비효율적이지만 감성적인’ 디자인만을 하거나 남성 디자이너라고 흑백에 볼드한 고딕체를 사용한 ‘논리적이고 진지한’ 디자인만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애초에 ‘우아하고 장식적인’ 디자인이나 ‘논리적이고 진지한’ 디자인이나, 모두 여성이 세상에 나설 수 없던 시절 남성에 의해 고안된 스타일 아니었던가? ‘디자인 평론지’에서 이러한 묵고 묵은 스테레오 타입에 대한 믿음에 기반해 글을 풀어나가는 것은 매우 문제적이다. 또한 글쓴이들은 ‘전문가적인 디자인’의 대척점에 ‘여성적인 디자인’을 놓음으로써 여성성을 비전문적인 것으로 묘사하며, ‘여성적 디자인’의 의의를 남성적인 디자인계에 변화를 가져다줄 신화적 존재로 묘사한다. 여성 디자이너가 하는 디자인도, 놀랍게도 남성 디자이너가 하는 디자인과 전혀 다를바가 없는데 말이다.

우선 디자인 노동이 육체노동보다는 정신노동으로 변한 탓인 듯 하다. 이제 디자인에서의 남녀의 신체적 차이는 의미가 없어졌고 누구나 아이디어와 구현 능력만 있다면 재능을 발휘할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되었다. (윤)

장비가 간편하기 때문에 여자들은 재택근무를 하면서 육아와 가정생활을 병행할 수 있다. 또 전문직이기에 실력만 된다면 단절된 경력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디자인은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의지만 있다면 언제든 할 수 있는 작업이 되었다. (윤)

소비사회에서는 여성들의 소비가 급상승하면서 여성들의 기호가 중요해졌다. 이제 디자인은 남자들만이 아니라 점차 여성의 취향에도 부합해야만 한다. (…) 여자들은 남자들에 비해 여성성이 높기 때문에 시장에서 성공할 확률이 높다. 이런 사회적 흐름이 여자를 디자인 직종으로 더 많이 지원하도록 유도했다는 생각이다. (윤)

이에 편승해 여자 디자이너가 점점 더 많아지고 있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남자 디자이너가 귀하다. 절대적 수가 적기 때문에 남자 디자이너가 취업이 더 잘된다. (…) 이런 자연적인 흐름 탓에 여자는 남자보다 더 많은 경쟁을 해야 한다. 역설적으로 이런 상황은 여자 디자이너의 실력을 더 키우는 계기가 된다. (윤)

‘여성들은 왜 디자인계에 몰리게 되었을까’라는 질문에 대한 한 필자의 대답은 ‘예전과 달리 식자를 할 때 몸을 크게 쓰지 않고 컴퓨터만 두드리면 되기 때문’이며, 다른 필자의 대답은 ‘생산사회에서 소비사회로 전환되면서 디자인은 남성적인 것에서 여성적인 것으로 변화한 것’이기 때문이라고 답한다.한국 사회에서 여성 디자이너를 찾아보기 어려운 것이 정말 저런 이유 때문일까? 개인적으로는 별로 설득력 있게 느껴지지 않는다. 특히나 재택근무가 간편하고 경력이 단절되어도 복귀가 쉽다는 말은 너무나도 현실과 동떨어진 말처럼 들린다. 결혼 후 직장을 그만두고 재택근무를 하더라도 그것은 알바몬류의 사이트에서 찾을 수 있는, 한 장에 3–5000원의 푼돈밖에 받지 못하는 쇼핑몰 이미지 편집이 대부분이다. 얼마 전 vingle에는 결혼으로 인한 경력단절 후 다시 일은 찾은 여성 편집디자이너가 이러한 현실을 한탄하는 글을 올리기도 했다. (https://www.vingle.net/posts/1586332-%EC%A0%80%EB%8A%94-%ED%8E%B8%EC%A7%91%EB%94%94%EC%9E%90%EC%9D%B4%EB%84%88%EC%9E%85%EB%8B%88%EB%8B%A4)

비단 디자인업계가 아니더라도 여성과 남성의 부당한 임금격차와 결혼/임신으로 인한 경력단절이 한국에서 얼마나 심한지 보여주는 자료는 널리고 널렸다. 2016년의 디자인회사에서도 말단사원은 여초인 반면 높은 직급으로 올라갈수록 여자를 찾아보기 힘든 상황인데, 이 공고한 유리천장이 그 때는 시멘트처럼 단단했을 것이란 걸 어렵지않게 추측할 수 있다. 이전과 달리 딸들도 아들과 똑같이 교육시키는 시대가 오면서 여학생의 대학진학률이 높아진 것일뿐, 실제 필드에서의 유리천장은 여전한 것이다. 이리도 간단하고 명료한 현실을 굳이 ‘장비의 발전’과 ‘시장에서 여성의 소비력 강화’ 등을 끌고 와 어지러이 수식하는 것은, 필드에서 살아남기 위해 애쓰고 있는 여성 디자이너들에 대한 기만처럼 느껴진다. 특히 ‘남자 디자이너 선호가 여성 디자이너의 실력을 더 키우는 동기가 된다’는 부분은 더더욱. 특정 전공에서 절대적 수가 적은 쪽이 유리하다는게 당연한 명제인가? 남초인 공대의 취업시장에서 여학생은 환영받지 못하지만, 여초인 디자인대학의 취업시장에서 남학생이 환영 받는다는 사실은 누구나 안다. 젠더권력을 이야기하지 않고는 다룰 수 없는 소재를 다루면서도 그 젠더격차에 대해 절대로 언급하지 않는 것은, 중립이 아니라 비겁한 태도이며, 문제의 핵심에서 비껴나감으로써 글이 설득력을 잃게 만든다.

