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남 1

1

그러니까 그 남자로부터 연락이 온 것은 밤 10시 30분 무렵이었다. 신촌에서 친구 모임이 방금 전 끝났다고 집에 가는 길에 전화를 한 것이었다. 난 회사 업무가 바빠 야간 대학원에도 가지 못하고 가슴 졸이고 있었다. 약간은 날카로운 정신 상태였는데 30분 후에 다시 연락이 왔다. 회사 앞이니 집에 갈 때 같이 가자는 그의 말에 순간 당황했다. 그러자고 얼버무렸는데 아직 우리는 두 번 밖에 만나지 않은 사이가 아니던가. 밤 11시가 넘어 덜컥 회사 앞으로 찾아오다니. 사실, 조금 짜증이 났던 것도 사실이다. 과중한 업무부담과 그로 인한 학교(야간 대학원) 결석으로 신경이 곤두서 있는데 다른 신경 쓸 거리가 하나 더 생기니 자연스럽게 짜증이 묻어난 것이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난 다시 전화를 걸어 회사 선배랑 같은 방향이라 같이 가겠노라고 그에게 말했다. 그의 말꼬리에 힘이 없어진다.

내가 그를 처음 만난 것은 한 열흘 전이다. 작년 이래로 남자친구가 없었는데 직장 같이 다니는 대학 선배(혁연)가 과친구 라며 한 번 만나보란다. 참! 그 전에 그 선배는 그 남자에 대해 이해하라고 그 남자가 선배에게 보낸 이메일을 먼저 보내주었다. 그 이메일은 다름 아닌 그 남자가 친구들에게 보내는 영화평이다. 일명 “영화 까발리기” 라나. 뭘 까발려. 그런데 그 남자의 메일을 읽어가면서 나도 조금씩 만나고 싶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왠지 모르게 그 남자의 글에는 따뜻함이 담겨있다. 그래서 난 선배에게 만나고 싶다는 말을 건냈다. 만나러 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했던 그 선배의 말이 조금 귀에 거슬린다. “그 친구 키는 좀 작지만 생각이 깊은 애니까 잘 만나봐”

그래! 그렇게 난 그 남자를 만났다. 그날은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금요일 이었다. 4월인데도 장마 때처럼 연일 비가 내렸다. 난 비를 특별히 좋아하거나 싫어하진 않는다. 그런데, 요즘 비가 내리기 며칠 전까지 화창한 봄날씨는 나를 몸부림치게 만들었다. 그래서 선배의 소개팅 제의에 흔쾌히 답을 한 건지도 모른다. 더군다나, 그 남자는 영화를 무척 좋아하는 사람이어서 나와 통하는 코드가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같은 대학 출신이 아니던가. 서로 공통점이 많을 것 같았다.

그 남자가 먼저 도착해 있었다. 최근에 부서원 한명이 그만 두는 바람에 일이 무척이나 많다. 그래서 약속 장소도 우리회사 부근인 광화문 서울파이낸스센터로 정했는데 내가 오히려 늦으니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그 남자는 빗속을 달려 강남에서 왔는데… 그래도 내가 7시부터 7시 30분 사이에 만나자고 했던 터라 아직 30분은 되지 않았으니 괜찮다고 스스로 위로하며 커피숍으로 들어섰다. 들어서자 혼자 앉아있는 그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자리에 앉을 틈도 없이 그 곳을 떠나 주린 배를 채우러 갔다. 원래 가려고 했던 식당은 인도풍의 식당이었다. 거기로 가는 길에 아주 재밌는 음식점 간판을 발견했다. “My X-Wife’s Secret Recipe” “내 전처의 비밀 요리법” 정도로 해석 됨직한 재밌는 음식점 간판이었다. 그 남자도 그 이름을 재밌어 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우린 자연스럽게 그 식당으로 들어갔다.

식당은 아주 아담하고 모든 것이 깔끔하게 정리정돈 되어있었다. 물을 따라 주는 주인장에게 식당 이름이 재밌다고 전해 주었더니 “내 처의 음식점” 보다는 더 낫죠 하면서 웃는다. 그러면서 식당이 오픈 된지 얼마 되지 않았다고 맛있게 드시라고 하면서 주문을 받는다.

음식은 샐러드부터 아주 정갈스럽게 나왔다. 샐러드를 먹으며 와인 한잔을 마신다. 주 요리가 나오기 전에 그 남자가 말한다.

“아마도 제 생각에는 X-Wife의 식당이라고 지은 것은 처가 바람이 난거예요. 남편이 밤일에 별볼일 없어 정부에만 매달린 거죠. 그러니 당연히 정부에겐 맛있는 음식만 해먹이게 되고. 그러니 전처네 집이 더 맛있지 않을까요?”

일견 그 남자의 말에 일리가 있다. 정부에게 더 맛있는 음식을 해 먹인다? 웃음이 나왔다.

그렇게 우린 첫 만남인데도 자연스럽게 얘기를 나누며, 음식을 나누어 먹으며 흥겹게 시간을 보냈다. 이 남자는 회사 선배의 말대로 영화나 뮤지컬을 무척이나 좋아하는 것 같았다. 뮤지컬 얘기가 나오니 작년에 유럽 가서 뮤지컬 본 얘기를 장황하게 늘어 놓는다. 나도 뮤지컬을 좋아하는 터라 즐겁게 들어주었으나 약간 이 남자 혼자 얘기하는 것 같아 지루하게 느껴지기도 하였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분위기는 좋았다.

