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난폭함

—이융희 씨의 『BL진화론』 비판에 부쳐

이 글은 내 나름대로 미조구치 아키코의 『BL진화론』에 대한 감상을 남기기 위해 쓰였다.

하지만 이 글은 일단 이융희 씨의 『BL진화론』 비평 <‘진화된 BL’장르와 ‘주체’의 신화 —오타쿠는 대중이 될 수 있는가?>에 반박하는 형식으로 진행될 것이므로, 독자들은 이해를 위해 먼저 위의 링크를 읽고 스크롤을 내릴 것을 권한다.


이융희 씨의 비판에 가장 중점적인 부분은, ‘BL애호가’라는 정체성을 미조구치가 자연화하고 있다는 — ‘공동체’의 단일성(Identity)을 정당화하기 위해 ‘신화화’ 작업을 행한다는 문제제기다. 다음의 인용문을 살펴보자.

결국 'BL애호’는 마치 생물학/정신학적인 사건으로 국한되고, 현상적인 보편성을 갖지 못한 채 폐쇄적인 이야기로 귀결되고 만다. 해당 저술의 목적은 장르를 둘러싼 기표의 해석이 아니다. 장르의 기표를 해석하는 '나’, 그것도 여성으로서 남성의 신체를 가져와서 이야기해야 하는 '이상한 나’의 이야기이다.

이융희 씨는 이 인용문에서 a) 『BL진화론』의 저술이 ‘기표의 해석’이 그 목적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b) 그 이유는 ‘이상한 나’라고 하는 정상규범과 동떨어진 자아에 대한 분석이기 때문이다. c) 그런데, 이 ‘이상한 나’는 ‘현상적인 보편성’으로부터 스스로를 분리시키고 ‘생물학적/정신학적인 사건’에 국한시켜서 스스로를 자연화한 것에서 비롯한다.

결론부터 먼저 말하자면, 이것은 『BL진화론』에 대한 매우 난폭한 독해에 지나지 않는다. 『BL진화론』의 목적은 오히려 그러한 단일성(Identity)에 저항하기 위한 것이며, 궁극적으로 말하자면 퀴어성(The Queerness)을 탐구하기 위함이다. ‘BL’이나 ‘BL애호가’는 오히려 퀴어성을 탐구하기 위한 재료에 지나지 않는다. 이 글은 왜 이융희 씨의 글이 난폭한 독해인지, 그리고 어떻게 『BL진화론』의 목적으로 서로 다른 결론이 이끌어지는지 검토해보는 글이 될 것이다.


먼저 문제시하고 싶은 점은, 이융희 씨의 공격이 5장 「BL을 읽다/살아간다 — 여성들이 ‘교합하는’ 포럼으로서 BL — 」에 집중되어 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미조구치의 저서가 이러한 ‘비정상성’을 내면화하고 ‘자연화’하고 있다는 이융희 씨의 논거는, 요시나가 후미의 『요시나가 후미 대담집 그 사람과 여기서만 수다』의 표지에 대한 분석에서 비롯한다.

남성 캐릭터가 여성 대담자들의 ‘대리인’이란 사실 자체가 너무나 당연해서, 그것이 ‘외부자’에게 불가사의하게 보일 수 있다는 의식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중략) 남성 캐릭터가 BL 애호가 여성에게 ‘타인’이 아니라 ‘자신’이라는 사실은 한없이 자연화되어 있는 것(236쪽)

미조구치의 이 서술은 ‘정상규범’과 ‘BL애호가’들을 분리하고, 이것이 순수하고 투명한 정체성으로 회귀되는 것처럼 읽힌다. 이융희 씨의 비판을 그대로 따라가자면 『BL진화론』은 ‘공동체’를 위한 ‘신화’ — 즉, 다음과 같은 일직선적인 서사가 될 것이다. 1) ‘BL애호가’들은 일반적인 여성들과 다르다. 2) ‘BL애호가’들은 남성 캐릭터들의 표상을 ‘버추얼 레즈비언’적 성격으로 지니고 있다. 3) ‘BL애호가’들은 이러한 토대를 바탕으로, ‘진화형 BL’을 출현시켜 호모포빅한 ‘정형적 BL’을 극복했다. 4) 고로 ‘BL애호가’들은 존재하며 또한 정당하다.

