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펌] 모에하는 남자 : 경파, 연파

<모에하는 남자(치쿠마 신서, 2005년)>

하지만 툭 털어서 말하자면, <전파대전>에서 엿보이는 오타쿠의 심리는 대담집이라는 포맷의 한계상 상당히 허전한 내용이다. 가령 정말로 오타쿠만의 심리적 특성이란 것이 있으며 그 결과 중 하나가 특유의 현실연애에 대한 부적응이라 가정하더라도, 그렇다면 그 심리는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가? 그리고 왜 발생하는가? 라는 가장 중요한 궁금증이 남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문제에 대해서는, 몇 가지 상반된 견해가 존재하는데…

이를테면 상기한 <전파대전>에서 인터뷰어의 역할을 맡은 혼다 토오루의 경우, 이 문제에 대해 가장 래디컬한 친 오타쿠적 해석을 내놓는 평론가 중 하나다. 그가 <전파남>, <모에하는 남자>등의 다양한 오타쿠 비평서에서 일관되게 전개하는 논리는, 오타쿠가 현실의 연애에서 멀어지는 근본적 원인이 연애를 바라보는 두 가지 관점 간의 타협할 수 없는 대립에 있다는 것이다. 그는 이것을 다양한 이름으로 설명하지만, 요를 말하자면 그것은 경파(硬派)와 연파(軟派)의 차이다.

“70년대 초반, 연애란 빈궁하며 정치나 사회에 대한 희망을 잃은 젊은이들이, 절망의 끝에서 찾아낸 폐색적 세계였다. 카미무라 카즈오의 <동거시대>야말로 당시의 젊은이들의 연애관을 그려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공전의 버블경기에 의해, 연애 역시 대량소비 시스템에 포섭되어 소비를 위한 상품이 되었다. 이 버블시대에는 ‘연애 매뉴얼 잡지’의 융성이 극에 달했는데, 남성지 중에서는 <핫도그 프1레스>가 그 대표격이라 할 수 있다. 미디어들은 “여자에게 인기를 끌기 위해서는 이런 헤어스타일을 하고, 이런 옷을 입고, 이런 화제를 꺼내면서…” 와 같은 일련의 ‘연애의 룰’을 젊은이들에게 지속적으로 각인시킨 것이다.

‘난파(일본어로 ‘헌팅,’ ‘작업’의 의미)’라는 말도 발명되었다. 연애란 이전까지는 남녀의 우연적 만남에서 시작되는 인연, 운명으로 생각되었지만, 난파의 발흥은 연애가 일종의 게임이 되었음을 의미한다. 애초에 ‘난파’라는 말의 어원은 ‘경파’에 대비되는 ‘연파’로(‘난파’란 연파軟派의 일본어 독음), 원래는 여자의 꽁무니를 쫒아다니는 경박한 남자를 의미하는 말이었다. 즉, 본래 모멸적 호칭이었으나, 80년대부터는 여자를 쫒아다니는 연파=난파야말로 스탠더드가 되고, 역으로 경파 쪽이 비웃음을 당하는 시대가 되었다.”

젠더-PC적으로 꽤 엉망진창인 발언이지만, 그 지적은 잠시 뒤로 미루고 일단 문맥에 집중해 보자. 어쨌든 여기서 요지는 “연애란 무엇인가? 무엇이어야만 하는가?” 에 대해 강력한 의견의 대립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연애를 하는 동기와 방법에 대한 입장의 차이다.

여기서 ‘경파’란 곧 ‘로맨스’로서의 연애를 의미한다. 그리고 로맨스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진정성과 박력으로 넘치는 순수한 애정이다. 이 ‘진심’이 없다면 연애가 아니라고 보는 고지식한 사고방식이 완고(硬)한 것이다. 이 관점에서 보면 연애의 다양한 공식, 기술, 매뉴얼 따위는 알맹이가 없는 모조품일 뿐이며, 따라서 경파 연애의 양상은 자연스럽게 우연과 감정의 힘에 의지하는 것이 된다.

이 반대에 있는 ‘연파’ 연애란 ‘게임화’된 연애다. 그리고 게임의 목적은 엔딩이 아니라 과정의 즐거움에 있다. 마찬가지로, 연파 연애의 목적이란 연애 상품으로서 자신을 가다듬고, 파트너를 경쟁적으로 포획하며, 커플들을 위해 자본주의가 마련한 다양한 엔터테인먼트를 향유하는 일련의 과정의 게임적 즐거움이다. ‘진실한 사랑’ 같은 따분한 명제에 대해 유연(軟)하게 눈을 감는 이 관점에서 중요한 것은 ‘왜’ 하느냐가 아닌 ‘잘’ 하는 것이며, 연애의 방법 역시 고도의 규칙에 기반한 게임적 경쟁이 된다.

