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신약 감상.

신약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는 정말 ‘문제적 인물’이다. 그의 행보에 대해 이스라엘의 다른 학자들이 지지하지 않은 것도 이해가 간다. 왜냐면 그는 해석을 이용한 궤변론자이기 때문이다. 그는 물론 “모든 것이 이루어질 때가지 율법에서 한 자리 한 획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마태오 5:18)이라고 말은 한다. 그러나 실제로 그는 계속해서 율법을 어긴다. 이를 테면 그는 이렇게 말한다.

“자기 아내를 버리는 자는 그 여자에게 이혼장을 써 주어라”(탈출 20:14) 하신 말씀이 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불륜을 저지른 경우를 제외하고 아내를 버리는 자는 누구나 그 여자가 간음하게 만드는 것이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탈출 21:24)하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오히려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어라.

뿐만 아니라, 그는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다. 안식일에는 ‘무조건’ 쉬는 것이 ‘율법’이요, ‘계약’이다. 그러나 그가 안식일에 쉬지 않고 밀 이삭을 뜯거나 병자를 치료한다. 이는 기존의 성서에 의거하면 어불성설한 일로 당장에라도 ‘이스라엘 민족’에서 떨어져 나가야 하는 일이다. 그러나 그는 “그러니 안식일에 좋은 일은 해도 된다”고 말한다. 심지어 계약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표징에 대해서도 언젠가 “요나가 사흘 밤낮을 큰 물고기 배 속에 있었던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사흘 밤낮을 땅속에 있을 것이다”라고 말하며 반복해서 자신이 줄 수 있는 표징은 “요나의 표징”밖에 없다고 말한다. 그는 계약에서 가장 중요한 표징조차 지키지 않는, 매우 파격적인 존재인 셈이다.

중요한 점은, 그가 그러한 파격을 일으킨다고 해야할지, 궤변을 한다고 해야할지, 여하간 율법을 어기면서 그것을 정당화할 때마다 다른 종교의 말을 꺼내는 것이 아니라 바로 성서에서 그것을 꺼내어 온다는 점에 있다. 그가 만약 실재한 인물이라면, 그는 성서가 모순적인 말로 가득한 짜깁기이기에, 그것을 자신의 목적에 따라서 인용해서 ‘성서를 내파’할 수 있다는 통찰력을 가진 인물이라고 할 수 있겠다. 말하자면 여태까지 무조건적으로 따라야 하는 조건의 ‘율법’을 오히려 ‘해석’될 수 있는 가능성으로 열어두는 커다란 전환점을 찍었다고 할 수도 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는 반복해서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자”나 “믿음있는 자”만이 구원받을 수 있다고 강조한다. 이는 그가 로마인인 백인대장을 구한 일이나(마태오 8:5–13, 루카 7:1–10), 이스라엘 백성이 아닌 가나안 여자(마태오 15:21–28)를 치료한 일 등이 그러한 예시다. 예수 그리스도가 내세우는 비유들 중에 “아흔 아홉마리의 양이 아니라 잃은 한 마리의 양”이나 “돌아온 탕아”, “더 많은 빚을 탕감받은 채무자”를 더 기뻐하거나 사랑하다는 것은, 바로 이 뒤늦게 하느님의 뜻을 따른 자들을 의미한다. 그렇기에 더 큰 죄를 저지른 자들을 의미한다. 즉, 죄는 더 이상 복잡한 율법에 따라 심판 받는 것이 아니라, 탕감받으며 그것을 부끄러히 여길 필요가 전혀 없다.

여기서 ‘탕감’이라는 말을 썼는데, 위에서 “그것을 자신의 목적에 따라”에는 분명히 그 ‘탕감’이 관련되어 있다. 예수가 수도 없이 드는 비유의 공통점은 대체로 재산 분할에 대한 비유, 빚에 대한 비유이다. 또한 세리에 대한 이야기도 계속해서 나온다. 예수는 “부자는 현실에서 행복하기 때문에 이미 자신의 행복을 다 받은” 것이며, 가난한 자나 굶주린 자가 천국에 간다고 이야기한다. 즉, 예수 그리스도가 문제시삼았던 것은 ‘재산’, ‘부’, 그리고 ‘빚’에 의한 문제다. 부가 편재되는 것을 막고, 부자에게서 빈자로 흐를 수 있도록 그는 계속해서 새로운 계율들을 내세우고, 또한 빚을 탕감하거나 말소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다.

그가 안식일에 굳이 일을 하며, 그것을 거리낄 이유가 없다고 하는 이유도, 아마 안식일에 쉬는 동안 빚의 이자가 늘어났을 가능성이 높다. 즉, 추측하자면, 그 시대는 재정적인 문제로 크게 고통받았던 자들이 많았던 시대이다. 그들은 이미 명확한 “계약”과 그 “표징”으로는 도저히 구원받을 수 없다. 늘어나는 ‘빚’ 앞에 그들은 죄인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 시대에 “우글거려라, 번성하라”는 구약의 복음과는 전혀 다른 복음을, 예수 그리스도는 퍼뜨린다.

