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어: 오타마타> 리뷰 : 게임과 죽음과 애도 (1부)

1부 — <니어 : 오토마타>의 허구 세계를 중심으로

0. 게임 리뷰의 “보이지 않는 벽”

일본의 액션 RPG <니어 : 오토마타>(2017)의 감독 요코 타로는 이렇게 말했다. “게임에는 숨겨진 가능성이 있지만 동시에 보이지 않는 벽이 있다”고.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3분이라고 해도, 플레이 타임 3분짜리 게임은 60달러 풀프라이스로는 만들 수 없다. 기술적으로 불가능한 것이 아니라, 혹은 법적으로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60달러 게임은 이러해야 한다는 암묵적인 관습들에 의해서 그렇게 되어 있다. 이 암묵적인 관습을 요코 타로는 “보이지 않는 벽”이라고 부른다.

GDC2015 강연에서 요코 타로

게임 뿐만 아니라 게임 비평, 게임 리뷰에도 그러한 “보이지 않는 벽”이 존재한다. 그것은 “게임 리뷰는 구매 가이드가 되어야 한다”는 벽이다. 게임 리뷰에는 이 게임이 어느 정도 가치를 지니는지 별점이나 등급이 있어야 하고, 플레이 타임과 재플레이성에 대해 논해야 하며, 각종 DLC 정책에 대해서도 논해야 한다. 스포일러는 가급적으로 피해야 한다. 이 모든 것이 결국은 “이 게임을 이 가격에 사야하는가 말아야하는가” 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귀결된다. 물론, 60달러 — 한화로 6, 7만원은 절대로 적은 돈이 아니고, 가격 문제에 대해서 예민해지는 것도 이해할 수 있다. 구매 가이드로써 게임 리뷰의 존재가치를 부정하고자 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게임 비평”의 가능성이 오로지 구매 가이드로만 한정되어 있다고 단언할 수 있는 것일까.

비평이 무엇인지 잘 모르는 과문한 나이지만, 어떤 ‘대상 체험’을 다른 방식으로 옮겨서 ‘기록해 남기는 것’이라는 정의는 누구나 동의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즉, 비평이란, 각자 개개인이 느끼는 방식일 수밖에 없는 체험을, 다른 방식으로 옮겨서 해설하거나 가치평가함으로써, 다른 사람들과 나누는 ‘공공연한 기록’으로 바꾸는 행위다. 비평이 대체로 언어를 통해 이뤄지는 까닭은, 그것이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공통적인 것을 기록하기에 적절하다고 오랫동안 여겨졌기 때문이리라.

이런 의미에서 게임 비평은, 비평으로써 게임 플레이라는 체험 과정을 공공연한 기록으로 옮기는 작업이어야 한다. 물론 구매 가이드도 그러한 과정이다. 그러나 게임 비평은 그것을 포함하되, 좀 더 넓은 영역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우리는 ‘무엇을 산다 / 사지 않는다’라는 경제적 가치판단 외에도 다양한 가치판단 기준들을 갖는다. 따라서 어떠한 게임 플레이가 남기는 가치 또한 여러한 기준으로 평가될 권리를 갖는다.

이 글에서는 바로 그러한 게임의 권리를 옹호하기 위해 비평을 전개하고자 한다. 이미 최초로 작품이 출시된지 두, 세 달은 지난 시점이며, 많은 리뷰들이 그 역할을 했기 때문에 미션 구성이 반복적이라던가, 그래픽의 질이 어떻다던가, 편의성이 어떻다던가 하는 식의 ‘구매 가이드’로써 판단은 이 글에선 포기한다. 이 글에서는<니어 : 오토마타>라는 게임플레이의 체험이 남긴 가치가 대체 어떠한 것이었는지 다각도에서 접근해보고자 한다. 이 접근들을 철학적이라거나 미학적이라고 부른다면 조금은 거창해서 쑥스럽겠지만, 적어도 게임 플레이어로써 느꼈던 여러 감정들을 설명하기위해 필요로 한 경제 외적 판단들이라 생각해주면 충분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비평이 주례사식 비평이 될 것이라는 얘기는 아니고, 그것에 한계가 있다면 분명히 지적할 생각이다. 스포일러의 태풍과 그 안에서 지적인 모험을 할 준비가 되었다면, <니어 : 오토마타>의 비평을 시작하도록 한다.

