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지음, 박은정 옮김 (문학동네)
[1] 이 책을 출퇴근 시간의 만원 지하철에서 읽지 마시오. 왜냐하면 매일 참고 참다가 결국은 마지막 날에 울어버렸으니까. 부끄러워서 주변에 누가 나 보고 있는지 (혹은 보고 있기는 한건지) 살펴보지 않았다.
[2] 전반적인 분위기를 보자면 내내 우울하고 처절하고 뭐 .. 그렇기만 한 내용은 아니다. 나름대로 단짠단짠이 있다고나 할까. 나는 임레 케르테스의 <운명>이 계속 생각났는데, 소설 속 주인공이 아우슈비츠 수용소라는 끔찍한 곳에서도 지루함과 같은 “일상”을 느끼는 모습이, 최전선에서도 “행복했다” (혹은 행복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와 비슷하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3] 아마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했을 것 같은 내용인데- 작가가 정말 다양한 목소리(경험담)를 들려주고자 노력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처음 읽기 시작했을 때는 요상한 목차 덕분인지 산만한 구성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순식간에 나는 여러 목소리에 빠져들었고, 원고를 완성하기까지 대체 몇 년이 걸렸을까 하는 생각과 함께 작가에 대한 존경심이 들었다.
[3–1] 단순히 여자 병사가 많이 했을 것으로 짐작되는 간호병이나 통신병만 인터뷰한 것이 아니라 “여자들은 전쟁에 나가서 싸우기나 했겠어?” 편견에 정면으로 맞서는 보직(저격수, 공병, 포병 등등)에도 여자들, 심지어 소녀들이 존재했다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또한, 보직 문제뿐만 아니라 직접적으로 전쟁(싸움)과 관련이 없어보이는 “페페제(야전용 아내)” 이야기도 있다. 이쯤 되면 서두에서 나온대로 출판 검열관이 “소비에트 여성은 동물이 아니오”라며 기겁한 것도 당연하다.
[4] 페이지가 넘어가면서, 전쟁도 점차 끝나간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오는 중에 사랑니가 나고 있었다던” 소녀들과 전쟁터에 나간 남편/가족을 기다리던 여자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전쟁터에서는 모든 게 너무 빨리 일어났기” 때문에 “겨우 몇 년 사이에 그곳에서 인생 전체를 산 셈”이라고 느꼈던 소녀병사들이 어떻게 일상을 회복하는지, 혹은 회복하는 과정에서 얼마나 힘들고 또 괴로웠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뭐 다들 어땠는지 짐작이 가지요.
[4–1] 그래도 전자는 자신을 챙겨줄 사람(보호자)이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는데, 후자는 그 긴 시간 동안 너무 힘들었을 것 같다. 포로로 잡혔었다는 이유만으로 전쟁영웅을 재판대에 세우고 노동수용소 같은 곳으로 보낸다는게.. 몇십 년이 지나고 겨우 스탈린과 국가를 욕할 수 있는 때가 오기까지 아무에게도 자신이 당한 일에 대해 말도 못하고, “배신자의 아내”라는 이유를 들어 취업 등에서 불이익을 주는 등 아예 사회에서 추방시켜버렸다는 것이 끔찍했다.
[4–2] 뻘소리지만 조지 오웰 오예이지요. <1984>는 이제 지났고 (대신 <멋진 신세계>가 오고 있는 것 같기는 하지만 ㅋㅋ)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 믿고 싶네.
[5] 페미니즘의 측면에서 이야기를 해보고 싶다. 이 책의 첫페이지는 “인류 역사에서 여자가 군대에 처음 등장한 건 언제인가?”라는 질문과 “이미 기원전 4세기에 아테네와 스파르타의 그리스 군대에서 여자들이 싸웠다.”는 답변으로 시작한다. 이렇듯 여자들은 아주 오래 전부터 전쟁에 참여하여 남자들 못지 않은 무훈을 세웠다. 그러나 우리는 여자 전쟁 영웅의 이름을 하나라도 댈 수 있는가? 전쟁사 덕질을 하지 않는 사람이라도, 다소 상식이 부족한 사람이라도 남자 영웅은 아무리 못해도 한 사람 이상은 말할 수 있을텐데 말이다.
[5–1] 기원전 4세기부터 참전한 여성들 중 단 한 명도 유명하지 않은 이유는, 결국 그들의 목소리(이야기)에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았기 때문이며, 더 나아가 그들을 외면하고 배척하는 식으로 비열하게 대했기 때문일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다음 인용문으로 정리하고 싶다.
당신한테 말하는데, 우리는 승리를 빼앗겼어. 우리의 승리를 평범한 여자의 행복과 조금씩 맞바꾸며 살아야 했다고.
[5–2] 전쟁에 참여해서는 “자신의 쓸모”를 증명하기 위해 배로 노력하고 차별에 맞서야 했고, 돌아와서는 “전쟁에 대해 이야기를 꾸며대는 것이다”나 “여자들이 전쟁에서 한 일이 뭐냐”라는 말을 들어야 했고, 자신들이 지켜낸 조국의 여성들에게서도 “전쟁터에서 남자들을 꼬셨겠지”, “남자들과 함께 지내며 더럽혀진 여자”라고 비난 받았다. 여자병사들의 역사가 기록되지 않고 그들과 함께 싸웠던 남자 전우들도 그들을 모른 척 하니, 이는 당연한 결과라고 말할 수 밖에.
[6] 마지막으로 내가 읽으면서 지하철에서 엉엉 울었던 부분을 인용하며 정리합니다. 이 책은.. 그냥 다들 읽었으면 좋겠다. 어려운 내용도 아니라 부담(?)도 없고, 무엇보다도 이런 인용문 몇 개로는 그 생생함이 전해지지 않는다.
하지만 같은 방 기숙사 친구들이 의사의 말은 신경쓰지 말라며 자기들이 도와주겠다고 나섰어. 매일 저녁 친구들이 돌아가며 나를 극장에 데려가서 코미디영화를 보여줬지. ‘너는 웃는 법을 배워야 해. 많이많이 웃어야 한다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