‘전처네 집’에서 한 세시간은 떠든 것 같다. 시간은 금새 지나갔지만 끝날 무렵엔 약간은 피곤함이 느껴졌다. 그래서 커피 한잔 먹으러 자리를 옮기자는 그 남자의 말에 다음에 하자고, 다음에 내가 사겠다는 말로 미뤘다.

2

대학원 중간고사 기간이라 무척 바빴다. 공부는 하지 않으면서 괜히 바쁘다고 2주후에나 만나자고 한 것이 왠지 미안하다. 토요일은 회사에서 에버랜드로 야유회 간 것이라 어쩔 수 없이 만나지 못했지만 일요일 만큼은 시험도 끝나고 해서 먼저 만나자고 연락을 했다. 이 남자 목소리가 밝아진다. 이 남자는 자기가 영화를 예매해 놓을 테니 삼성역 메가박스로 오란다. 영화 보는 것은 좋은데 왠지 멀고 가기 불편하다. 그래도… 그렇게 본 영화가 봉준호 감독, 송강호, 김상경 주연의 “살인의 추억”이다.

영화는 1980년대 후반 전국을 연쇄 살인 공포로 몰고 간 화성연쇄살인사건을 소재로 하고 있다. 약간은 어둡고 침울하며 공포를 느끼게 하는 그런 영화였다. 그런데, 영화 초반은 그런 분위기가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적절하게 유머를 섞어 놓아 흥미 있게 영화에 몰입할 수 있도록 해 놓았다. 영화에서는 비오는 날 저녁 빨간 옷을 입은 여자만 연쇄적으로 죽어갔다. 조금은 잔인하고 소름 끼치는 장면이 보여지면서 긴장감을 불러 일으킨다.

영화를 마치고 나오는데 “살인의 추억”이라는 제목이 왠지 가슴에 와 닿았다. 며칠 전 영화 관련 기사를 통해 한번 본 것도 같은데 잔인한 “살인”이라는 단어와 아름다운 회상 정도를 뜻하는 “추억”이라는 단어의 조합이 왠지 부자연스럽기도 하지만 오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는 것 같았다. 이런 말을 그 남자에게 하니 자신이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을 짚어 주어서 고맙단다.

그리고, 우린 요즘은 꽃게가 제철이라는 말에 꽃게를 먹으러 갔다. 사실 처음 내가 생각한 꽃게찜은 그냥 싱싱한 꽃게를 찐 그런 형태였다. 그런데 이 남자를 따라서 김포공항 부근까지 달려가 먹은 꽃게는 아구찜처럼 콩나물을 넣어 맵게 만든 찜이었다. 매운 양념과 싱싱한 꽃게의 조합이 그리 싫지는 않았다. 더군다나, 알과 살이 꽉 찬 제철 꽃게가 아니었던가. 그리고 우린 한강이 훤히 내려다 보이는 강북 강변의 까페에 갔다. 예전 은행 다니던 남자와 온 적이 있었는데 이렇게 이 남자와 다시 오게 되니 감회가 새롭다. 지금 그 남자는 무엇을 하고 있을까 생각하며 피식 웃었다. 지난 번에 그 남자와 저쪽에 앉아서 칵테일을 먹었었는데. 그런데 이런 곳을 이 남자도 예전에 꽤 많이 와봤던 것 같은 눈치다. 몇 번 안 와본 것처럼 어색하게 행동하는 것이 오히려 귀엽다. 그냥 편하게 얘기하지.

까페에 들어서면서 그 남자가 선물이라며 책을 한 권 건낸다. 올해 이상 문학상 받은 김인숙의 “바다와 나비” 라는 책이다. 이상 문학상은 예전 이문열의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이 전부인데. 그 남자는 간단히 메시지를 적어야 하는데 급히 사느라고 적지 못했다고 다소 미안한 눈치를 보낸다.

내가 잠시 화장실로 자리를 비웠다. 다시 돌아 왔는데 이번엔 그 남자가 화장실에 간다며 자리에서 일어선다. 그러면서, 앞장에 간단히 몇자 적었으니 돌아올 때까지 읽어 보란다. 난 바로 앞장을 열었다.

광활한 바다

그곳을 날아가는 나비

지친 나비는

잠시 날개를 접고 쉴만한

징검다리 같은

섬을 필요로 한다

우리 인생에서도…

3

다음날 난 아침에 화장실에서 깜짝 놀랐다. 내 배설물이 온통 새빨개서 꼭 피가 쏟아져 나온 것 같았다. 순간 당황했다.

‘맞어, 어제 꽃게찜 먹었지!’

오늘 아침은 수영이 없는 날이다. 그래서 한 8시 반까지 넉넉하게 아침잠을 즐길 수 있다. 3개월 전에 시작한 수영이 이젠 제법 생활의 일부로 다가오는 것 같다. 월수금 사흘은 아침에 수영하고 출근해서 그런지 기분이 무척 상쾌하다. 그래서 운동이 좋은 것 같다.

아침에 9시 넘어 버스를 타고 가고 있는데 문자가 하나 날라왔다. 그 남자다.

“비오는데 빨간 옷 입고 외딴길로 혼자 다니면 안돼요. ㅋ.ㅋ.”

지난번 그 남자와 같이 본 “살인의 추억”이 떠오른다. 아침부터 그 남자가 문자로 나를 웃겨준다. 비가 와도 기분이 좋다. 회사에 조금 일찍 도착해서 습관적으로 이메일을 열어보았다. 그 남자가 보낸 메일이 맨 먼저 눈에 들어온다.

제목 : 김신우의 영화 까발리기 — 살인의 추억

제가 가끔씩 영화를 보고 나서 친구들에게 보내는 메일입니다.

수미씨에게는 이렇게 보내는 것이 처음이네요.