1. <니어 : 오토마타>를 위한 사전지식 — <니어 : 레플리칸트>의 성과와 한계

이렇게 폼잡고 시작하고선 미안하지만, <니어 : 오토마타>보다도 먼저 <니어> 시리즈 전체에 대해서 이야기할 필요가 있다. 요코 타로는, 한 인터뷰에서 <니어 : 레플리칸트>는 9.11의 영향을 받아 ‘서로 자신이 옳다고 믿으면 상대를 죽일 수 있는’ 게임으로 만들었다고 언급한 바 있다.

Xbox360에서는 <니어 : 게슈탈트>로, PS3에서는 <니어 : 레플리칸트>란 이름으로 발매된 바 있는 이 게임은, 실은 게슈탈트와 레플리칸트가 한 쌍으로, 게슈탈트 편에서도 레플리칸트 편에서도 서로가 옳다고 생각하며 싸우는 이야기다.

여기서 잠깐, 앞으로를 위해서도 ‘게슈탈트’와 ‘레플리칸트’란 용어에 대해 언급하도록 하자. 되도록 간략하게 설명하면, 특수한 질병이 만연한 미래, 인류는 이 질병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혼’과 ‘육체’를 분리해 ‘혼’을 따로 보관하는 기술을 개발한다. 여기서 ‘혼’이 ‘게슈탈트’이고 ‘육체’가 ‘레플리칸트’인데 어째서인지 ‘혼’이 없는 ‘육체’어야할 ‘레플리칸트’에 멋대로 자아가 깃들어 독자적인 문명을 건축하기 시작한다… 는 게 <니어 : 레플리칸트>의 주요설정이다. 작중에서는 플레이어블 캐릭터인 ‘레플리칸트’ 니어와, 대마왕처럼 등장하는 ‘게슈탈트’ 니어가, 각자의 여동생 요나를 살리기 위해 다투다가 인류가 멸망에 이르게 된다. 물론, ‘레플리칸트’ 니어도 ‘게슈탈트’ 니어도 각자의 ‘레플리칸트’ 요나와 ‘게슈탈트’ 니어를 구하기 위해서, 그러니까 자신이 하는 것이 선한 일이라고 생각해서 살육을 반복한다.

이와 같이 <니어> 세계관의 등뼈, 테마는 적군과 아군을 나누는 정치 신념과 그에 얽혀있는 폭력을 다루고 있다. 그런데, 이들은 어떻게 서로가 믿는 것만이 선하다고만 생각하게 되었을까? 여기에 돋보기를 들여다 대보자.

<니어 : 레플리칸트>의 1회차에서는 ‘레플리칸트’ 니어의 시점으로만 진행되던 이야기에, 2회차부터 ‘레플리칸트’이면서도 ‘게슈탈트’의 언어를 알아듣는 카이네의 시점이 도입된다. 그럼으로써 플레이어들이 그림자괴물처럼 보이던 ‘게슈탈트’들이 실은 인간이었음을 깨닫는 전개다. 달리 말하면, ‘게슈탈트’와 ‘레플리칸트’는 1) 서로의 언어가 통하지 않기 때문에 2) 그리하여 서로가 인간이라고 생각되지 않기에 “자신만이 옳다”고 생각하게 된 것다. 여기서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게슈탈트’ 쪽은 ‘레플리칸트’를 본래 자신들의 소유물로밖에 생각하지 않고, ‘레플리칸트’ 쪽은 ‘게슈탈트’를 영문 모를 이유로 덮치는 괴물로밖에 생각하지 않는다. 둘 다 자신들만이 질서를 지닌 문명이고 반대편은 그 보다 하위의 존재, 야만한 존재라고 생각하고 있다고 보아도 좋으리라. 즉, ‘인간’이 아니라는 것은 서로를 평등한 존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으로 바꿔 말해도 좋을 것이다.

