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구약 감상.

최근 일주일 간에 성경을 읽었다. 나의 어머니는 신도이지만, 나는 딱히 신도는 아니고, 흥미 위주로 읽었다고나 할까. 아마도 어떤 ‘신화’로써, 그것도 이방인들과 버려진 자들의 신화였으며 이후 서양 세계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신화로써 읽었다는 것이 가장 그럴싸한 설명이겠다.

성경을 읽었다곤 해도, 전부 다 읽은 것은 아니고, 구약에서는 세 편 <창세기>, <탈출기>, <욥기>를, 신약에서는 <마태오 복음>, <루카 복음>을 읽었다. 나머지는 살짝 훑은 정도. 그 표기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한국 교회 공용 번역본’으로,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에서 발간한 것이다. 2009년쇄인데, 어머니께서 그래도 생각보다 열정적인 양반이셨군.

여하간 구약을 처음 읽으면서 깜작 놀란 것은 ‘구전 설화’스러움이 뚜렸했단 점이다. 한 마디로 말해 엄청난 짜깁기였다. 물론, 신약의 경우에는 각 복음서마다 예수의 행적을 다르게 기술하고 있기에 성경이 그러한 성격을 갖고 있음은 충분히 알고 있었다. 그러나 구약 창세기는 그 정도가 심할 정도다. 예를 들면 이런 구절들.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당신의 모습으로 사람을 창조하셨다. 하느님의 모습으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로 그들을 창조하셨다.”(창세 1:27)
“주 하느님께서는 사람 위로 깊은 잠이 쏟아지게 하시어 그를 잠들게 하신 다음, 그의 갈빗대 하나를 빼내시고 그 자리를 살로 메우셨다. 주 하느님께서 사람에게서 빼내신 갈빗대로 여자를 지으시고, 그를 사람에게 데려오시자”(창세 1:21–22)
“카인이 자기 아내와 잠자리를 같이 하니, 그 여자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았다. 카인은 성읍 하나를 세우고 자기 아들의 이름을 따라 그 성읍의 이름을 에녹이라 했다.”(창세 4:17)
“예렛이 백육십이 되었을 때, 에녹을 낳았다.”(창세 5:17)

*참고로 예렛은 아담과 이브의 세번째 아들인 ‘셋’의 후예다.

특히나 바벨에 대해 다루는 창세기 11장에는 “온 세상이 같은 말을 하고 같은 낱말을 쓰고 있었다”고 하는데, 이미 10장에서 “씨족과 언어와 지방과 민족에 따라” 갈라지는 민족에 대해 서술하고 있다. 만약 시간 순서대로 흘렀다고 한다면 말들이 서로 맞지 않는다. 이것은 아마도 성서가 이스라엘의 구전 설화, 그것도 ‘건국 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특히나 창세기에서 ‘이스라엘’이란 이름을 받는 ‘야곱’의 아들들의 이름은, 나중에 가면 ‘~족(族)’으로 다시 등장한다. 이를 테면 ‘레위 족’이니 ‘유다 족’이니 하는 식이다. 즉, 그들은 실제로 존재한 아들들이라기보다는 야곱 혹은 이스라엘이라는 하나의 부족 연합체 밑에 모였던 부족들의 상징이라 보는 것이 더 적절할 것이다. 즉, 이 (근친관계에 있었을?) 부족들의 창세설화를 한 데 모아 엮어낸 것이 구약 성서라고 볼 수 있으며, 아마도 권력 관계적인 문제 때문에 혹은 그러한 ‘다른 버젼’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을 당시 사회 풍토 때문에 서로 모순적인 구절들이 들어갔다고 보는 것이 옳으리라.

(물론, 이브 대신에 릴리스가 있었다던가 하는 해석은 있긴 하지만)

구약 성서를 지배하고 있는 성격은 “번성”과 “계약”이다. 이것들은 그러한 ‘건국 신화’적 성격에 주목할 때, 유목 민족이었던 유대인의 성격과 연관지어 읽을 수 있다. 창세기에서 가장 많이 하느님이 약속하는 것은 번성이다.