시간 나실 때 부담 없이 읽어 보세요.

그럼, 꾸벅.

살인의 추억

- 아름다울 수 없는 행위에 대한 아련한 회상

밤에 홀로 촛불을 켜지 마라.

밤비 올 때 홀로 욕조에 들어가지 말라.

밤길을 가다가 갑자기 뒤돌아 보지 말라.

밤비 내릴 때 홀로 빗속을 걷지 말라.

이상은 공포영화에 흔히 등장하는 장치들이다. 형사 추리 스릴러 물을 얘기하면서 공포영화 얘기를 꺼내는 것은 그 살인 수법이 잔인하고 공포감을 느끼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 만큼 이 영화는 전대미문의 미결 사건인 화성연쇄살인사건을 다루고 있다 보니 영화의 극적 면을 위해서라도 공포감을 배가 시킬 수 밖에 없다.

이 영화는 제목이 재밌다. “살인의 추억”이라. 살인은 어떤 의미에서도 미화될 수 없는 행위이다. 여기에 아름다운 과거에 대한 회상을 의미하는 “추억”이라는 말은 더욱 어울리지 않은 대화의 조합이다. 그런데 이렇게 “살인”과 “추억”이라는 단어를 조합해 놓고 보면 묘한 분위기를 풍긴다. 아름다울 수 없는 행위에 대한 아련한 회상. 이런 제목에서부터 이 영화는 심상치 않게 다가온다.

영화는 1986년 쯤으로 되돌아 간다. 벼가 무르익어 가는 비포장 논길 수로에서 한 여자가 발견된다. 손이 뒤로 묶이고 입에는 스타킹 재갈이 물려있고 머리에는 팬티가 씌어져 있는 채로 죽어있다. 그리고 비오는 날 밤 빨간 옷 입은 여자들이 연쇄적으로 죽어갔다. 그것도 똑 같은 수법으로. 시골 형사 송강호는 범인 잡기에 혈안이 되어 있다. 용의자 몇 명을 검거하여 족치며 고문하며 범죄사실을 실토하게 만들려고 한다. 그런데 무고한 용의자만 다치게 된다. 이쯤 사태의 심각성으로 인해 서울에서 엘리트 형사 김상경이 파견되어 온다. 관상과 감에 의존하여 수사를 하는 송강호에 비해 이 젊은 형사는 모든 것을 서류와 분석에 의해 수사를 하게 된다. 계속 부딛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연출된다. 그런데 사건은 점점 미궁에 빠지고 또 연쇄살인사건이 발생한다. 이 두 형사는 거의 미쳐간다. 죽도록 범인이 잡고 싶어 혈안이 되어간다. 영화 카피처럼 “정말 미치도록 잡고 싶었습니다” 라는 표현이 딱 알맞게 느껴질 정도로 그들 또한 살인사건과 함께 미궁에 빠지게 되는데…

이 영화는 형사 추리 스릴러 물로는 최근에 나온 작품 중에 으뜸이 아닐까 싶다. 사실 한국영화는 일종의 흐름 같이 발라드, 무협, 로맨틱코메디, 코메디, 형사 추리물 등이 유행처럼 번갈아 가며 나오는 경향이 있다. 최근엔 가문의 영광, 동갑내기 과외하기, 오 해피 데이에 이르기 까지 로맨틱 코메디가 판을 치더니만 4월 들어 제법 다양한 영화가 나오는 듯 싶다.

이 영화는 여느 형사물 영화와는 다른 몇 가지 면이 있다. 우선 눈에 띄는 부분이 상당히 진지하지만 그 사이에 아주 고급스런 유머가 숨어 있다는 점이다. 송강호 하면 떠오르는 몸으로 하는 유머가 여기에서는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그런데 그들의 말 속에는 재치가 숨쉬고 있었다. 이런 유머가 영화를 볼 때 긴장을 이완 시켜주는 기능을 한다. 이런 편안함과 긴장 완화는 공포를 더 느끼게 하는 장치로 작용하기도 한다. 이것 또한 가능한 것이 송강호 라는 걸출한 배우 때문이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용의자들은 한결 같이 변태 성향이 있거나 사회에서 소외받는 인간의 모습들이 많다. 약간 지능이 떨어지는 이부터 해서 여성 속옷에 이상한 자위행위를 하는 이 까지. 그런데, 마지막 용의자로 등장하는 이는 이런 부류와는 전혀 다른 극히 정상적인 외모의 소유자 이다. 곱상하고 손도 부드럽고 정황상으로 보면 분명히 범인인 것처럼 느껴지지만 그는 그 포위망을 때론 유유히, 때론 처절하게 빠져나가고 만다. 어쩌면, 형사들이 자신들의 틀로 그 용의자를 미리 범인으로 규정 짖고 그 쪽으로 몰고 간 경향도 있겠다. 하여튼, 아직까지 미궁으로 남아있는 사건이기에 범인에 대해서 나름대로 상상을 해 볼 수는 있겠다.

범인이 살인을 저지르는 순간은 비 내리는 밤이었다. 그런데, 그때 마다 라디오에선 유재하의 노래가 나온다.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가수 유재하의 노래와 살인과의 조합이라. 물론 영화를 위해 삽입한 장치였겠으나, 때론 아주 상투적으로 다가와 다른 용의자가 범인이겠구나 하며 분위기를 몰아가는 측면도 있고, 약간은 사이코적 기질을 발동하여 비올 때 슬픈 음악을 들으며 살인의 충동을 일으킨다는 감성적 요소에 호소하는 측면도 있는 것 같다.