하지만 경파든 연파든 어차피 연애와 연이 없는 오타쿠들이 이 구분과 무슨 상관일까? 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혼다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오타쿠들이 갈망하는 연애의 모습―바로 모에 문화에서 그려지는 연애의 양상이 매우 뚜렷하게 반(反) 연파적이라는 사실이다.

“모에 컨텐츠에서 다루는 연애 이야기를 다양하게 접하다 보면, “남자가 여자를 구슬리는” 전개가 극도로 적다는 것을 느낄 것이다. 물론 ‘난파’ 따위는 기본적으로 일어나지 않는다. 대부분의 경우 ‘소꿉친구’ ‘여동생’ ‘동급생’등의 일상적 관계성에서 서서히 연애관계로 이행하며, 그것도 남자 쪽에서는 왠만해서는 먼저 행동에 나서지 않는다. 이것은 연애자본주의 측에서 오타쿠들을 포섭하는 작품인 <전차남>과 비교해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전차남>에서는, 오타쿠가 커리어 우먼을 구슬리려 하지만 용기가 없어 “좋아한다”는 말조차 하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린다. ‘사내답지 못한 남자’로서 오타쿠가 그려지는 것이다. 거기서 상대측 여성 (에르메스)는 “힘내”라는 말로 전차남을 위로한다. 즉, ‘남자는 여자를 구슬려야 한다’는 연애자본주의의 룰을 오타쿠에게 가르치는 것이 에르메스의 역할이다.

모에 컨텐츠에서라면 절대로 이런 전개가 일어나지 않는다. 가령 전차남과 에르메스가 모에 컨텐츠에 등장한다면, 연애경험이 풍부한 누님 캐릭터인 에르메스가 적극적으로 전차남에게 대쉬하거나, 경우에 따라서는 기가 세고 프라이드가 높은 것이 화가 되어 스스로 전차남에게 좋아한다고 말할 수 없는 에르메스가 혼자 공회전하다 울음을 터뜨리는… 그런 전개가 될 것이다. 어느 쪽이든 전차남(오타쿠)가 ‘남자답게 여자를 구슬리는’ 전개는 사실상 있을 수 없다. 모에의 세계에서는, 연애관계란 ‘강한 여성 측으로부터 내려오는 것’ 이거나, 또는 ‘미묘한 일상의 관계가 어느새 연애관계로 발전하며, 동시에 지금까지의 관계도 계속되는’ 것이 된다. 이것이 모에의 세계에서의 연애의 룰이며, ‘남자가 여자를 억지로 구슬리는’ 마초이즘은 주의깊게 배제되어 있다…”

오타쿠 매체가 묘사하는 연애가 현실의 연애와 많이 다르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누구나 알 수 있는 사실이다. 혼다는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연파 연애의 배제’가 그 차이의 핵심이라고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조금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행락지에서 열심히 작업을 해서 마구 섹스를 할 목적으로 몸을 키우는 남자, 어장관리용 문자를 뿌리다 명품을 받으면 러브호텔에 가는 여자 같은 캐릭터가 오타쿠 매체에 등장할 수 있는가? 를 생각해 보면 이해가 빠를 것이다. 이것은 일단 인상비평적 레벨에서는 상당한 설득력이 있는 관찰이다. 오타쿠 매체에서 만약 이런 유형의 캐릭터가 등장한다면, 그건 99%의 확률로 두 가지 경우 중 하나다. 처음부터 혐오스럽게 조형된 악역과 조연이거나, ‘사실은 순수’ 라는 경파적 내면으로 갭 모에를 노렸거나. 양쪽 모두 해당되지 않는, 진정한 의미에서 연애를 연파적으로 ‘엔조이’하는 가치관을 묘사하고 이입하는 것은 오타쿠적 모럴에서는 매우 용납되기 어려운 범주의 표현이다. (그래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면, 비처녀 논란에 광분하는 오타쿠들을 생각해 보자…)