하지만, 이는 의도적으로 5장의 성격과 3장의 존재를 무시한 독해이다(3장을 검토하면서 얘기하겠지만, 이융희 씨는 자신의 주장을 위해 이 책의 보론도 역시 무시했다). 1장, 2장, 4장이 텍스트를 중심으로 한 ‘기표의 해석’인 반면에 3장과 5장은 그러한 ‘기표’를 둘러싼 환경이기 때문이다. 만약 ‘기표’를 둘러싼 환경을 문제시해야 했다면, 이융희 씨의 비평은 마땅히 3장에 드러난 환경들에 대해서도 그 분량을 할애했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5장의 ‘신화’나 ‘서사’를 비평한 뒤에 이융희 씨의 글은 1장의 산만함이나 이론적 전제의 부재, 2장의 분석에 대해 “이러한 주장은 납득하기 어렵다”는 식 — 우리는 이 “납득”에 대해서 뒤에 더 자세히 다룰 것이다 — 으로 말할 뿐이다. 아마도 암시적으로 3장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부분은 다음의 인용문 뿐이다.

장르를 이야기하고 이론을 정리하기 위해선 장르로부터 나를 '타자화’시키는 과정이 중요하다. 타자의 자리에서 인식론적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존재론적으로 '그곳’에 존재하는 과정을 거친 후, 이제 다시금 대상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기 위해 빠져나오는 작업 역시 이루어져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융희 씨의 주장을 검토하기 위해서, ‘타자의 자리에서 인식론적으로 바라보는 것’이란 작업이 행해진 장소로써 3장 「게이의 시선? — 환상 같은 ‘야오이 논쟁’을 중심으로」를 살펴보도록 하자.


3장 「게이의 시선?」은 ‘야오이 논쟁’을 중점적으로 다루며, 장장 5페이지에 달하는 사토 마사키의 「야오이 같은 건 죽어버리면 좋겠다」란 에세이를 인용하고 있다. 여기서는 사토 마사키의 논의를 간략하게 요약만 하겠다. 사토 마사키는 게이로, 페미니즘 미니잡지인 『CHOISIR』에 위의 글을 발표했다. 여기서 사토 마사키가 언급하는 ‘야오이’란 그 장르 뿐만 아니라 그 장르의 향유자들 전체를 언급하는 것이며, 그 내용을 요약하자면 BL의 관음증적 성격 / 그에 동반되는 게이에 대한 스테레오 타입의 강화 / 이런 시선들로 인해 받는 게이들의 고통을 과격한 언어로 적고 있는 글이다.

미조구치는 이 글을 분석하면서 사토 마사키의 의도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 이 역시 우리의 관심사에는 조금 동떨어져 있으나, 사토가 게이이면서도 페미니즘 잡지에 글을 쓰게 된 점, 그리고 “야오이가 죽으면 여자가 되는 것일까? 그렇지 않으면 인간이? 게이와 여자, 게이와 레즈비언은 손을 마주잡을 수 있을까?”(104쪽에서 재인용)라는 문구에 미조구치가 주목한 이유는 앞으로의 논의 전개에 중요하다. 이후 더 자세히 다루겠으나, 미조구치가 이 과격한 글에 대해서도 “그녀들과 이 복잡한 문제에 대해서 대화를 하고 싶다는 호소”(125쪽)라고 해석하고 있다는 점을 일단은 기억해둔 채로, 다시 이융희 씨의 비판으로 돌아가자.

이융희 씨가 자신의 비평에서 ‘해결되지 못한 문제’란 무엇인가. 이 부분에 대해서는 중요하기 때문에 좀 길더라도 그대로 인용한다.