이런 상황에서 여자 디자이너들에게 한 가지 당부해 두고 싶은 말이 있다. 디자인에서 ‘미녀’란 예쁜 얼굴이나 몸매가 아니다. 클라이언트는 처음에 얼굴 예쁜 디자이너를 좋아할지도 모르지만 좋은 디자인에 예쁜 얼굴과 몸매는 아무런 쓸모가 없다. 일이 거듭될수록 클라이언트는 예쁜 디자이너보다 실력 좋은 디자이너와 일하고 싶어 한다는 사실을 결코 간과해서는 안된다. 즉 실력 좋은 여자 디자이너가 바로 ‘진짜 미녀 디자이너’다. (윤)

위의 문장은 본 글의 마지막 문단이다. 외모가 아닌 내면을 가꾸는 진짜와 가짜 미녀의 구분(개념녀), 일적으로 만난 상대의 외모를 함부로 평가할 권한이 자신에게 없다는 사실을 한번도 생각해보지 않은 듯한 ‘예쁜’ 타령(대상화), 당부해두겠는데 외모로 자만하지 말고 진짜 미녀가 되기 위해 내면을 가꾸라는 맨스플레인까지, 사캐즘이라고 믿고싶을 정도로 성차별적인 내용으로 차있다. 사람들은 남성 디자이너 일반에게도 ‘진짜 미남 디자이너’가 되라고, 물론 잘생기면 좋지만 외모만 꾸미지 말고 실력을 다듬으라는 조언을 할까? 여성이 남성으로, 미녀가 미남으로 바뀌었다는 것만으로도 문장에서 어색함이 느껴진다면, 그것이 바로 여성 일반에게 ‘아름다움’이란 것이 얼마나 무차별적으로 그리고 무맥락적으로 강요되어왔는지를 드러내는 것이리라. 실력 좋은 남성 디자이너가 ‘미남 디자이너’가 아니듯 실력 좋은 여성 디자이너는 그냥 실력이 좋은 디자이너일뿐이다. 그녀가 외모를 가꾸든 가꾸지 않든, 그것은 그녀의 자유이고 그녀의 디자인 실력과 하등 상관이 없으며, 그것을 일적으로 만난 상대가 함부로 판단할 이유도 전혀 없는 것이다. 본 문장은 글쓴이야말로 여성 디자이너를 여성인 ‘디자이너’가 아닌 ‘여성’인 디자이너로 보고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또 그로 인해 아이러니하게도, 디자이너가 아닌 ‘여성’에 방점이 찍혀진 여성 디자이너들이 일상에서 겪는 차별적 시선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공교롭게도 책에 참여한 글쓴이 중 한 명을 제외한 모두가 남성이며, ‘미녀 디자이너’라는 제목의 글을 쓴 두 사람 또한 모두 남성이다. 대부분이 남성필자로 이루어진 디자인 평론집에서 — 디자인계의 성비불균형에 대한 글을 — 이미 그것을 온몸으로 겪은 필드의 여성 디자이너들이 넘쳐남에도 불구하고 — 두 명의 남성필자가 썼다는 상황이, 디자인계의 불균형 상황 자체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봐도 무방하겠다.

적어도 <디자인 평론>에 실린 글들 중에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한국 디자인의 현실을 다루지 않는 것은 하나도 없다고 자신한다. 이 점에서부터 기존의 한국 디자인 담론과는 분명히 성격을 달리함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현실에 기반하지 않은 비평은 비평이 아니라 언어유희가 될 수밖에 없다.

<디자인 평론>은 ‘한국 디자인의 현실’을 다루겠다고 서론에서 선언했으나, 책이 쓰여지고 검토되고 출판되는 과정에서 본 글에 아무도 문제를 느끼지 못했다는 점은 매우 실망스럽다. 디자인계의 성비불균형과 유리천장 문제, 그리고 갓 졸업한 여성 디자이너들이 낮은 봉급으로 일하다가 결혼해 그만두고 그 자리가 또 다른 여성 디자이너-대체재로 채워지는 현상은 비단 여성 디자이너 당사자들뿐만 아니라 디자인계 전체의 문제다. 정말로 젠더문제와 관련해 ‘한국 디자인의 현실’을 다루고 싶었다면 다룰 수 있는, 그리고 다루어져야 하는 문제들은 얼마든지 있다. 곧 대학을 졸업하는 여성 디자이너로서 나는 나의 성별이 내 정체성을 대변하기를 바라지 않는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외모가 아닌 내면을 가꾸는’ 가상의 개념녀 여성 디자이너가 아니다. 여성 디자이너가 ‘미녀 디자이너’일 필요가 없는, 여성이란 성별로 한 디자이너의 정체성을 함부로 판단하지 않는 사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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