거꾸로 말하면, <니어 : 레플리칸트>는 매우 충격적인 전개에도 불구하고, 서로가 말이 통했더라면 이러한 비극은 피했을지도 모른다는 결론, 즉 ‘서로 공통된 언어를 통해 평등하게 합의에 도달했다면’ 죽고 죽이는 상황을 반복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결론에 착지한다. 물론 폭력을 피하기 위해 먼저 의사소통을 추구해야 한다는 얘기는 정론이지만, 과연 ‘서로 공통된 언어를 통해 합의에 도달한다’는 것은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 공통된 언어를 지닌다고해도 곧바로 서로를 평등한 존재로 볼 수 있을까? 그리고 그 ‘합의’가 살육을 회피하는 방향으로만 나아가는 것일까?

<니어 : 오토마타>는<니어 : 레플리칸트>의 속편답게 시간적으로 뒷편에 있을 뿐만 아니라, 이러한 질문을 포함한 발전된 세계를 제시한다. 먼저 <니어 : 오토마타>의 세계에서 ‘2) 서로가 인간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부분이 존재할 수 없다. 연유는 이렇다.

<니어 : 레플리칸트> 이후 어느 시점에서 외계인이 지구에 ‘기계생명체’를 이용해 침략을 개시한다. 인류는 외계인의 침략을 막을 수 없게 되어 달로 도주. 지구에는 인류의 인간형 전투로봇인 ‘안드로이드’들만이 남게 된다. 이 뒤에 만들어진 신형 안드로이드들의 이야기가 <니어 : 오토마타>이다. 즉, 주인공 아군인 ‘안드로이드’도, 적 편인 ‘기계생명체’도 처음부터 양쪽 다 인간이 아니다. 둘은 모두 평등하게 기계인형이다.

<니어 : 오토마타>의 초반부에서 안드로이드들은 기계생명체가 고도의 사고를 하거나 언어를 사용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여기니, 그것은 기계든 인간이든 한 쪽을 우위에 두고 행하는 폭력과 똑같지 않느냐고 반문할 수도 있겠다. 주인공 중 한 명인 9S도 기계생명체에겐 마음이나 의식이 없다고 반복해서 말하지 않는가. 그러나 <니어 : 오토마타>는 1회차에서부터 금방 언어를 이용하며 고도의 사고가 가능한 기계생명체들이 등장, 이른 단계에서 ‘안드로이드’와 ‘기계생명체’ 간의 교류가 그려진다. 즉, 1)의 문제도 해결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문제는, 그럼에도 그들의 다툼은 전혀 멈추지 않는다는 점이다. 1)과 2)가 모두 해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3회차의 시점까지도 안드로이드와 기계생명체는 계속해서 싸운다. 어째서일까. 그것이 <니어 : 오토마타>를 비평하기 위해서 던져져야 할 첫번째 질문이다. 이 질문은 <니어 : 오토마타>의 게임 시스템이라기보다는 게임 속 허구 세계에서 비롯한 것이기에 허구 세계를 중심 틀로 놓고 논하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여기서 허구 세계란 게임 연구자인 제스퍼 주울이 주창한 Fictional Worlds의 번역어이다. 국내에선 이것이 ‘가상 세계’로 번역되었으나, Virtual Reality와의 혼동을 피하기 위해 위와 같이 표기하도록 한다.

2. 인형들의 게임으로써 <니어 : 오토마타>

위의 질문 — 어째서 안드로이드와 기계생명체는 말도 통하고, 한쪽만 인간이라 생각하지 않는데도 싸우는가 — 에 대한 대답은, 실은 <니어 : 오토마타> 안에서는 단순명쾌하다 : 그들이 인형으로써 그렇게 제작되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각자 창조주에 의해 특정한 목적이 부여되어 있으며, 그 목적의 과정상 인간을 모방하도록 되어있다. 반대로 말하면 그들은 인간과 닮아있되 인간일 수는 없는 존재들이다.