특히 해결되지 못한 문제는 이러하다. 현실 그대로의 대응이 아니라 이미지화된 폭력과 섹슈얼리티를 장르에서 구현한다면, 그것을 “왜” 구현해야 하는지 설득력이 있어야 한다. 해당 저술에서는 공과 수, 그리고 신적 자아에 다중적으로 이입하는 ‘나’의 존재로 폭력적 상황에서 주어지는 젠더적 저항과 시선을 벗어나 진정한 사랑을 각성하고 모순을 지적한다고 썼으며, 남녀물에서나 여성 커플물에서도 그리기 어렵기 때문에 남성이라는 기호를 선택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납득하기 어렵다. 이러한 행위의 묘사가 현실의 행위를 용인, 권장하는 것이 아님을 이야기하는 것이야 서브컬쳐 계열의 2D캐릭터를 성애적 대상으로 바라본다는 비판에 “이건 현실의 대상이 아니고, 이러한 망상과 현실은 명확히 구분될 수 있다”는 정형적 반박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BL진화론>이라는 책을 읽으며 기대했던 질문을 해결하지 못했다고 토로한 리뷰어들의 지적이 공통적으로 ‘질문’들에 대한 대답이 없었다는 것도 주목해야 한다.

이융희 씨는선정적인 묘사가 있는 그대로 그려지는 것이 아니라면 어째서 그렇게 그려지는지 충분한 논의가 되지 않았다, 혹은 미조구치가 제시한 것만으로는 납득할 수 없다고 적고 있다. 그런데, 이융희 씨의 언급에 따르면 ‘일반인’과 ‘자신’을 구별해야 할 ‘신화’인 『BL진화론』은, 사토의 글이 나오게 된 배경으로 1990년대의 게이붐을 들고 있다. 미조구치는 이 당시의 ‘게이 붐’은 지금처럼 LGBT를 존중하기 위한 성향의 것이 아니라 환상화된 게이의 이미지를 소비하는 것이며, “광의의 BL 애호와 현실에서 잘생긴 게이와 친구가 되고 싶다는 욕망이 연속적인 것으로 간주되는 경향”(107쪽)이 있다고 언급하고 있다. 즉, ‘일반인 여성’의 ‘게이와 친구가 되고 싶다’는 욕망과 광의의 BL 애호(90년대의 보이즈 러브의 전사前史에 해당하는 게이 로맨스)가 연속선상에 있었기 때문에 사토는 이와 같은 글을 적었다는 것이다. 물론, 미조구치는 잘생긴 게이와 친구가 되고 싶다는 욕망을 BL 애호와 일치시키지는 않는다. 그러나 BL 애호가 여태까지 그려온 게이가 “실제 게이와는 관계없이 ‘게이(와 같은 존재)’가 표상되는” 것(113쪽)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정리해보자. BL 애호가가 잘생긴 게이와 친구가 되고 싶었는지 어떠했는지는 이 책에서 다루지 않지만, 미조구치가 그 둘의 욕망이 일치한다는 주장을 부정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리라. 그러나, 1990년대에 있었던 일본의 게이 이미지를 광의의 BL이 차용하고 있음을 미조구치가 언급하고 있다는 사실은, BL애호가를 일반사회와 격리시키는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BL애호가 또한 게이를 다룸에도 불구하고 ‘이성애를 기반으로 한 성적 정상규범’에 오랫동안 따르고 있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미조구치가 반대하고자 하는 것은, BL 애호를 폐기함으로써(졸업함으로써) 마침내 ‘진정한’ 게이와 마주하는 것이다. 그녀는 마주하고자 하는 것은 오히려 BL이란 표상 — 시각예술이 되었든 문학이 되었든 특정한 재현을 통해서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지 않는가 하는 문제이다.