“자식을 많이 낳고 번성하여 땅을 가득 채우고 지배하여라.”(창세1:23)
“자식을 많이 낳고 번성하여 땅을 가득 채워라 (…) 땅에 우글거리고 그곳에서 번성하여라.”(창세 9:1–7)
“내가 너의 후손을 땅의 먼지처럼 많게 할 것이니, 땅의 먼지를 셀 수 있는 자라야 네 후손도 셀 수 있을 것이다”(창세 13:17)
“하늘을 쳐다보아라. 네가 셀 수 있거든 저 별들을 세어 보아라. (…) 너의 후손이 저렇게 많아질 것이다.”(창세 15:5)
“나는 네가 매우 많은 자손을 낳아, 여러 민족이 되게 하겠다”(창세 17:7)
“네 후손은 땅의 먼지처럼 많아지고, 너는 서쪽과 동쪽 또 북쪽과 남쪽으로 퍼져 나갈 것이다.”(창세 28:14)

이스라엘 민족에게 몇 번이고 약속하는 것은 바로 지금의 행복이 아니라, 후손과 자식을 수도 없이 많이 가져다 줄 것이며, 그들이 땅을 가득 채워 지배할 것이라는 약속이다. 여기서 나는 ‘약속’이라고 했는데, 이 부분은 아까 말했던 ‘계약’과도 이어진다. 구약의 하느님은 물론 절대신이지만, 그 명령은 계약의 형태를 띠고 있는 경우가 많다. 말하자면 하느님을 따르는 자에 대한 “계약”의보상으로 그들은 ‘우글거’릴 수 있게 된다. 심지어는 소돔과 고모라를 멸할 때, 아브라함이 하느님과의 계약을 두고 ‘협상’을 벌이기까지 한다. 의인 50명이 있으면, 45명이 있으면… 그렇게 숫자가 점점 작아지며 의인 10명이 있으면 소돔과 고모라를 살려두겠다는 “계약”이 성립된다.

그리고 이 “계약”에는 반드시 “표징”(징표)이 따른다. “다시는 물로 세상을 멸하지 않겠다”는 계약의 표징은 “무지개”이며, 아브라함에게 많은 자손을 주겠다는 계약의 표징은 “할례”다.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 이것이 내가 너를 보냈다는 표징이 될 것이다.”며 모세 앞에 직접 등장하기도 한다. 그걸로 모자라 지팡이가 뱀이 되게 하는 표징을 보여주기도 한다. 이는 아마도 유목민 공동체였던 유대인들이 (계속 하나의 땅에서 벗어나지 않아 이방인을 만날 가능성이 드문 농경 공동체와는 달리) 다른 사람들과 만나며 “계약”을 맺어야 했던 것, 그리고 거기에 ‘눈에 들어오는’ 뚜렷한 표징이 필요했기에 유래된 것이 아닐까.

후에 야곱의 이야기에서도 등장하지만, 야곱은 굉장히 사기꾼같은 인물인데 (웃음) 그 이름의 뜻부터가 ‘남의 자리를 뺏다’인 녀석이다. 그는 맏아들의 권리를 “계약”으로 사고, 또한 형인 에사우의 복을 아버지와의 “계약”에서 가로챈다. 즉, 잘못된 것이더라도 한 번 이룬 계약은 구약 성서 내에서 절대적으로 구동한다. 그 계약을 깨트린 이는 이스라엘 민족에서 떨어져 나온다. 즉, 다시 말하면 이 “계약”이 있고, 그 “표징”을 지니고 있는 한 절대적인 힘에 의해 그들은 계속해서 ‘번성’한다. 그것이 구약의 요체라고 할 수 있다.