타로 이와시로의 음악도 귀에 쏙쏙 들어온다. 적절한 긴장과 공포를 느끼게끔 음악을 리듬감 있게 사용한 것 같다. 특히 살인 사건 전에 뛰는 발걸음과 여자를 덮치는 순간은 손으로 눈 보다는 귀를 가리게 할 만큼 소리가 주는 공포감이 심했다.

이런 것들이 종합적으로 작용해서 매우 안정감 있게 영화를 이끌어 갔으나 왠지 길고 지루하게 느껴지는 것은 무슨 이유 때문일까. 마지막이 주는 아련함 때문일까. 허탈감 때문일까. 아님 장르적 특성 때문일까. 머리속이 어지럽고 혼동된다.

오늘 아침 비가 추적추적 내린다. 오늘은 빨간 옷을 입고 외딴 길로 다니지 마라고 그녀에게 문자를 날리고 싶다. 혹 그 놈이 다시 나타날까봐.

그 남자는 글을 제법 쓰는 것 같다. 그리고, 여자와 같은 섬세한 감수성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그의 영화평을 보면 내가 미처 영화에서 보지 못했던 부분을 다시 발견할 수 있다. 섬세하다고 해야 할까. 영화평을 보는 것 만으로도 영화를 한편 새로 본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하다. 이번 “살인의 추억”도 마찬가지 이다. 내가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 언뜻 던진 살인과 추억의 부조화의 조화에 대해서 그 남자는 영화평의 서두를 장식하였다. 내가 던진 한마디를 소중히 들어주고 기억해 주다니…

“회사 앞이거든요. 제가 집까지 태워드릴 테니 일 끝나면 연락주세요”

그 남자의 전화였다. 저녁 수업도 못 가고 일하고 있어 약간의 짜증이 있었는데 갑자기 그런 전화를 받으니 당황스러웠다. 만난지 두 번 밖에 되지 않았는데. 그래서 처음엔 간다고 했는데 5분 후 다시 전화를 걸어 직장 선배랑 같이 타고 간다고 했다. 선배의 차를 타고 집으로 오긴 했는데 마음 한 구석이 답답하다. 한편으론 ‘이 남자 왜 이렇게 오바하고 있지. 만난지 얼마나 되었다고’. 이런 저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이 남자에게서 문자가 날라왔다. 집에 방금 도착했다고. 임형주의 “아베마리아”를 계속 들으면서 와서 그런지 아직 “아베마리아”가 귀에서 맴돈다고.

이 남자는 자기가 집에 도착하면 항상 잘 도착했다고 문자를 보낸다. 이 남자를 만나고부터 잊고 지냈던 전 남자친구 생각이 조금씩 난다. 이 남자는 그 친구와 유사한 면이 많다. 문자 보내는 거며, 데이트 장소 그리고 말투까지. 그래서 이 남자를 만날 때 약간은 긴장감이 든다.

그런데 계속해서 간밤의 일이 맘에 걸린다. 이 남자가 얼마나 실망했을까. 사실 신촌에 약속 있다고 한 것도 나를 만나기 위해 거짓말 한게 아닐까 라는 생각도 들었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나만의 착각일까. 하여튼, 신촌에서 남대문까지는 바로 코앞인데 가는 길에 잠깐 들렸다는 이 남자의 말에 내가 왜 거절을 했을까? 이 남자의 말에 떨림이 있어서 일까? 그게 부담으로 다가와서 일까?

다시 듣는 임형주의 음악은 흥겹다. 초등학교 때 이미 자신의 진로를 성악으로 정하고 중학교 그리고 미국 유학까지 자신이 선택해서 걸어간 이 젊은이의 기개가 부럽다. 그 어린 나이에 자신의 가치관을 확립하고 진로까지 스스로 선택하는 그런 성숙한 모습을 보였을 뿐 아니라, 겸손과 예절이 몸에 밴 듯한 모습에서 이 젊은이가 좋아지기 시작했다. 사실 이런 얘기들은 다 그 남자가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임형주의 “아베마리아”를 들려주며 한 얘기다. 차 안에서 아무 말없이 “아베마리아”를 두 세번 들려주더니만 이런 얘기를 해준 것이었다.

“임형주 목소리 넘 좋네요. 그레고리안 찬트를 부르는 그런 목소리 같아요. 여자 목소리 같기도 하고”

“그렇죠. 딱 팝페라 하기엔 제격이죠. 어떻게 이렇게 맑고 깨끗한 목소리가 나는지 몰라요. 그냥 듣고 있으면 빠져들어요”

사실 그랬다. 임형주의 목소리는 영혼을 치는 힘이 있었다. 너무 좋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오후 세시쯤에 옆의 동료가 퀵서비스 왔다고 나에게 봉투 하나를 건네준다. A4지에 파란 만년필로 쓴 짧은 메시지가 눈에 들어온다. 그 뒤에 포장된 CD가 같이 들어있었다. 내가 어제 임형주 노래가 좋다고 한 얘기를 귀 기울여 들었나 보다. 이렇게 다음날 바로 사서 보내주다니. 메시지 내용은 대충 점심때 밖에 나가서 식사하고 들어오는 길에 CD가게가 있어서 우연히 들렀는데 마침 임형주 노래가 나오더란다. 그래서 샀다고 한다. 누가 모를까봐?

이렇게 선물도 받고 오후 내내 비 내리는 풍경을 보며 임형주의 노래를 들었다. 컴퓨터로 사무실에서 듣는 거라 음량을 내 마음대로 키울 순 없었지만 자그맣게 흘러 나오는 임형주의 목소리는 여전히 심금을 울린다. 바쁜 하루를 그의 음악에 달래며 보내고 있었는데 그 날 저녁때 그 남자가 전화를 걸어온 것이다. 그게 어제 일이다. 그런데 밤에 그냥 보낸 것이 오늘 내내 내 가슴을 무겁게 누르고 있다.