위의 폭력 문제를 설명하기 위해 이들이 인형이란 점에 좀 더 주목해주기 바란다. <니어 : 레플리칸트>에서 ‘게슈탈트’와 ‘레플리칸트’는, 완전한 형태를 갖춘 인간은 아닐지라도, 적어도 이들은 인간이었던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안드로이드나 기계생명체는 그 시작점에서부터 인간이 아닌 ‘인형들’이다. 이들이 생각하고 감정을 느끼며, 그를 언어로 표현하고 의사소통하는 것이 인간과의 공통점이라면, 이들과 인간을 가르는 결정적인 차이는 무엇일까.

동물애호로봇 “우리들과 달리, 간단히 수복할 수가 없어”

단언컨데, 그들이 물리적/정보적으로 가역적이라는 데에 그 차이점이 있다.인간은 시간에 흐름에 따라 나이가 들고, 노쇠하여, 마침내 죽음을 맞이한다. 그것을 되감을 수 없다는 점에서 인간은 불가역적인 존재이다. 그러나 이들은 다르다. 안드로이드(특히 요르하 기체)들은 자아정보나 기억을 공통서버에 백업해둚으로써 자신의 죽음을 회피한다. 기계생명체들도 자신들의 네트워크에 접속해 있거나 코어가 살아있다면 몇 번이고 복원시킬 수 있다.

가역적이라는 특징은, 게임을 성립시키기 위한 기본적인 전제이다. 앞서 언급한 제스퍼 주울은 게임을 정의하기 위한 특징 중에 마지막으로 “협상 가능한 결과(C)”를 들고 있는데, 이것으로 왜 가역성이 게임에서 필수적인 조건인지 알 수 있다.

특정 플레이는 특정 결과(C)를 수반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 결과(C)는 플레이의 행위에 의해서 만들어진다. 게임이 나머지 세상으로부터 분리될 수 있는 것은 게임의 결과물(C)이 협상의 여지가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 — 제스퍼 주울, <하프 리얼 : 가상 세계와 실제 규칙 사이에 존재하는 비디오 게임>)(2014) 중.

예를 들어 우리는 전쟁을 게임이라 부르지 않는데, 전쟁 과정에서 발생하는 피해와 그 결과가 비가역적이기 때문에 협상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또, 한 플레이어는 도박의 결과에 의해서 인생을 탕진할 수도 있지만, 사실 도박 게임 중의 결과가 반드시 현실의 상황과 직결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한 도박에서 얻어지는 점수를 갖고서, 점심식사부터 사형까지 현실세계의 결과를 자의적으로 결정할 수 있다. 어쨌거나, 게임은 협상가능한 결과(C)를 갖을 때 게임이라 불리며, 그 결과(C)가 협상가능한 것이려면 비가역적인 손상을 남겨서는 안 된다.

폭력 게임은 게임이기에 이러한 특성을 가져야 하면서도, 동시에 다루는 소재=폭력 때문에 딜레마를 안게 된다. 협상가능한 결과라고는 해도, 안드로이드나 기계생명체들이 손상을 전혀 입지 않아서는 곤란하다. 만약 그러하다면 <니어 : 오토마타> 플레이 도중에 기계생명체는 절대 쓰러지지 않을 것이고, 플레이어블 캐릭터(Playable-Character, 이하 PC)에게도 아무런 변화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가역성이지 파괴불가능성이 아니다. 양편은 서로의 몸체를 파괴할 수 있다. 그러나 그 파괴를 되감아서 수복할 수도 있다. 이러한 특징은 <니어 : 오토마타>의 세계 뿐만 아니라, <니어 : 오토마타>를 포함한 폭력 게임의 조건이다. 플레이어가 무언가를 손상시키고 파괴하는 폭력을 맛보면서도, 그것의 결과(C)는 항상 가역적이어야 게임이다. 적이 쓰러지면 게임기가 망가진다거나, 패배하면 필연적으로 플레이어의 손가락 하나가 잘린다면 그건 이미 ‘게임’이라 부를 수 없으니까 말이다. 즉 <니어 : 오토마타>의 주요 캐릭터들이 인형인 까닭은, 바로 이들이 폭력 게임 안에서 살아가는 존재임을 허구 세계의 요소로 반영한 결과다.