이 계약들은 후에 <탈출기>의 모세에 이르러 구체적인 ‘율법’으로 변한다. 이것을 지키지 않는 자는 이스라엘 민족이 아니며, 이스라엘의 신에 의해 가호를 받을 수 없게 된다. 즉, 민족을 관리하고 다스리는 통치 수단으로써 혹은 그러한 수단에 대한 ‘설명’으로써 구약 성서는 존재한다. 이 이스라엘의 신이라는 부분이 재밌는데, 먼저 주 하느님 = 야훼는 스스로를 계속해서 “우리”라고 지칭한다.

“우리와 비슷하게 우리 모습으로 사람을 만들자” (창1:26)
“자, 사람이 선과 악을 알아 우리 가운데 하나처럼 되었으니”(창 3:22)
“자, 우리가 내려가서 그들의 말을 뒤섞어 놓아”(창 11:7)

이것이 작은 사실이라면 의외로 중요한 사실이 있다. 구약 성서에서는 다른 신의 ‘우상’만을 문제 삼을 뿐, 다른 신 그 자체에 대해 공격적인 태도도 보이지 않으며, 아예 그 실재에 대해 논하지 않는다. 그저 “이스라엘 민족”이라면 형상을 만들 수 없는 야훼 이외의 신은 믿어서 안된다고 끊임없이 강조할 뿐이다. 이를 테면 야곱을 사위로 둔 라반이 “자신의 신”을 훔친 일에 대하여 논한다거나, “아브라함의 하느님과 나호르의 하느님께서 우리 사이의 심판자가 되어 주시기를 바라네”라고 말하는 둥, 공공연하게 다른 신의 가능성이 나타나지만 이에 대해 하느님은 굳이 말을 하지 않는다. <탈출기>에서도, 파라오가 하느님 외에 다른 신을 믿기 때문에 그를 벌하는 것이 아니다. 그가 이스라엘 백성, 즉 ‘이스라엘의 하느님을 믿는 백성’들을 괴롭게 하였으며, 나중에 ‘그들이 야훼를 위해 제사지내려고’ 이집트에서 나가려는 일을 방해했기 때문일 뿐이다. 여기서 파라오의 경우에도, 말하자면 “일을 빠져나가려는 핑계를 대지마라”고 그들을 핍박할 뿐, 자신의 신을 들어 말하지는 않는다.

야훼는 자신을 “질투하는 신”(탈출 20:5)이라고 이르며, 그의 민족을 방해하거나 그의 민족이 그의 계약에서 벗어날 때만 직접 벌한다. 그러니까, “너희가 그들의 신들을 섬길 경우”(탈출23:33)만이 문제가 된다. “너희는 그들의 제단들을 헐고 그들의 기념 기둥들을 부수고 그들의 아세라 목상들을 잘라버려야 한다”는 말은, 그러니까 어디까지나 “너희가 들어가는 땅”, 그러니까 이스라엘 민족이 머무는 땅에 한한다. 이 당시의 구약 성서는 세계종교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유대인, ‘이스라엘 인’의 민족 종교를 상기할 때 이것은 불관용이라기보다는, 그들을 뭉치게 하기 위한 제약으로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아니라면 보이는 곳에서 족족 다 파괴하고 다녔어야 하는데(“주 너희 하느님께서 그들을 너희에게 넘겨주셔서 너희가 그들을 쳐부수게 될 때, 너희는 그들을 반드시 전멸시켜야 한다” 신명7:2), 이러한 배타적 규약은 아무래도 “모든 민족들 가운데에서 수가 가장 적다”는 이유로 그들이 계속해서 살아남는 것, 그리고 번창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기 때문에 만들어진 것이 아닐까 싶다. 그들이 관용을 택할 경우, 오히려 다른 민족에게 녹아 들어갈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란 것. 만약 그들이 지배적인 민족이며 무한히 확장해 나갈 수 있었다면, 오히려 이러한 규약은 그들에게 방해가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지금 예루살렘에서 팔레스타인과 계속해서 전투를 치르고 있는 모습에서 그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이방인들에게는 이렇게 할 따름이다.