오늘은 어제에 비해 일이 그다지 많지 않았다. 학교는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오후 5시가 넘어가는데 그 남자로부터 오늘은 학교 갈 수 있는지 묻는 문자가 날라왔다. 자신도 오늘 대학원 가고 있는 중이란다. 사실 그 남자도 경영대학원에 다닌다. 우린 모두 3학기째이다. 물론 대학원은 다른 곳을 다닌다. 그런데 그 남자는 학부 때 전공이 경제학이라 그런지 대학원을 쉬엄 쉬엄 놀면서 다니는 것 같다. 그렇게 어려운 통계학도 A 받았다며 은근히 자랑한다. 얄밉다. 난 숫자와는 영 거리가 먼데. 통계학, 금융경제, 관리회계 등 온갖 숫자와 관련되어 있는 것은 머리부터 지끈지끈 아파온다.

그 문자에 답장을 보냈다.

“^^”

다시 그 남자로부터 문자가 날라왔다.

“?”

내 답장에 화가 났나? 내 문자가 넘 무성의했나. 사실은 그런 의도가 아니었는데. 내 문자가 긍정도 부정도 아닌 것이라 애매해서 그랬나. 난 단지 퇴근 시간까지 한시간 정도 더 있어봐야 학교를 갈 수 있을지 확실히 알 수 있을 것 같아 잘 모른다는 의미로 날린 것인데.

학교에 가서도 그런 생각이 머리 속을 지배했다. 그 남자는 나에게 성큼성큼 다가오는데, 나도 그 남자가 그리 싫지는 않은데 나도 모르게 약간은 뒤로 물러서게 된다. 내 나이 서른 하나. 나도 좀더 적극적으로 다가가야 하나. 아니면 그냥 이렇게 시간의 흐름 따라 그 남자가 다가오는 데로 다가서고 적당히 거리를 두면서 있어야 하나. 머리 속이 어지럽다. 집에 왔으나 이런 생각은 여전히 나를 누르고 있었다. 먼저 전화를 할까 말까 망설였다. 아니야, 그 남자가 항상 10시 30분 무렵이면 전화했으니까 기다려 보자. 그런데 전화가 없다. 이미 12시인데. 어쩌지?

4

밤새 뒤척였다. 오늘은 5월 1일 근로자의 날이다. 그 남자도 쉴 것이다. 연락할까 말까 망설이다가 문자를 하나 날렸다. 몇 일 전부터 그 남자는 토요일에 가까운 근교로 놀러 가자고 보채었던 터였다.

“토욜, 어디가실거예요? ^^”

문자를 보내고 나서 바로 그 남자에게서 전화가 왔다. 아주 들뜬 목소리다.

그 남자 : “두 가지 옵션이 있습니다. 하나는 강화도, 다른 하나는 춘천 가는 길에 청평. 어디가 좋아요?”

나 : “음! 강화도에는 뭐가 있죠?”

그 남자 : “그냥 섬 구경하고…”

나 : “청평 쪽으로 가시죠?”

그 남자 : “그럴까요? 자 잠깐만. 혁연이가 추천한 곳이 있는데, 경기도 용인 부근에 한택식물원이 있거든요. 거기 어때요?”

나 : “혁연 선배가요? 그러시죠. 근데, 거기 괜찮데요?

그 남자 : “혁연이가 친구들한테 메일을 보냈거든요. 조용히 산책하며 돌아다니기엔 딱이라고 하더군요.”

나 : “그럼 거기로 가시죠. 그런데 읽을 책 한권 가지고 오세요.”

그 남자 : “책요? 그 그러죠. 근데 조금 일찍 출발해야 차도 덜 막히고 좋은데 7시 괜찮으세요.”

나 : “음. 좋아요”

그 남자 : “그럼 제가 그쪽으로 Pick Up 갈께요”

나 : “그럼 토욜날 뵈요”

그 남자 : “그래요”

그렇게 토요일 ‘한택식물원’으로 가는 약속을 잡았다. ‘한택식물원’이라 처음 듣는 곳인데, 설마 사람 구경만 실컷 하다 오는 건 아니겠지.

전화를 하면서도 느끼는 거지만 이 남자는 나를 좋아하는 것 같다. 내가 토요일 같이 놀아주는 것을 무척 고마워 하는 모양이다. 약간은 교만한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좀더 교만하게 말하자면 그 남자는 마치 영화 ‘시카고’에서 꼭두각시 춤을 추는 줄 매달린 인형 같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혹시 그 줄이 끊어지기라도 한다면 하는 불안감이 생기기도 한다. 이것이 요즘 내가 느끼는 심리상태이다.

5

휴대폰 벨 소리가 울린다. 시계를 보니 7시가 가까워 온다. 그 남자 전화다. 조금 늦게 도착할 것 같단다. 난 그 남자 전화를 받고서야 일어나게 되었다. 한 20분 후면 그 남자가 도착할 것 같은데 지금 일어나서 시간적 여유가 별로 없다. 그래서 샤워는 포기하고 가볍게 세수만 했다. 간단히 립스틱을 바르고 향수를 살짝 뿌렸다. 조금 있으니 대학로에 도착했다며 다시 전화가 왔다.

