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이름은.>감상

Ashihara NepuYona
5 min readJan 8, 2017

<너의 이름은.> 보고 왔습니다.

먼저 만듦새부터. 전작인 <별을 좇는 아이>처럼 장편 편집에 부담을 느끼고 있고, 그걸 MV 형식으로 어떻게든 넘기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꽤 매끄럽게 장면장면이 이어져서 신카이 마코토 자신의 스타일로 정립했다고 보는 편이 맞겠지 싶었습니다.

또, 시나리오는 4챕터 정도로 나눌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분량 배분이나 복선 회수 등에 있어서도 — 앞으로 얘기할 시점의 편중만 제외한다면 — 매끈하게 빠졌다고 생각해요. 딱히 크게 거슬리는 부분은 없었고, 너무 쉬운 트릭이 하나 있긴 합니다만 눈 감아줄 정도에요.

오타쿠 컬쳐에 기대할만한 요소들은 정말 많이 나오는데 — 예를 들어 청춘 드라마에 나올법한 ‘마을 축제’니 그에 동반한 ‘의미를 알 수 없는 의식’이니 ‘무녀’니 ‘수수께끼의 재난’이니 이를 극복하기 위한 방법으로 택한 xxxx니 — 이러면서도 대중적인 작품, 많은 사람이 보고도 쉽게 받아들일만한 작품이 된 점은 분명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너의 이름은>에서 등뼈가 되는 상황은 역시 ‘몸이 뒤바뀐다’는 부분입니다. 이는 애니메이션에서 그 표현이 더 용이해보이지만, 오히려 실사영화 쪽이 더 낫습니다. 이를 테면 <페이스 오프> 같은 작품들을 보면 확연하죠. <페이스 오프>의 존 트라볼타와 니콜라스 케이지 같이, 배우의 페르소나가 명확히 존재하고 그것을 서로 연기해주면 ‘둘이 바뀌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죠. 하지만 애초에 변이가 손쉬운 기호의 영역인 애니메에서는, ‘뭔가 모드가 바뀌었다’ 이상으로 ‘두 인격이 서로 바뀌었다’를 실현하기 위한 전제 = ‘바뀌기 이전 상태’의 확립이 어렵습니다.

<너의 이름은>은 그럼에도 꽤 쉬운 방법인 방백을 쓰진 않습니다. 말하자면 여자애가 남자애의 모습으로 바뀌었을 때, 캐릭터는 남자애인데 여자성우의 목소리를 쓰는 게 아니라, 제대로 남자성우에게 여자 캐릭터의 역할을 연기시키고 있습니다. 이러면서도 ‘뒤바뀌었다’라는 효과를 주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언어, 몸짓에 최대한 의지하고 있습니다. 이 작품이 여성혐오적이란 혐의를 받는 부분은 바로 이곳으로, 저는 이러한 성역할 고정적인 몸짓을 등장시키는 것 자체에 대해선 어느정도 납득할 수 있다 생각합니다. 문제는, 이러한 언어나 몸짓이 서로 뒤바뀌면서 발생하는 문제가 적절히 배분되었나 하는 점입니다.

이를 테면 이 작품에서 ‘너, 갑자기 사투리 쓰네?’란 말은 직접적으로 나오지만 ‘너 왜 갑자기 도쿄말 쓰냐?’라는 말은 나오지 않습니다. 여성의 가슴을 만지는 장면은 질감까지 제대로 묘사되지만 남성의 치부를 만지는 장면은 간접적으로만 묘사되죠. 여자애가 남자애의 ‘일인칭’을 어려워하는 장면은 나오지만 반대로 남자애가 여자애의 몸가짐 때문에 곤란해하는 장면은 나오지 않습니다. 물론 두 사람의 사소한 트러블을 전부 그리는 것은 어려운 일고, 남자애가 여자애의 몸에 들어갔을 때 문제들도 나오긴 합니다만, 여전히 남성 주인공인 탓키 쪽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신체성, 혹은 신체적 차이가 강조되는가 하면 그건 역시 미츠하의 가슴 정도입니다. 물론 그것을 버리더라도 언어나 몸짓에 대한 사회적 역할에 집중했다면 더 나을 수도 있었겠지만, 이 부분은 아까도 말했듯이 타키 쪽에 훨씬 더 초점이 맞춰져 있어서 부실합니다.

이러한 문제 때문에 미츠하가 평소에 어떤 방식으로 사고하고 어떤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는지 잘 알 수 없고, 마지막에 이르러 ‘어째서 꼭 미츠하가 설득하러 직접 가야하는가?’라는 질문이 끼어들어 클라이막스를 이끄는 힘이 매우 떨어지게 됩니다. 더해서 타키의 시점으로 그려져왔는데도 불구하고 ‘왜 모두를 구하자’인지 애매하죠. 미츠하 외의 다른 사람들을 구해야하는 이유는 뭘까요? 미츠하의 소중한 사람들이니까? 그들과 몸이 바뀌면서 타키는 어떤 인연이나 유대를 쌓았던 걸까요? 적어도 관객들이 그것을 구체적으로 목도할 수 있는 것은 미츠하의 할머니와 타키의 관계 정도입니다.

물론, 지나치게 엄격한 접근일 수도 있겠으나, 이 작품이 3.11 이후의 재난에 대해서도 (간접적으로나마) 언급하고 있으며 또 그렇게 평가받고 있으니, 이 부분을 그냥 넘어가긴 어렵습니다. 이것은 가치론적이고 윤리적인 판단이겠습니다만, 애도의 문제 혹은 3.11 이후의 문제란 것이 이 작품에서 잘 다뤄졌는지는 의문스럽습니다. 저는 주제의 심화가 이루지 못한 이유를 바로 ‘몸 바뀜’ 혹은 ‘입장 바뀜’이라는 중요소재가 최대한으로 활용되지 못함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위에서 탓키에 초점을 맞췄다고 했습니다만, 더 정확히 말하면 이건 ‘도쿄’의 시점이라고 생각합니다. 도쿄 쪽의 안타까움, 도쿄쪽의 절박함을 시혜자의 태도라고 일도양단하는 것은 지나치게 잔인하다 하겠습니다만, 역시 이 작품에서 전달되는 안타까움은 토호쿠에 사는/살았던 사람들의 시선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과연 이 작품이 ‘너 후쿠시마 출신이지?’라며 이지메 당하는, 매일매일 상실의 고통을 되새길 수밖에 없는, 남겨진 자들에게도 통할 수 있는 이야기일지 어떨지. 혹은 ‘유족충’이라고 불리며 ‘그만 조용히 좀 해’라는 말을 듣는 사람에게 와닿을지 어떨지.

ps. 아, 세카이계에서 나타나는 수수께끼의 재난들이, 사실은 냉전의 상상력=핵전쟁으로 인한 아포칼립스로부터 정치성을 빼낸 것이라는 얘기가 있었죠. 하지만 이 영화를 보면서 우리는 그 재해를 관념적으로 느끼진 않습니다. 그건 우리(한국인이든 일본인이든)가 실제로 ‘커다란 재난’을 겪은 탓이겠지만, 정치성이 삭제된 관념적인 재난이 덮쳐온 것이 아니라 그 관념적 재난에 냉전 이후의 정치성=내적파열이 삽입되었기 때문에 생생하게 느끼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Originally published at noobcoela.egloo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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