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많은 야크 털은 다 어디로 갔을까

야크 털깎기(Yak Shaving) 란?

무수히 많은 야크 털을 깎았던 한 해였다. 하지만 올해 뿐만 아니라, 매년 야크 털을 열심히 깎는 것 같다. 심지어 ‘야크 털깎기’라는 말을 모르고 있었을 때도 나는 야크를 돌보고 있었다.

내 인생의 야크들

대학 시절에는 해야하는 전공 공부는 안하고, 괜히 남의 전공과 교양 수업을 기웃거리기 일 쑤였다. 시험 기간에는 왜 과학책이 그렇게 재밌어지는 것일까. 읽기도 힘든 한자와 고어가 빽빽한 한문학 수업 시간에 배우는 구운몽 이야기보다는 보다는 슈퍼맨과 배트맨 이야기가 더 재미있어 신문방송학을 부전공 했다. 과학 교양을 채우려다보니 가정교육과 필수 교양수업도 듣기도 했는데, ‘친수성과 소수성’, ‘카르복실기’ 같은 용어가 자연스럽게 난무하는 강의실에서 이게 정녕 교양이 맞는지 멘붕에 빠졌다. 그런데 시험기간에는 내가 정리한 페이퍼 복사본이 여기저기 어지러이 널려져 있었다. 뮤지컬 무대 뒤에서 보조 아르바이트를 하기도 하고, 가끔 축가 알바도 하면서 아주 잠깐 무대도 꿈꿨다가, 임용 시험을 준비하면서 전공 공부를 등한시 한 것을 후회하며 대학 시절이 금새 끝나버렸다.

군대에서는 정말 뜬금 없이 전투기와 교신하는 특기로 복무하게 되면서, 그 때까지 타본 적도 없던 항공기와 공항에 대한 많은 것들을 줄줄줄 외웠어야 했다. 제대를 하고 나서는 학원에서 과학(!)을 가르치다가, 출판사에도 잠깐 일을 하면서 국어 문제집을 만들었다.

그리고 지금은 어느덧 5년 차, 개발자라고 소개하는 것이 어색하지 않게 되었다.

그 많은 야크 털은 다 어디로 갔을까

나의 무책임한 호기심과 젊은날의 충동이 쌓아올린 야크 털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바람에 휙 날아가버린 야크 털에 불과한 것일까. 서른 초반에 직장을 못잡고 방황 할 때는 너무 쓸데 없는 곳에 시간을 쏟았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했었다.

특히나 올해는 유독 야크를 많이 찾은 한해였다. android 부터 시작해서 Spring Boot, Django, Wordpress, Reactjs, phonegap 까지 정신없이 내 손에 들고 있는 책들이 바뀌어 갔다.

하지만 되돌아보면 더 자세히 보지 못한 것이 아쉽지, 야크 털 깎는 순간 만큼은 기억이 반짝일 만큼 즐거웠다. 그리고 살다보니 그 때의 경험들이 꼭 한번씩은 요긴하게 쓰일 때가 있더라.

가끔 공항에 갈일이 있으면 군대에서 외웠던 공항에서 사용하는 장비들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샴푸나 바디 클렌저를 고를 때도 가정교육과 교양시간에 배웠던 성분들이 눈에 조금씩 들어온다. 국어를 전공한 덕에 개발 서적을 교정하며 남들보다 먼저 신간을 볼 수 있기도 했다.

개발을 처음 시작하고, 현업에서 전혀 쓰지 않던 파이썬과 자바스크립트를 조금씩 깎다보니, 어느새 올해는 Django와 ES6를 주제로 발표도 하게 되고, 조금은 개발자로서 성장했다는 만족감도 느낄 수 있었다.

오늘 깎은 야크 털을 잘 모으자.

오늘 너무 많은 야크 털을 깎았다고 자책하지 말자. 이왕 깎을 거면 제대로 깎아서 내것으로 만들어 놓으면, 언젠가는 요긴하게 쓰일 것이다. 하다못해 즐거운 농담이라도 같이 거들어가면서 풍요로운 개발 라이프를 일굴 수 있지 않을까.

대신 에버노트나, 원노트, 깃헙 등을 이용해 야크 털을 잘 모아 놓는 것이 미래에 정말 좋은 자신이 될 것이다. 잘 모으는 방법은 너무 많으니 각자 취향에 맞게 야크 털을 깎아보자!

(원래는 무한히 양산되고 있는 ‘방망이 깎는 노인’을 패러디한 단편을 하나 써볼까 했지만, 역시나 연말의 일정이 폭주하여… 후일을 기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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