모든 존재는 멸망하도록 디자인되어 있다. 삶과 죽음을 반복하는 나선에 우리는 사로잡혀있다. 이것은 저주인가,아니면 벌인가. 불가해한 퍼즐을 건낸 신에게 언젠가 우리는 활을 당기게 될 것인가 — <니어: 오토마타>의 인트로

그러나 안드로이드들의 비극은, 단지 인형이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 협상가능한 결과(C)의 의미가 확정될 수 없다는 데에 있다. 위에서 말한 것처럼 <니어 : 레플리칸트>의 세계에서 이미 인류는 멸종했다. 적편일 에일리언도 멸종했다. 그렇기 때문에 안드로이드가 기계생명체 수십 만 대를 파괴하든, 지구의 지역을 얼마나 확보하든지 간에 그 행위엔 어떠한 의미도 없다. 첫째로 그것의 승패를 확정지어줄 존재가 없다는 점에서 그러하며, 둘째로 기계생명체를 전부 말살시키더라도 인류의 지구 복귀란 본래 목적은 절대로 완수할 수 없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기계생명체 측에서도 모든 행위가 무의미하다는 점은 마찬가지인데, 기계생명체 측의 이유는 안드로이드보다 복잡하다. 기계생명체들의 경우, 안드로이드와 달리 스스로의 손으로 에일리언들을 멸종시켰다. 그렇기 때문에 승패를 정해줄 존재의 유무는 그들에게 큰 장애가 되지 않으며, 캐릭터 ‘파스칼’처럼 기계생명체 네트워크로부터 스스로를 분리하여 평화주의를 제창하는 무리들도 생겨났다. 기계생명체들의 비극은, 그들이 만들어진 목적이 ‘적을 쓰러뜨린다’에 있으며, 모든 행위가 그 목적에 충실하다는 데 있다.

먼저 ‘파스칼’이나 ‘숲의 왕’ 과 같은 특수개체들은 의도적으로 네트워크로부터 단절당한 것이다. 그들의 인간 모방은 네트워크의 다양성을 확보하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이 그 얼마나 평화주의를 제창하고 가족애를 이야기하더라도, 결론적으로 이들의 행위는 ‘적을 쓰러뜨린다’는 목적을 위한 정보수집으로 귀결될 뿐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들의 ‘의미’가 — 각각의 개체들이 원하든 원치 않든 — ‘안드로이드를 전멸시킨다’고 해서 획득되는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스스로의 목적인 ‘적을 쓰러뜨린다’를 계속하기 위해선 적이 필요하다는 결론에 도달했기 때문이다. 즉, 스스로의 목적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목적을 완수해서는 안된다는 모순적 상황에 빠져버렸다.

우리는 싸우기 위해 만들어졌다. 타자를 배제하고 모든 존재의 정점에 오르기 위해! 하지만 투쟁은 영원히 계속된다! 파괴와 재생의 윤회를 반복할 뿐인 저주받은 존재가 되어버렸다. 이 세계에서 우리는 사랑받지 못한다! — <니어 : 오토마타>, ‘현자로봇’ 퀘스트 중.

중요한 것은 어느 쪽이 되었든, 그들의 행위가 무의미하며, 그것은 이 게임이 절대로 끝나지 않도록 되어있기 때문에 그러하다. 안드로이드는 게임을 끝낼 수 없고, 기계생명체는 게임을 끝내려고 하지 않는다. 게임의 필수적인 조건으로써 가역성이 극대화된 상황 속에서, 이 게임은 어떠한 종의 <종말>이 찾아왔는데도 불구하고 그 <종말이 끝나지 않는다>, <종말이 영원히 계속된다>는 그로테스크한 상태에 이르고 말았다. 얼마든지 리셋이 가능한, 가역적인 게임을 계속해서 반복하는 동안, 그 허구세계 안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니어 : 오토마타>는 적나라하게 표현하고 있다.

3. 게임 속에서 죽음이라는 딜레마

이러한 게임과 ‘끝’ — 더 정확히는 ‘죽음’의 문제를 다룬 비평 중에 주목할만한 것으로, 일본의 평론가인 오쓰카 에이지와 아즈마 히로키의 논쟁을 들 수 있다. 앞으로 이야기할 것이지만, 양측의 논리로는 <니어 : 오토마타>에는 정확히 들어맞지 않기 때문에 여기서 이 논쟁을 깊이 파고들기보다는, 이를 정리한 논문에 의지하여 간단하게 정리만 해보도록 하겠다.