선글라스를 끼고 있었다. 하늘은 높고 맑은 날이다. 차는 한남대교를 지나 올림픽대로를 탄다. 7시 30분 무렵 출발했는데도 도로에는 제법 차가 있었다. 몇 주전에 본 ‘시카고’의 OST 음악이 들린다. 조금 막히던 올림픽대로를 벗어나 중부고속도로를 타면서부터 차는 시원스럽게 제 속도를 내기 시작한다. 그 남자가 듣고 싶은 음악이 있으면 고르라고 CD가 스무장이 넘게 들어있는 자켓을 건낸다. 고르다 보니 빨간 색의 등려군 CD가 눈에 들어왔다.

나 : “등려군이 원래 가수였어요?”

그 남자 : “네. 가수인데요”

나 : “아! 난 그저 영화상 만들어 놓은 인물인줄 알고 있었거든요”

그 남자 : “그랬군요. 등려군은 우리나라로 치면 이미자 아니 젊은 나이에 요절한 김현식쯤 되겠다. 하여튼 아주 유명한 대만 가수지요. 중국 여자 치고 월량대표아적심(月亮代表我的心) 이라는 노래 모르는 사람이 없을 껄요”

나 : “아하 그렇구나”

흘러나오는 등려군의 목소리가 감미롭다. 마치 아름다운 트로트 선율 같기도 하고 감미로운 발라드 풍 음악 같기도 하다. 이 남자는 자신이 알아 듣는 부분을 노래와 더불어 해석해 준다. 참고로 이 남자는 중국에서 1년 정도 있었다고 한다. 자신의 말로는 한시를 배우고 싶어 중국으로 건너갔다고 한다. 한시라. 나도 문학을 전공했지만 왠지 시 보다는 소설 쪽을 더 좋아했는데. 어떻게 보면 과만 영문과였지 내가 관심을 더 가졌던 분야는 문학보다는 언어학 쪽이 가까웠는데. 한시라.

고등학교 시절이 떠오른다. 고등학교 한문 선생이 너무 멋있어 한때 짝사랑 한 적이 있었다. 선생님은 한시를 읊고 명상에 잠기는 듯한 모습을 자주 보여주셨다. 어떨 땐, 유유자적하는 이백과 같아 보이기도 했고 어떨 땐 세상을 초월한 선비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 선생님의 가장 큰 멋은 여유였다. 항상 조급함이 없이 넉넉하게 사셨다. 그래서 나도 그때 한시에 조금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한번은 이백의 시 중에서 “山中問答” 이라는 시를 아냐고 그 남자가 물어본 적이 있었다. 지금은 그 싯구가 가물가물하지만 한때 내가 좋아했던 시라 어렴풋이 떠올랐다. 마지막 구절인 “별유천지비인간(別有天地非人間) ” 이란 문구는 아직도 귀에 생생하다. 도무지 인간이 사는 세상이 아니구나 라고 자신을 신선의 경지로 끌어올린 이백의 시에 탄사를 보낼 수 밖에.

山中問答(산중문답) 왜 산에 사느냐고

- 李 白 이 백 -

問余何事栖璧山(문여하사서벽산) 왜 산에 사느냐고 내게 묻기에 笑而不答心自閑(소이부답심자한) 말없이 웃으니 마음 절로 한가로워 桃花流水杳然去(도화유수묘연거) 복숭아꽃 물에 떠서 아득히 가고 別有天地非人間(별유천지비인간) 이곳은 별천지 인간세상 아니어라

이런 것을 보면 그 남자와 나는 통하는 면이 있는 것 같다. 차는 호법 IC를 지나 일죽 IC로 달려간다. 등려군의 CD도 끝으로 가는 것 같다. 그 남자가 이제 거의 도착할 때쯤 되었으니 좀 더 빠른 음악이 어떻겠냐고 묻는다. 그래서 내가 박진영의 베스트 앨범을 꺼내 틀었다. “날 떠나지 마”가 흥겹게 흘러나오면서 우리 차는 일죽 IC를 부드럽게 빠져 나갔다.

그 남자가 인터넷으로 뽑은 약도를 보여주며 길을 알려달란다. 그런데 난 길눈이 조금 어둡다. 길치 까지는 아니어도 길을 쉽게 찾아내지는 못한다. 그런데 나에게 약도를 건네 주다니.

그 남자가 건네준 인쇄물에는 약도와 “한택식물원” 관련 신문기사 그리고 혁연 선배가 그 남자와 친구들에게 보낸 이 메일이 있었다. 메일을 읽어 내려 가면서 선배의 세심한 배려를 행간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그 남자를 만나면서 혁연 선배에 대해서도 조금씩 알아가는 것 같아 기분이 좋다. 사실 처음엔 나에게 쓴소리도 많이 하고 해서 불편한 선배였는데, 이젠 진작에 좀더 친해놓을걸 하는 후회가 들 정도다. 그 선배가 보낸 이메일이 정겨워 잠깐 실어본다.

친구들,

가족들과 나들이 할 곳 또는 연인과 데이트할 곳을 찾는 사람들 참고하셔.

지난 토요일에 용인근처에 있는 한택식물원(18일자 조선일보참조)에 갔다 왔는데 한마디로 Wonderful!!! 이더만. 야생화를 위주로 각종 식물군별로 식물원을 조성해 놓았는데 너무 좋더라. (우리 다빈이는 아직 뭐가 뭔지 모를 나이지만)

아이들 자연학습장으로 만점이고 데이트코스로도 좋을 것 같아서 추천하고 싶다. 인터넷에는 (조선일보를 찾아보는 것이 좋겠네) 아직 상세한 정보는 없어요.