“네가 점심이나 저녁 식사를 베풀 때, 네 친구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유한 이웃을 부르지 마라. 그러면 그들도 다시 너를 초대하여 네가 보답을 받게 된다. 네가 잔치를 베풀 때는 오히려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저는 이들, 눈먼 이들을 초대하여라. 그들이 너에게 보답할 수 없기 때문에 너는 행복할 것이다. 의인들이 부활할 때에 네가 보답을 받을 것이다” (루카 14:12–14)

믿음 있는 자라면 그 누구든지, 그리고 특히나 가난한 자와 굶주린 자는 누구든지 구원받는다. 지금 핍박받는 자가 나중에 가장 대접받는 자가 된다. 그의 재물은 “하늘나라에” 쌓이며, 재물의 길과 하느님의 길은 양립할 수 없다. 나쁘게 말하면 이것은 순응주의적 자세를 가르치며 ‘버티라’고 이야기하는 것이며, 좋게 말하면 바로 그 ‘하루하루 버틸 힘’을 그들에게 나눠준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계속해서 그들의 부를 스스로 재분배하고, 이로써 가난의 해결이 가능해질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강한 믿음’에 근거한다. 그렇기에 예수 그리스도는 언제 하느님의 단죄가 내릴지 모르기에 항상 준비하라는, “게으름 피운 종”이나 “등불을 준비하지 않은 신부”의 이야기로 신도들을 불안하게 만들고 협박한다. 또한 본래 있었던 성서의 배타적인 면모도 적극적으로 차용한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왔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이제부터는 한 집안의 다섯 식구가 서로 갈라져, 세 사람이 두 사람에게 맞서고 두 사람이 세 사람에게 맞설 것이다” (마태 10:34–36, 루카12:51–52)

집안 식구조차도 아니고 재산도 아니고 오로지 믿음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이미 광신도의 지경. 그것을 예수 그리스도는 요구한다. 그는 이스라엘 민족에게만 내리던 축복을 온갖 ‘가난한 자, 굶주린 자, 핍박받는 자’들에게도 열어주었다. 그러나 그것은 지옥으로 가는 문이다. 전 글에서도 말했지만, 그 배타성은 오로지 이스라엘 민족이 ‘소수’였기에 그럭저럭 버틸 수 있었던 율법이다. 이제 ‘다른 신’의 가능성은 모두 ‘사탄’으로 수렴하며, ‘이스라엘 민족’은 어느 땅이나 있기에 지구 위의 모든 것은 ‘전멸’ 당해야 한다. 그는 성경의 율법을 제 목적에 따라 싸그리 무시할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으며, 신자들에게 맹목적인 믿음과 분쟁을 나누어주었다. 그는 “적그리스도”의 탄생에 대한 예견함으로써 이것을 무마하려 들지만, 현실에서는 보다시피 온갖 사이비 종교가 날뛰며 종교 전쟁은 끝이 없다. 이는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열어놓은 지옥문이다.

그러나, 달리 말하면, 시대가 바뀔 때마다 다른 예수 그리스도가 “성경 안에서” 나타날 가능성은 얼마든지 생긴다. 예수 그리스도는, 반복하지만, ‘인간의 능력으론 논할 수 없는 하느님’에 대해 끝없이 해석할 수 있는 여지를 남긴 것이다. 구약이 길게 율법에 대해 늘어놓는데 반해, 신약이 짧게 짧게 예수의 비유이자 삽화로만 이어지는 것도 바로 그 이유다. “들었어도 알지 못하도록” 적혀 있는 바로 그 삽화들을 통해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논의가 가능해진다. 그것도 예수가 재림하기 전이라면 “언제든지”. 예수 그리스도는 성경의 내파자로써, 자신의 율법도 얼마든지 ‘내파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심지어는, 그의 생애의 기록이 여럿으로 분열되어 서로 모순되는 것조차도 그 성격에 합치한다. 그는 얼마든지 ‘다르게’ 읽힐 수 있다.

성경이 이토록 오래 살아남은 이유는, 서로 다른 성격의 모순된 짜깁기들이 들어가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시대에 따라 때로는 구약의 말이, 때로는 신약의 말이, 때로는 같은 곳에서라도 서로 다른 말을 인용하여 이 책이 살아남을 가능성이 크다. 이 혐오와 분열의 시대에는, 어쩌면 (물론 그 율법을 그대로 지키는 것은 고리타분하겠지만) ‘자신을 위해’ 하늘에 재산을 쌓는 신약의 선행보다는, ‘자신도 이방인이었기 때문에’ 이방인에게 친절을 베푸는 구약의 선행이 나을지도 모를 일이다.


Originally published at noobcoela.egloo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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