일본의 만화편집자이자 평론가인 오쓰카 에이지는, 『캐릭터 소설 쓰는 법』이란 제목의 작법서에서 “만화, 애니 같은 소설”에 비하여 “게임 같은 소설”은 죽음을 그려낼 수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를 잘들어보면, 모든 것을 기호적으로 표현할 수밖에 없는 “만화, 애니 같은 소설”이 어떻게든 현실의 죽음을 마주하여 표현하려고 노력하여 “만화/애니메적 리얼리즘”을 성립시킨 것에 반해서, “게임 같은 소설”은 당시 단계에선 아직 그러한 노력을 하고 있지 않다는 평가다. 또한 그가 “게임 같은 소설”에서 모델이 되는 것을 컴퓨터 게임=CRPG가 아니라 테이블 RPG=TRPG에서 찾고 있다는 점 또한 언급할 필요가 있다. 어느 쪽이든, 오쓰카 에이지는 창작자의 입장에 서서, 매체나 장르적인 한계가 있음에도 어떻게 “현실”의 “죽음”을 표현해낼 수 있을까, 하는 점을 묻고 있다.

일본의 평론가, 사상가인 아즈마 히로키는 『게임적 리얼리즘의 탄생』에서 『캐릭터 소설~』의 “만화/애니메적 리얼리즘”의 개념을 받아들이면서도, “게임적 리얼리즘” 역시 가능하다고 보고 있다. 그러나, 아즈마 히로키가 말하는 “게임적 리얼리즘” 속에서 “죽음”은 현실의 그것이 아니다. 아즈마 히로키에게 있어서는 “만화, 애니 같은 소설”일지라도 애초에 기호이기에, 죽음을 그려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기에 그 안에서 죽음은 현실의 그것과 달리 일회적인 것이 아니며, 따라서 오히려 “게임 같은 소설”에서 그려지는 여러 번의 죽음이야말로 그 한계를 제대로 인식하고, 독자들로 하여금 죽음과 마주하게 한다. 따라서 그는 루프물로 지칭되는, 여러 번의 분기를 통해 반복되는 죽음을 맛보게 하는 작품들을 높이 평가한다. 이 작품들에선 이야기=캐릭터 레벨의 삶과 죽음이 반복됨으로써, 메타 이야기=플레이어 레벨에서는 제대로 상실의 아픔을 체험할 수 있게 된다. 즉, 그것은 “현실의 죽음”이 아니라, “상실에 대한 아픔”, 그러니까 “사회학적인 현실성”이다. 그럼으로써 그는 삶도 재정립한다. 삶이 “단 한 번뿐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는 반사실성(가능세계)를 전제하는 위에서, “단 한 번뿐”인 삶을 인식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이 논문의 저자인 요시다 히로시에 의하면, 이 둘의 차이는 다음과 같이 정리해볼 수 있을 것이다.

오쓰카가 생각하는 “죽음”은, 어디까지나 “묘사”되는 대상에 속하지만, 아즈마는 “이야기하기” 레벨에서 표현되는 “죽음”을 묻고 있다. 그가 생각하는 “게임”이 “메타 이야기성”을 본질로 하는 이상 당연한 차이다(大塚の考える「死」は、あくまでも「描写」される対象に属するが、東は「語り」のレベルで表現される「死」を問うている。彼の考える「ゲーム」が「メタ物語性」を本質とする以上、この違いは当然でもある)