이 책은 이시다가 아마 ‘표상의 약탈’로 의미하는 바와 ‘(BL이라는 표상이, 현실의 그 표상에 대응하는 게이란 존재를 현실 사회에서 장차 더 나은 상황으로 만들기 위한 힌트를 부여하는 진화형BL’이란) 소위 동전의 양면이라고 인식하고 있다. 여성들에게 현실도피의 쾌락만을 부여하기 위한 BL을 포함해서, BL은 옥석이 섞여있는 활기찬 엔터테인먼트 장르로 남아왔기 때문에 ‘진화형 BL’로 태어났고, 더한 진화도 가능해졌다. 게이로 보이는 캐릭터를 표상하면서 현실의 게이와는 관계없다며 게이라는 존재를 약탈하는 BL작품을 비판하기보다, 게이로 보이는 캐릭터를 표상한 이상 그들의 현실보다 더 나은 상태를 현실적인 상상력으로 창조한 BL 작품을 평가하는 데 주력하는 것이 이 책의 자세이다.(125쪽, 강조 필자)

만약 이융희 씨의 말대로 “이건 현실의 대상이 아니고, 이러한 망상과 현실은 명확히 구분될 수 있다”는 말을 하기 위해서였다면, 인용문과 같은 말을 삽입할 필요가 있던 것일까? 여기서 미조구치가 ‘표상’이라는 말 — 이융희 씨 쪽에서는 ‘기표’로 표기되는 — 을 쓸 때에, 미조구치는 세 가지 분류에 따르고 있음을 보론에서 적고 있다. 그녀는 테레사 드 로레티스의 구분인 ‘행동/표상/판타지’를 응용하여 ‘현실/표상/판타지’란 분류를 쓰고 있다. 그녀에 따르면 현실은 직접적인 행동이나 실제 상태를 의미하고, 판타지는 개인적인 망상을 의미한다. 표상은 “누군가의 현실이 어느 정도 반영되거나 누군가의 개인적 판타지가 어느 정도 투영되는 것”으로, 표상이 직접적으로 현실에 영향을 끼치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개인적 판타지에 수용되고 끝나지도 않는 것으로 보고 있다(275쪽). 따라서 표상에는 사회적인 주체와 개인적인 주체가 동시에 작동하는 해석의 여지가 존재한다.

여성들이 남성 캐릭터 간의 연애 이야기를 자신들의 판타지를 투영한 표상으로서 생산하고 수용할 수 있다는 것은 그녀들의 개인적 주체(주관성)가 사회적 주체로서의 포지션에서 자유롭다는 점을 보여주는 한편, 애초부터 여성 독자가 남성 간의 이야기를 필요로 한다는(여성이 중심인 연애 이야기는 기피한다) 사실 자체가 그녀들의 ‘상처’를 보여주기 때문이다.(272쪽~273쪽)

이 인용문만을 따로 읽을 경우에는 표상을 사회적 책임으로부터 분리하는 정형적인 반박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125페이지의 선언과 맞추어 읽어보면, 오히려 마치 ‘개인적 주체’가 작동하는 것처럼 보이는 BL이라는 표상에 ‘사회적 주체’가 같이 작동하고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다른 사회적인 주체인 ‘진짜 게이’를 표상할 때에 윤리적인 고려가 책임이 있다는 결론 쪽이 자연스럽다.

이융희 씨의 논의가 난폭해지는 이유는, 바로 그 “납득할 수 없다”는 점에 근거한다. 이융희 씨의 글은 2장에서 BL의 애널섹스의 묘사나 강간이 현실의 그것에 대응하기보다는, 차라리 ‘BL우주’에서 일어나는 “다른 무엇을 대신하기 위한” 기호(찰스 펄스)로 다루고 있다는 점에 주목하고 있다. 먼저, 2장을 꼼꼼히 읽어봤다면 알겠지만 미조구치는 ‘정형BL’을 제시하면서 그것이 광의의 BL에 비해 “젠더 규범에 굴복한 듯 보인다”고 언급하거나 “젠더 규범에 대해서 후퇴했다”(76쪽~78쪽)고 명시하고 있다. 하지만 미조구치가 거기서 멈추는 것은 아니다. 미조구치는 일단 BL의 기호들이 어떤 기의들을 전달하는지 살펴본 뒤에(‘BL 우주’를 제시한 뒤에), 그 코드가 진공상태에서 도출된 것이 아니며 이러한 기표들이 ‘약탈’된 것임을 확실히 하기 위해, 바로 뒤에 3장 「게이의 시선」을 덧붙이고 있는 것이다.

