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신의 시대
의미, 과정, 변화 등 추상적이지만 가치있다고 여기는 것을 따르며 일하고 생활하는 삶을 살고 있다. 때문에 조직의 차원에서든, 개인의 차원에서든 그 가치를 ‘발신’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게 여겨진다. 얼마 전, 이 ‘발신’이라는 단어를 새롭게 배웠는데, 어쩐지 그 단어를 읊조릴 때마다 이 시대의 외로움이 느껴진다.
팩시밀리에서 보았던 그 단어, ‘발신’. 문서를 넣고, 수신인의 번호를 누르고, ‘발신’ 단추를 누르면, 팩시밀리는 동일한 문서를 아래로 토해낸다. 어린 나이에 나는 그 팩시밀리를 보며, 과연 저 너머에 누가 있긴 한건지, 그들은 무엇을 받게 되는건지 궁금했었다. 발신이란 단어는 꼭 그렇다. 받는 이가 보이지 않는, 그들이 과연 무엇을 받을지조차 가늠할 수 없는, 가시화되지 않는 신호 체계에 갇힌 세계. 요새는 나의 일상이 그런 세계에 발을 붙이기는 커녕 둥둥 떠 있는 것만 같아 답답하고 외로울 때가 있다.
‘발신’의 반대편에 서서 ‘수신’하고 있는 이들은 진짜 존재할까? 거기 있다고 믿고 있는 수신인들도 사실은 그냥 ‘발신’만 하다 어쩌다 나의 발신의 주파수를 건드린 이들은 아닐까? 그런 생각이 끊임없이 이어지다보면 내가 살고 있는 삶이 무미하게 느껴져 견딜 수가 없다. 과연 이 행위와 일상이 어딘가에 맺혀 꽃을 피우기는 하는건지. 10억짜리 아파트로, 엄청난 스펙으로 맺혀질 가능성이 전무한 것은 분명한데, 이것들은 도대체 어디에 수렴하여 훗날 나에게 어떤 응답을 주려는 건지. 궁금해 미치겠다.
누군가 나에게 우직하게 시간의 힘을 믿어 보라고 말했다. 그 말은 큰 위로였다. 요 몇 년간 들었던 위로 중에 단연 으뜸인 위로였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나는 한편 갸우뚱거릴 수 밖에 없었다. 나는 그만큼의 시간의 힘을 믿을 위인이 되지 못한다. 인내심이 없다는 사실은 스스로가 너무 잘 안다. 때문에 시간의 힘을 믿어 보라는 위로와 조언은 너무도 감사했지만, 한편으로는 좌약같은 나의 조바심을 달래는데 큰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발신의 시대, 나는 답을 받지 못하는 것이 외롭고 답답하다. 꽁냥꽁냥이어도 좋으니 무언가가 변해가고 있고, 맺혀가고 있다는 사실만 당장에 알아도 그나마 버틸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수신처는 번호로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 먹먹한 마음이 스스로를 침식시키지 않도록 안간힘으로 버틴다. 존버가 답이 아니라는 세상이라지만 그러나 존버라도 없다면, 이 존재는 아주 단박에 스러질지도 모를 일이기 때문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