마치 아즈마 히로키의 이론을 그대로 가져오기라도 한 듯, 플레이어는 <니어 : 오토마타>에서 첫 튜토리얼 스테이지가 끝나자마자 “게임적 리얼리즘”의 “상실”을 체험하게 된다. 주인공 캐릭터인 2B와 9S는 자폭을 통해 습격해오는 거대병기들을 제거하는데 성공하나, 그때까지 기억이 서버에 업로드된 것은 2B 뿐으로, 9S는 2B를 만나기 직전의 기억 데이터로 롤백되어 있다. 이 곳을 묘사한 컷씬에서, 그러한 9S를 다시 만난 2B는 주먹을 꽉 쥐며 격한 감정을 드러내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니어 : 오토마타>에서 죽음은 그러한 상실의 경험입니다, 아즈마 히로키의 이론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고 단언하기엔 고개를 갸웃거리게 만드는 부분이 있다. 위에서 말한 장면은 스토리의 전개가 이뤄질 뿐만 아니라, 게임 시스템적으로 ‘오토 세이브’가 없으니 ‘세이브 포인트’에서 자주 자주 세이브를 하라고 일러주는 부분이기도 하다(이 게임은 여러 곳에서 반복적으로 이 시스템을 강조한다). 이 게임을 플레이하면서, 경험적인 플레이어로서 나는 죽음에서 오는 패널티를 회피하기 위해 몇 번이나 세이브 파일을 로드한 적이 있다. 이 게임은 그러한 세이브-로드를 허구 세계 안에 짜넣고 있기 때문에, 나의 행위는 게임 속에서 “세이브 시점 이후의 기억 데이터가 손실되어, 자판기로 위장한 액세스 포인트에서 이전 기억 데이터에 따라 PC를 재조립한 것”이 된다. 그렇다면, 분명히 같은 “죽음”인데도 불구하고 나는 어떠한 “죽음”에는 상실감을 느끼지만, 어떠한 “죽음”에서는 (회복에서 비롯한) 안도감을 느낀다. 그것은 어떤 의미에선 “살아돌아왔다”는 느낌에 가깝다. 작가의 표현론이 아니라, 독자의 수용론과 체험에서 “게임적 리얼리즘”이 존재한다면, 수용자의 이러한 모순적 반응에 대해서도 다루지 않으면 안된다.

문제는 죽음이라는 것이 이야기 레벨=캐릭터에게 있어서도 여전히 불명확하다는 데에 있다. 숨을 거두면 죽은 것인가? 인공호흡은 어떤가. 심장이 멈추면 죽은 것인가? 하지만 심장이 멈춰도 전기충격으로 살려낼 때가 있지 않는가. 그러면 뇌사하면 죽은 것인가? 인공호흡기에 의해서 생체활동을 일단 하고는 있지만, 뇌사하여 얼마 뒤면 죽을 것이 확정된 인간은 죽어있는 것인가, 살아있는 것인가. 심장사 한 뒤에도 일부 신진대사에 의해서 배변/배뇨를 보는 경우도 있는데, 이 때 우리는 ‘그의 방광과 대장만은 살아있습니다’라고 이야기해야 하는가? 현실세계 안에서도 죽음의 성격은 이토록 모호하며, 기호적으로 이뤄지는 이야기 레벨에서라면 더더욱 그러하다. 가능세계를 도입하지 않더라도 이야기 레벨에서는 네크로맨싱을 하든, 사이보그가 되든, 쌍둥이 트릭을 쓰던지 하여 캐릭터가 되살아날 방법 — 삶이 단 하나 뿐이 아니게 될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 <니어 : 오토마타>는 그 중에서도 액세스 포인트에서 인형을 재조립한다는 방식을 택했을 뿐이다.

<니어 : 오토마타>가 아즈마 히로키의 이론과 엇나가게 되는 지점은, 게임 시스템적으로 그 여러번의 죽음이 상시적이기에, 이야기 레벨의 죽음과 메타-이야기 레벨의 죽음이 이층분리할 수 없게 된 점에 있다. 이것은 사실 그리 대단한 발견은 아니다. 이러한 죽음 개념은, 액션 게임에서는 오래 전부터 있었던 규칙이나 게임 시스템으로써 복수로 존재하는 ‘목숨’ 개념의 연장선에 있다. 마리오가 세 번 이상 목숨을 잃으면 게임 오버란 규칙처럼, 혹은 3판 2승제로 승리가 결정된다는 격투게임의 규칙처럼 말이다. <니어 : 오토마타>가 독특한 것은 캐릭터들을 가역적인 인형으로 설정함으로써, 게임 시스템으로써 ‘복수로 존재하는 목숨’ 개념을 허구세계 안에 짜넣었다는 것에 있다. 여기서 캐릭터들은 각자의 가능세계에서 한 번뿐인 죽음을 여러 번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단 하나의 세계, 적어도 단 하나의 세이브 슬롯 세계 안에서도 여러 번의 죽음을 경험한다.