대중문화를 연구하는 데 있어서, 만약 그 코드를 통해 어떤 이데올로기 조작이 있는지 알아보고자 한다면 움베르트 에코의 『대중문화의 이데올로기』정도의 분석으로도 충분하다. 이 글에 적용해 말하자면, 그것은 게이라는 표상을 어떻게 약탈하고 결국 정상규범으로 회귀당하는지까지 연구하고 거기서 멈추면 그만이다. 문제는 바로 그 ‘대중’이 일관적인 존재, 자기동일성(Identity)을 갖는 존재가 아니며 끊임없이 그 안에서 분열을 일으키는 존재라는 것에 있다. 미조구치가 주목하고자 하는 부분은 바로 이 분열이나 작은 틈새이며, 그 틈새는 수동적인 것이 아니라 능동적 주체들에 의해서 만들어진다는 점이다. 하지만 이 주체는 사회적으로 격리되어 자신만의 판타지를 이루는 것이 아닌, 사회적인 시선을 신경쓰면서 어떤 표상들을 만들어내고 있다, 그리고 그것이 퀴어적으로 해석가능하다는 것이『BL진화론』의 주장이다.


이융희 씨가 이하의 추리에 대해서 반박한다면 나는 기꺼이 받아들이겠다. 왜냐하면 ‘내심’이라는 것은 아무도 알 수 없기 때문에 그러나, 나는 이융희 씨가 ‘납득하기 어렵다’고 하는 순간에 그가 내심 부정하고 싶어했던 것은 대중문화의 이러한 복잡성 — 혹은 그 복잡성을 조명하고자 하는 작업이 아닌가 싶었다. 미조구치가 말한 “호모포비아와 이성애 규범(hetero-normative), 미소지니가 당연한 전제”이며 그것을 “BL 애호가 여성들이 도피하여 즐길 수 있도록 발명”(57)된 것이란 분석에서, 이융희 씨가 읽어낸 것은 “BL 애호가 여성”이 “일반 여성”과 구분되며 BL은 “생물학적/정신분석적 사건”으로 귀결한다는 결론이었다. 이융희 씨는 이에 대해서 다층적으로 복잡한 자아를 주목하길 요구한다. 그러나 나는 이 이면에 오히려 일반 사회에 통용될 만한 분석, 그러니까 BL이 호모포비아와 이성애 규범, 미소지니에 대해 저항인지 협력인지 이분하여 내놓으라는 요구처럼 느껴졌다.

왜냐하면, 그렇지 않다면 “버추얼 레즈비언”이라는 아이디어를 평가하면서 동시에 미조구치의 분석을 “결국 팬덤에서 창작-소비가 반복되는 그들만의 이야기가 되고 말 것”이라고 폄하하는 평가가 동시에 일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미조구치는 여기서 애호가와 연구가의 입장을 하이브리드하겠다고 밝히고 있으며 나중에 언급하겠지만 연구서로서는 엄밀성이 떨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조구치가 “버추얼 레즈비언”이란 아이디어를 내놓은 것은 BL 애호가가 바로 그러한 다층적인 자아를 향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기를 선언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 책이 연구서가 아니라면, 그것은 이성애 규범을 향한, 그리고 그 속에서 살아가는 BL 애호가들을 향한 선언문이다.

우리는 여기서 다시 제일 처음에 제시했던 결론으로 돌아올 필요가 있다. 이 책은 BL을 그 통로로 하지만, 실제로 탐구하고자 하는 것은 퀴어성의 가능성이다. 미조구치가 5장에서 BL 애호를 기호(취향)이 아니라 ‘성적 지향’으로 놓으며 발견하는 것은, BL 애호가들이 헤테로 시스젠더 여성에 속하면서도 반드시 이성애 규범을 따르지 않는 퀴어성을 품고 있다는 점— 헤테로 시스젠더 여성이라는 정체성(Identity)에 대한 균열이다. 그들의 욕망은 이성애 규범, 정상성 안으로 회수되지 않기 때문에 더 자세한 분류와 설명이 필요하다.