이 경향은 모에 붐을 전후한 서브컬쳐 작품들을 비교해보면 조금 더 명확해진다. 예를 들면, 오타쿠와 연애의 관계를 다루는 것에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매체인 에로게의 경우, 모에 발흥 이전의 여명기에 등장한 <동급생>, <도키메키 메모리얼> 등의 고전을 보면 최근 작품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현격한 ‘게임적 연애’의 요소를 확인할 수 있다. 맵 탐색, 시간대 분석, 호감도 축적, 세이브/로드 노가다 등의 치열한 공략 없이는 히로인의 마음을 얻을 수 없는 시스템인 것이다. 오타쿠적 가상연애의 또 다른 축인 러브코미디 만화의 경우도, 초창기의 명작인 <메존일각>처럼 주인공이 수많은 오해와 연적을 넘어 조금씩 전진하는 플롯을 갖고 있거나, <상남2인조>의 주인공 귀폭 콤비처럼 경박한 음심을 캐릭터 요소로 삼는 인물들이 흔히 등장하는 것을 보면, 모에의 대두 이전의 서브컬쳐 소비자들은 연애란 일종의 게임, 주인공(=나)은 그 적극적 플레이어라는 관념을 비교적 무리 없이 수용하고 있었다고 추측해 볼 수 있다.

하지만 ‘비쥬얼 노벨’을 표방한 Leaf, 마에다 쥰의 순애 시나리오를 앞세운 Key등의 제작사가 90년대 후반부터 시장의 흐름을 선도하면서, 에로게의 재미는 압도적으로 그 서사성에 의존하게 되며, 분기를 선택하는 것 이상의 게임성을 찾아보기 힘든 문자 그대로 ‘시각적 소설’의 형태가 주류를 이루게 된다. 90년대 후반과 2000년대 초반으로 러브코미디 시장을 각각 양분했다고 할 수 있는 히트작 <I’s>와 <딸기 100%> 역시, 아이돌 여자친구를 무력하게 바라보는 입장인 세토, 그리고 희대의 고자 캐릭터로서 두고두고 회자되는 마나카를 각각 주인공으로 내세운 것에서 시대의 흐름을 짐작할 수 있다. (<상남2인조>에서 껄떡쇠의 면모를 보인 영길이 후속작에서는 레미의 섹스어필에 당황하는 수동적 인물로 변화한 것 역시 꽤 시사적인 부분이다.) 그리고 이 전반적 변화를 관통하는 대전제는, 바로 연애의 양상이 주인공(=나)의 노력으로 쟁취해야 할 대상에서 우연과 운명(소설적 서사)에 의해 찾아오는 ‘사건’으로 변모했다는 것이다.

이 뚜렷한 연파 지양-경파 지향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혼다는 이것이 바로 연파(연애자본주의)를 혐오하며 경파(순애)를 갈망하는 모에 시장의 소비자, 오타쿠들의 심리가 투영된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리고 동시에, 이러한 연파혐오 경향이야말로 오타쿠들이 (연파가 주류를 이루는) 현실의 연애에 적응할 수 없는 이유라는 관점이 제시된다. <전파대전>의 권두에 등장하는 문답은 바로 이 맥락의 연장선에 있다고 할 수 있다.

타케쿠마: 하지만 <전파남>을 실제로 읽어 보면, 사실은 복잡한 구조의 책이 아닌가요? 단순히 연애를 부정하는 내용이라 잘라 말할 수는 없고, 순애는 인정한다, 같은 측면이 있지요?

혼다. 네. 순애를 관철하다 보니 2차원의 미사키 선배에 도달해 버렸습니다(?ω?)

타케쿠마: 그것이 ‘전파남’이 전파남인 이유이겠습니다만 (웃음)

즉, 혼다적 정의에 따르면 [오타쿠 = 연파적 현실에서 좌절된 경파 연애의 욕망을 픽션으로 해소하는 사람] 인 것이다.

글쎄, 그렇다면 이 오타쿠론은 어디까지 신뢰할 수 있을까?

현상적 분석의 면에서 본다면, ‘연파의 거부’ 라는 오타쿠 매체의 특징을 잘 포착했다는 것 만큼은 큰 이견을 제시하기 힘들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 특징이 오타쿠와 연애의 관계를 파악하는 중요한 단서라는 착안 역시 아마도 사실일 것이다. 문제는 “오타쿠=경파 연애를 원하는 집단” 이라는 심리적 분석이다.

가장 마음에 걸리는 것은, 이 가정이 오타쿠들에게 지나치게 유리하다는 점이다. 사실 혼다의 오타쿠론은 문화 평론보다도 오타쿠들의 명예회복을 위한 정치적 수사에 가깝다. 연애시장의 낙오자로서 열패감에 시달리는 오타쿠들에게, “너희는 순수할 뿐이다, 오타쿠는 옳다, 잘못된 것은 사회의 시스템이다” 식의 당위성을 불어넣는 것이 혼다의 주장이다. 그가 평론가로서 성공할 수 있었던 원동력도 이 점에 있다. 아즈마 히로키나 사이토 타마키 등, 차가운 학술이론을 현실과 짜 맞추는 퍼즐에 가까운 비평을 전개하던 기존 평론가들과 달리, 그의 의분에 찬 문제제기는 오타쿠들에게 강한 심리적 위안을 주는 호소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지적 스노버리에 가까운 다른 평론가들의 팬덤과 달리 그의 팬들이 유달리 컬트적 성격을 가진 것에서도 나타나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그의 주장은 더욱 주의 깊게 의심해 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 논리를 자세히 살펴보면, 그의 오타쿠 변론이 ‘순수성’과 ‘능동성’이라는 두 가지 전혀 다른 문제를 엮는 트릭에 의존하고 있는 점을 깨닫게 된다.