인간은 그 모습이나 움직임의 우아함, 아니, 존재에서조차 인형을 이길 수 없다. 인간의 인식능력의 불완전함은 그 현실의 불완전함을 불러오며, 그리하여 그 종의 완전함은 의식을 갖지 않든가 무한한 의식을 갖든가, 즉 인형이 되거나 신이 될 수밖에 없다. 죽음을 이해하는 인간은 적다. 대부분은 각오가 아니라 우둔해짐으로 이를 견딘다. 사람은 죽을 수밖에 없으니까 죽는거다. 맨몸의 인형은 이것을 소여받은 것으로 살아간다. — 영화 <이노센스> 중

어쨌든 <니어 : 오토마타>에서는 하나의 PC(이를 테면 2B)에 국한되지 않고, 여러 PC와 NPC들이 이러한 죽음을 세계 설정으로 받아들이고 인지하고 있기 때문에, 캐릭터 레벨과 플레이어 레벨이 분리불가능하게 되어버렸다. 즉, 위에서 말한 바처럼 이야기 레벨에서 죽음의 정의가 불명확하기에, <니어 : 오토마타> 혹은 액션 장르의 게임(혹은 폭력 게임)에서 아즈마 히로키가 말한 죽음과는 전혀 다른 형태의 죽음이나 삶/목숨이 나타나고 있는 셈이다. 그렇기 때문에, 플레이어는 게임 중간에 로드를 거치면서 어떤 “죽음”은 “상실”로 인식하고, 어떤 “죽음”은 “회복”으로 인식한다. 구체적으로 <니어 : 오토마타>에서는 ‘기억’이나 ‘경험치’, ‘레벨’ 따위를 상실하지만, 훼손되지 않은 ‘의체’나 소지중이던 ‘아이템’, ‘플러그인 칩’ 등을 회복한다.

이것이 아즈마 히로키의 사상에 어떠한 반론이 될지, 혹은 아즈마 히로키 사상에 의해 재반론이 될지 나는 알지 못한다. 다만 확실한 것은 <니어 : 오토마타> 혹은 액션 게임 안에서 죽음을 검토할 때 아즈마 히로키가 제안한 방식의 이원론은 부적절하다는 것이다. 동시에, 아즈마 히로키가 지적한 것처럼, 오쓰카 에이지가 말하는 ‘죽음’ 역시도 <니어 : 오토마타>에 적용하기에 문제가 있다. 오쓰카 에이지가 주장한 것처럼 기호적인 표현임에도 어떻게든 죽음과 마주한다고 해도, 그 죽음은 다시 기호에 의해서 무효화될 수 있다. 그렇기에 죽음은 어디까지나 허구세계 내에서 설정된 기호체계의 규칙이나 공준, 즉 기호의 코드에 의해서만 활성화된다. 아즈마 히로키가 말한 것처럼, 현실의 단 한 번 뿐인 죽음을 직접 마주하는 것은 허구세계 안에선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비평을 자처하는 이 글의 임무는 구체적으로 <니어 : 오토마타>, 혹은 더 나아가 상시적으로 목숨을 잃는 폭력 게임에서 죽음은 어떻게 체험되는가, 어떠한 의미를 지니는가,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하는 부분을 언어로써 기록하는 일이 될 것이다. 그것을 지금까지는 ‘허구 세계’라는 틀을 통해서 설명했지만, 이뿐만 아니라 다른 부분도 언급할 필요가 있다. 바로 게임이라는 매체의 특성, 게임 시스템과 이에서 비롯하는 상호작용성, 그러니까 게임-디자인과 게임-플레이를 언급할 차례다. 이어질 제 2부에서는 1부에서 논한 <니어 : 오토마타>의 허구 세계와 문제 의식을 바탕으로 하면서, 그 체험이 어떠한 것이었는지 논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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