이성애 규범 아래에서 소수파의 ‘변태’ 취급받는 동성애자인 이상, 좋아하는 동성의 타입에 관해서도 ‘젊고 아름답다’라는 일반적인 이성애자와 같은 조건으로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좀 더 상세하게 자신의 욕망을 탐구해야 하고, 그 결과 판명된 자신의 욕망에 일반적인 범위를 일탈하는 것이 있으면 더 좋다는 감각이다. (중략) BL 애호가들이 자긍심과 부끄러움을 가지고 자신들을 ‘일반인’과 구별하며 소위 BL 섹슈얼리티의 소유자라는 사실을 서로 간에 표명하고, 나아가서는 그 틀 안에서 더욱 세밀한 ‘기호/지향’을 추구하여 상호표명하는 모습은 레즈비언과 게이와 닮아있다. (226쪽~227쪽)

그리고 미조구치는 이러한 가운데에서도 ‘난교 체질’이 있는 작가, 규범을 계속해서 일탈하고 월경하며 균열을 만들어내는 작가들이야말로 단지 향유자에 머물지 않고 적극적으로 ‘진화된 BL’을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제시한다. 이 ‘버추얼 레즈비언’들은, “남녀 포함한 행위체가 변혁을 위한 이론을 불러내는 용어로 ‘퀴어’”(270쪽)에 속한다. 그렇기 때문에, BL계를 사수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성애 규범이라는 정상성에서 벗어나는 가능성을 탐색하기 위해서 ‘진화형 BL’을 탐구하는 것이다. 거칠게 말하자면, 미조구치에게 있어서 BL은 채널이나 재료에 불과하며, 그녀가 지키고자 하는 것은 ‘이상한 나’가 아니라 바로 ‘이상성’ 그 자체에 있다. 미조구치는 BL 애호가들을 일반 여성들로부터 분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성애 규범(hetero-normative)이라는 정상성(normative)에서 여전히 생겨나는 균열이나 틈으로 BL 애호를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탈식민주의가 우리에게 일러주었듯이 영웅적인 저항과 동질적인 협력은 그렇게 단순히 나뉘는 것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미조구치는 일부러 ‘정형 BL’을 받아들이는 위에서 그 중에서도 적극적으로 현실 사회의 문제를 삽입하는 ‘진화형 BL’에 주목하는 것이다. 또한, 그렇기에 미조구치는 ‘진화형 BL’이 사토의 글이나 ‘진짜 게이’들의 ‘야오이’란 호명에 대한 응답 — 여러 주체들간의 커뮤니케이션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그것은 “남녀 포함한 행위체가 변혁”을 일으키기 위한 표상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융희 씨가 ‘납득’하지 못하는 것은, 바로 이 균열 혹은 그 균열의 크기가 아닌가? 그는 너무나도 강하게 ‘이성애 규범’이라는 ‘제국’의 힘을 믿고 있지는 않은가?


이융희 씨의 비평에 대한 반박은 여기까지이다. 그러나, 나 역시 미조구치의 글이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니 이 단락에서는 몇 가지 문제점 — 미조구치의 논의가 갖고 있는 난폭성에 대해서 지적하도록 하겠다.