예시를 통해 설명해 보자. 위에서 인용했던 혼다의 <전차남> 비판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전차남>은 연애자본주의 논리를 수용한 작품으로, 주인공에게 능동적, 남성적 성 역할을 강요하고 있다. 만약 이것이 오타쿠의 창작물이었다면 이와 반대로 순애물이 되었을 것이며, 주인공도 수동적 인물이 되었을 것이다.”

마지막 항을 잘 생각해 보자. ‘순애를 그리면, 수동적 남성이 된다.’ 이건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무수한 순정마초들이 등장하는 국산 드라마 한 편만 보더라도 이게 전혀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애초에 혼다가 순수한 연애관을 지칭하는 말로 사용하는 ‘경파’ 역시 ‘경파 남자, 경파 학원물’ 같은 일반적 용법에서는 초식남이 아니라 하드보일드 마초를 의미하는 단어에 가깝다. 어떻게 뒤집어 보더라도, 단순히 순애를 지향한다는 이유로 수동적 남성이 등장해야 할 필연적 이유는 없다.

최대한 관용적인 해석을 적용해서, 관념적 성 역할 자체가 불순한 연애자본주의의 산물이라 가정하더라도, 그렇다면 이 관념을 탈피한 순애물이란 남녀 중 어느 쪽에도 일방적 성 역할이 강요되지 않는 평등한 모습이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현실의 모에 컨텐츠는 혼다가 말한 것처럼 히로인들의 일방적 애정을 즐기는 소위 ‘둔감형’의 수동적 남성상으로 범람하고 있다. 이것은 결국 오타쿠들이 픽션에서 수동적 남성상을 필요로 하는 이유가 ‘순애’나 ‘경파지향’과는 별 관계가 없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그 진짜 이유는 뭘까? 그리고 혼다는 왜 그 이유에 대해 말하지 않는 것일까?

앞서도 말했듯이 혼다의 비평에는 명백한 목적성이 있으므로, 여기서는 더욱 의혹이 짙어진다. “오타쿠들은 경파 연애를 하고 싶다”는 것은, 상술했듯이 오타쿠들에게 매우 유리한 주장이다. 이 관점에서 그들은 단순한 연애시장의 패배자가 아니라 일종의 연애파업자로 볼 수 있고, 그 상황을 낳은 원인은 잘못된 시스템에 있다고 주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에 비해서 “오타쿠는 수동적 연애를 하고 싶다”는 입장은 사실상 변론의 여지가 없다. 이렇게 말하면 오타쿠들의 연애 낙오란 단순한 자업자득일 뿐이다. 따라서 혼다의 입장에서는, ‘순애를 지향하면, 필연적으로 수동적이 된다’는 인과관계를 억지를 부려서라도 성립시킬 필요가 있었던 것이 아닐까? 조금 더 추론해 보자면, 오타쿠들이 수동적 연애를 필요로 하는 진짜 이유에는 오타쿠 옹호론의 입장에서는 당당하게 밝힐 수 없는, 어떤 윤리적으로 불쾌한 욕망이 숨어있을 것이라고 의심해 볼 수 있지 않을까?

물론 그런 욕망이 존재하더라도 혼다는 그것을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이 “오타쿠는 옳다”라는 결론을 미리 설정하고 시작한 그의 오타쿠 변론이 가지는 한계다. 이 의문점을 과감하게 파헤치기 위해서는, 오타쿠에게 더욱 무자비하며, 르상티망의 해소라는 이해관계에서 자유로운―일종의 외부자적 시선이 요구된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각도에서, 오타쿠의 어두운 치부를 날카롭게 공격하는 목소리 역시 평론의 세계에는 물론 존재한다. 2008년 일본의 서브컬쳐 업계를 강타한 문제작 <제로년대의 상상력>과 함께 화려하게 등장한 안티 세카이계 비평가, 우노 츠네히로가 그 주인공이다.


Originally published at https://twitter.com/hnbt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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