“너희는 이방인을 억압하거나 학대해서는 안 된다. 너희도 이집트 땅에서 이방인이었다. 너희는 어떤 과부나 고아도 억눌러서는 안된다. 너희가 그들을 억눌러서 그들이 나에게 부르짖으면, 나는 그 부르짖음을 들어줄 것이다. 그러면 나는 분노를 터뜨려 칼로 너희를 죽이겠다. 그러면 너희 아내들은 과부가 되고, 너희 아들들은 고아가 될 것이다.” (탈출 22:20–22)
“너희는 이방인을 학대해서는 안된다. 너희도 이집트 땅에서 이방인이었으니, 이방인의 심정을 알지 않느냐?” (탈출 23:9)

그러나, 그렇다면 ‘하느님의 계약을 이행하는 자는 번성하게 하리라’고 하느님께서 약속했다면, 왜 현실에서는 고통받는 자들이 생겨나는 걸까? 이러한 의문에 대해서 제시하고 있는 것이 바로 욥기이다. 욥은 말하자면 “고통받는 모든 이”를 대변하는 존재로 나타난다. 그는 하느님이 인정한 의로운 사람이며, 한 번 자신의 몸을 제외한 모든 것을 잃었을 때도 “욥은 죄를 짓지 않고 하느님께 부당한 행동을 하지 않았다”고 하며, 자신의 몸에 문제가 생겼을 때도 “욥은 제 입술로 죄를 짓지 않았다”.

그는 왜 자신이 고통받는가, 왜 불의한 자들이 현실에서는 고통받지 않는가를 재차 묻는다. 그러나 하느님의 권위에 대해서는 감히 의심할 수 없기 때문에, 그저 자신을 빨리 죽여달라고만 빌 뿐이다. 그의 친구들과 젊은이가 그를 찾아와 담론을 벌이는 것이 욥기의 주된 구성인데, 욥은 “자신이 의로움에도 불구하고 고통받는” 수수께끼같은 일에 대해 하느님을 부르짖을 뿐이며 그 친구들은 욥의 말을 믿지 않는다. 그 친구들은 “그분은 공정하기에 고통 받는 자는 불의한 자다/불의한 자는 언젠가 벌을 받을 것이다/혹시 자네가 모르는 불의가 있을지도 모르지 않나”같은 반론을 내세운다. 물론, 욥기에서 욥은 의심할 여지 없이 의로운 자다.

재밌는 점은, 나중에 나타난 하느님은 그 누구에게도 손을 들어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욥에게 하느님이 하는 말은 “감히 네가 나와 송사를 할 수 있느냐”고 묻는 것이다. 정말 간략히 말하면 “님 천지 창조 가능? 베히모스 잡을 수 있음? 레비아탄 낚을 수 있음? 님 좆밥 깝ㄴㄴ” 정도의 이야기(…)로, 그가 하는 일에 대해서 욥은 시비를 하지도 심판을 할 수도 없다. 이는 ‘욥과 마찬가지로’ 틀린 말을 한 욥의 친구들에게도 적용된다. 즉, 하느님이 하는 일은 인간이 “논할 수 없다”. 당장에 일어나고 있는 불의한 자의 득세나 의로운 자의 고통은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나, 그것을 감히 인간은 논할 수 없다. 말하자면 “진리의 심사 불가능성” 혹은 “인간 능력의 한계”를 겸허히 받아들이란 얘기다.

단 하나, 욥이 욥기에서 하소연을 할 때 이루어진 것은 있다.

“아, 제발 누가 나의 이야기를 적어 두었으면! 제발 누가 비석에다 기록해 주었으면! 철필과 납으로 바위에다 영원히 새겨 주었으면!” (욥기 19:23–24)

누군가는 그의 고통을 기록한 것이다. 이 세상엔 의로움에도 고통받는 자가 있으며, 그것을 누군가가 기록한 것만큼은 변함이 없는 셈이다.

구약에 대한 이야기가 길어져서 신약에 대한 얘기는 다음 편에.


Originally published at noobcoela.egloo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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