*찾아가는 길 : 영동고속도로의 양지IC에서 빠져서 일죽(진천)방면 17번 국도를타고 가다 백암면소재지(백암)로 들어가면 바로 시골읍내길로 들어가는 데 우체국 있는 곳(삼거리)에서 우회전해서 조금 더 읍내길을 가면 얕은 언덕위에 제법 큰 교회가 나타남. 이 교회아래에서 길이 두갈래로 나뉘는 데 여기서 좌측길로(국도 329번) 시골길을 조금 더 가면 식물원 주차장이 나타남. (양지IC에서 약 23–25km)

*관람 소요시간 : 한번 휙 둘러 보려고 해도 적어도 2시간 이상 필요.

*관람하기 좋은 시간대: 숲속에서 야생화 내음에 취하고 아침이슬이 꽃에 맺혀서 빛나는 모습을 보려면 아침시간대가 좋지 않을까? 특히 봄볕을 무서워하는 여성분과 함께한다면. 장소가 워낙 넓고 양지바른 곳이 많기 때문에 작은 우산을 양산 용도로 챙겨가서 그녀에게 씌워 준다면 ……

*식사 : 식물원 곳곳에 벤치와 탁자가 마련되어 있어서 싸온 음식을 먹을 수 있음. 식물원내에는 스낵(커피, 소세지, 츄러스, 계란) 밖에 없기 때문에 김밥이나 샌드위치등을 싸 가서 나눠 먹으면 (작업중이라면) 효과가 있을 걸.(여자가 싸오기를 바라면 안되지)

인근 동네(백암)에는 순대국밥,순대 외에는 유명한 것이 없음. 가족끼리라면 권하지만 작업중이라면 권하지 않음.

신우와 광일이 특히 잘 활용하기를 바란다.

혁연 빠~이!

6

이 남자가 조금 헤맨다. 인터넷으로 뽑은 약도가 부실해서였다. 다시 차를 돌려 갈림길에서 아저씨에게 물어보며 길을 찾아간다. 조금 가니 식물원 간판이 보였고 한 10여분을 더 달려 한택식물원에 도착할 수 있었다. 아직 이른 시간이라 주차장에는 차가 몇 대 없었다. 입장권을 사고 식물원으로 서서히 걸어 올라갔다.

조금 올라가니 갈림길이 있었다. 왼편으로 가면 모란, 작약이 있는 화원이 있었다. 그 화원으로 가는 길에 튤립 화원이 보였다. 노란색, 빨간색, 분홍색, 흰색 등 갖은 색깔의 튤립이다. 그 화원 사이로 오솔길이 나 있다. 그 사이로 걸어 다니며 가까이에서 꽃을 볼 수 있다. 관람객에 대한 세심한 배려가 마음에 든다. 튤립 화원을 벗어나 바로 옆에 진한 향기로 코를 진동하는 화원이 있었다. 그 곳이 바로 모란, 작약 화원이다.

“참! 흐드러지게 피었네”

그 남자가 먼저 말문을 연다.

“그렇죠? 그래서 모란을 말할 땐 항상 흐드러지게 피었다고 하는가 봐요”

정말 그랬다. 분홍색과 흰색이 어우러져 크기도 컸지만 꽃잎을 만개하고 흐드러지게 피어있었다. 거기에 진한 향기가 코를 잔뜩 자극한다. 머리가 맑아진다. 김영랑의 시 — 모란이 피기 까지는 — 를 실제 모란을 보고 나서 읽었더라면 더 운치와 감동이 있었을 것이라 생각하니 아쉽기만 하다.

모란의 만개에 취해 오솔길을 반 정도 벗어날 때쯤 보인 것이 작약이다. 작약은 꽃망울을 터트리기 바로 전 상태이다. 톡 손을 갖다 대기만 해도 바로 용수철처럼 튀어 올라 꽃망울을 터트릴 것 같은 모양새다. 이 꽃은 피면 어떨까 궁금해 하고 있었는데 옆에 지나가는 나이 드신 어르신께서 한마디 하신다.

“작약이 모란을 시기하는 거야. 모란이 너무 화려하니깐 모란이 다 지길 기다렸다 피려고 지금 잔뜩 움츠리고 있는 거지. 작약도 화려한데 모란과 같이 피면 그 가치가 떨어지거든”

이 말을 듣고 살짝 웃고 있는데, 그 남자의 미소도 눈에 들어온다.

조금 허기가 느껴져 산책로 끝 쪽에 있는 매점으로 갔다. 그 남자가 원두커피와 계란 두 개를 샀다. 전망 좋은 벤치에 앉아 아래 연못을 내려보며 커피를 마신다. 햇살은 아직 뜨겁게 느껴지지 않는다. 아침 일찍 움직이니 이렇게 아침 햇살을 맞으며 모닝커피를 먹을 수 있어 좋다. ‘일찍 일어나는 새가 벌레를 잡는다’ 라는 속담이 떠오른다. 내가 이 속담과 더불어 오늘 일찍 오니 한가하고 여유가 있어 좋다고 말을 하니 그 남자는 ‘일찍 일어나는 벌레가 빨리 잡혀 먹힌다’ 라며 웃는다. 썰렁하다.

여유도 여기서 그만. 다시 우린 왼쪽 편에 있는 리셉션장 쪽으로 발걸음을 내디뎠다. 운치 있는 나무 파라솔 아래로 원형 공연장이 꾸며져 있었다. 빨간 벽돌로 계단식으로 꾸며진 아담한 원형 공연장. 이 식물원을 꾸민 이의 감각이 돋보였다. 햇살 좋은 봄날에 결혼식 하기에도 좋은 듯한 그런 공연장이었다. 이놈의 주책은 이런 곳만 보면 결혼식을 떠올리다니.