이융희 씨와 마찬가지로, 나는 이 글에서 BL 애호가가 ‘이성애 여성’으로 규정지어지는 것에 대해 충분한 설명이 없었다고 생각한다. 작가 자신이 본인을 레즈비언이라고 밝히고 있다면, BL 애호가는 과연 ‘이성애 여성’ 뿐인가? 물론, 내 경험적으로는, 레즈비언이나 게이가 BL을 탐닉하는 경우는 많지 않으리라고 추론하는 것에 그렇게 큰 무리를 느끼지 않는다. 만약 이 책이 4장까지로만 이루어져 있다면, 우리는 이 연구를 텍스트 연구로 생각하고, 대상독자(모델독자)를 ‘이성애 여성’으로 둔 텍스트라고 봐도 무방하리라고 생각한다. 이융희 씨의 말을 빌리자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기표’를 다루는 연구이며, 표상론의 영역에 속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5장에서 ‘포럼’이나 ‘커뮤니티’로 BL 애호가들을 다루고자 한다면, 적어도 사회학적인 통계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또한 ‘진화형 BL’을 주목하고자 한다면, 적어도 ‘정형 BL’과 어느정도 비율로 존재하는지 또 얼마나 주목받고 있는지에 대한 언급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후자의 경우에는 BL소개서나 랭킹으로 갈음하는 정도이긴 하지만, 텍스트 분석 이상이라면 좀 더 엄밀한 데이터가 필요하다.

다음으로, “버추얼 레즈비언”이라는 규범 그 자체에 의문을 느낀다. 그녀는 MUD게임에 대한 에세이를 바탕으로 “버추얼 헤테로 섹슈얼”과 동일선상에서 놓고 이야기하지만, 이것은 텍스트와 게임을 동질한 것으로 놓는 데서 비롯한 착시에 불과하다. 채팅을 통해서 성적 판타지를 교환하는 것을 ‘인터넷 섹스’로 두는 것은 좋다. 그러나 거기에는 반드시 역할 연기(Role-Play)라는 행위가 따라붙는다. BL의 영역은 넓으며, 때에 따라서 TRPG에 가까운 연기를 통해서 게이 섹스 판타지를 즐기는 BL 애호가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은 지금까지 그러한 분야를 다루지 않았으며, 상업 BL 텍스트들만을 다루었다. 여기서 교환되는 성적 판타지를 위해서 반드시 연기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것은 연기와 같은 상호작용성을 같는다기보다는, 독해를 통해서만 이루어지기 때문에 이 책의 범위를 벗어나는 분석이라고 밖에 볼 수 없다. 이렇게 BL의 분야를 넓게 생각해 볼 때 BL 애호가들이 하는 것은 성적인 행위(Sexual Acitivity)라고 합의할 수는 있겠만, 이것이 성교(Sex)라고 단언하는 것은 이상하다. 노파심에 달아두지만, 여기서 성교는 삽입섹스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단, 그것이 적어도 두 명 이상의 사람들 사이에 일어나는 상호작용적인 행위이며 BL 애호에 있어서 ‘독해’가 중요시된다면 이를 성교라고 볼 순 없다는 얘기이다.

덧붙이자면 이융희 씨가 지적한 바와 같이, BL 애호가들 뿐만 아니라 다른 오타쿠 컬쳐의 작품에서도 후기를 통해 작가와 독자가 소통하는 경우는 많다. 그러나, 미조구치가 여기서 후기나 미니코멘트를 소환한 이유는, 상업 BL이라는 범위 안에서도 그러한 섹슈얼한 커뮤니케이션이 이루어질 수 있는 공간이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이다. 즉, 여기서 소통은 일상생활의 그것뿐만이 아니라, 섹슈얼한 커뮤니케이션이며 그렇기 때문에 작가와 독자는 섹슈얼한 커뮤니티를 형성한다. 그런데,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나는 그러한 ‘망상’을 나누는 것 — 자기표명이 ‘성적인 행위’일 수는 있어도 ‘성교’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게이와 레즈비언이 서로에게 자신의 기호를 표명하는 것이 성적인 행위일 수는 있어도 성교는 아니지 않는가. 그리고 그러한 의미에서 다시 한 번 “버츄얼 레즈비언”이라는 커뮤니티가 BL 애호가들을 묶는데 타당한 범주인가 의심스럽다. ‘진화형 BL’이라는 표상이 이성애 규범에 균열을 낳는다고 해서, 반드시 그 커뮤니티도 그러하리라고 단언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