그 공연장을 뒤로 하고 길게 꾸며진 잔디화단으로 들어섰다. 양 쪽으로는 아담한 나무들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 그 사이사이에는 자그마한 꽃들이 꽃망울을 터트리고 있었다. 나무는 꽃들이 서늘하게 자랄 수 있도록 그늘을 만들어 주고 있는 듯 하다. 그러면서도 나무의 듬성듬성한 공간을 꽃들이 매워 조화를 이룬다.

화단 끝 부분에 자그마한 온실이 하나 눈에 들어온다. 침상원이라 이름 붙여 졌다. 말 그대로 아래로 움푹 파여진 구덩이에 온실을 만들어 놓은 것이다. 주로 고사리가 심어져 있었다.

침상원을 벗어나 위 쪽으로 조금 더 걸으니 유난히 바위가 많이 보인다. 짐작컨데 암석원 정도 될 법하다. 주로 고산지대 바위 틈에 사는 야생화들이 심어져 있었다. 아주 조그마한 꽃망울로 가까이 다가가서야 겨우 보일 듯 말 듯 한 자태를 드러내는 야생화. 재채기라도 한다면 금새 꽃잎을 떨굴 것 같아 조심조심 숨을 쉬며 가까이 다가간다. 초롱 모양의 꽃, 바위에 바짝 달라붙어 있는 야생 연꽃 등이 눈에 들어온다.

원래 이 곳은 서남향이라 햇볕이 오후 무렵부터 해질녘까지 계속 비춰 추운 지방의 식물이 자라기에는 적합하지 않다고 한다. 그래서, 암석원 야생화 들은 그 밑에 배수로가 있어 차가운 계곡물이 지나가면서 지열을 낮춰 추운 지방의 야생화 들이 살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었다고 한다. 이것 또한 이곳 주인장의 의지를 엿보게 해준다. 이런 얘기를 듣고 암석원을 보니 더 아름다워 보였다.

암석원 가운데 작은 연못이 있었다. 그 남자가 갑자기 연못으로 뛰어간다. 그러더니 연못 구석에 있는 빈 음료수 캔 두개를 주워온다. 그리고 쓰레기통에 갖다 버린다. 괜히 유난을 떠는 것 같기도 하다. 과연 혼자 왔다면, 아님 남자끼리 왔어도 저랬을까? 몰라 아마 그러고도 남을 사람 같기도 한데.

암석원에 유난히 나비가 많이 보였다. 노랑나비, 흰나비가 이 꽃 저 꽃 날아다닌다. 참 오랜만에 나비를 보는 것 같다. 서울에서 나비 구경 한 기억이 거의 없을 정도이니. 그래서 그런지 화창한 날씨와 더불어 자그마한 야생화 사이를 나풀나풀 날아다니는 나비가 무척 아름다워 보였다.

식물원도 얼추 거의 다 본 것 같다. 되돌아 내려오는데 그 남자가 잔디화단 쪽으로 다시 가자고 한다. 내가 먼저 신발을 벗고 걸었다. 그 남자도 따라 한다. 그렇게 맨발로 잔디의 느낌을 발 가득 받으면서 화단 끝까지 내려왔다. 화단 끝에 한글로 큼지막하게 쓴 “리셉션장” 이라는 간판이 눈에 거슬린다. 잔디화단과 리셉션장이라. 뭔가 부조화인 것 같다. 그 남자는 리셉션장 보다는 “놀이마당” 또는 “뒷풀이마당” 정도로 한글 이름으로 바꾸면 어떻겠냐고 말한다.

햇살이 유난히 따뜻했다. 햇살을 맘껏 맞으며 책을 읽고 싶었다. 준비 해온 돗자리를 깔았다. 그리고 책을 꺼냈다. 돗자리에 나란히 둘이 앉아 봄 햇살을 등 가득 맞으며 책을 읽는다. 눈이 부셔 둘 다 선글라스를 꼈다. 난 김형경의 “사랑을 선택하는 특별한 기준”을 읽고 있다. 사랑하게 되면서 자아를 찾아가는 여인내의 심리를 다룬 소설이다. 다소 어렵다. 물론 공감이 가기도 한다. 그런데, 옆에서 그 남자는 뭐가 좋은지 혼자 키득 키득 웃으며 책을 본다. 언뜻 보니 이상문학상 받은 신경숙의 “부석사”이다. 도대체 무슨 내용이길래 웃는 거지. 내 궁금증을 자극한다.

그 남자가 내 발가락을 계속 보는 것 같다. 며칠 전 새로 산 구두 때문에 검지 발가락에 물집이 잡혀서 밴드를 붙여놓았는데 자꾸 그 쪽을 보는 듯하다. 선글라스 안에 눈동자 돌아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그래서 발을 살짝 오므렸다. 그 남자가 다시 시선을 돌린다.

그렇게 나란히 앉아 한시간을 넘게 책을 읽었다. 따스한 봄바람과 햇살 그리고 땅의 기운을 느끼면서 잔디에 앉아 여유롭게 한가로움을 즐긴다. 갑자기 졸음이 쏟아진다. 파라솔 그늘에 얼굴을 묻고 눈을 감아본다. 파라솔 위로 붉은 태양이 비쳐진다. 아련하다. 붉고 푸른 것이 아른거린다. 몽환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허우적거리는 상태가 지속된다. 옆에 있던 그 남자는 이젠 제법 먼 발치에서 나를 지켜보는 것 같다. 잠들고 싶다. 그대 무릎을 베고 달콤한 낮잠에 빠지고 싶다. 5월의 따스한 바람이 머릿결을 흔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