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얼레트리 2 - Thin Red Line

1) Thin Red Line ::
한 가지 일화가 있다.
어떤 남자가 자신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약을 먹다가 그만 진통제에 중독이 되어버렸다. 곧 남자의 육신은 피폐해졌고 그것을 보다못한 스승과 아내는 그 남자를 정신병원에 가둬버린다.
자신이 폐결핵 치료를 위해 일반 병원에 온 줄 알았던 그 남자는 곧 자기가 속았음을 깨닫고, 의사에게 자신은 정신병자가 아니라고 항변하지만 의사는 그 말을 믿어주지 않는다.
이 이야기는 일본 근대문학을 대표하는 작가인 '다자이 오사무'가 실제로 겪은 일이며 동시에 이 일화는 그의 자전적 소설인 『인간실격』에도 잘 묘사되어 있다.
여기서 보호자는 현재 그의 정신상태가 ‘비정상’이기 때문에 정신병원에서 치료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반면, 자신의 의지와 달리 이송된 환자는 스스로가 정상이라고 주장한다. 사실상 서로가 주장하는 바가 다를 때 ‘비정상’과 ‘정상’에 대해 명확한 구분을 하기란 어려운 것이다. 과연 무엇이 ‘정상’이고, 무엇이 ‘비정상’인가?
재미있는 점은 마리얼레트리 2권을 꿰뚫는 주제가 바로 이 질문과 일맥상통 한다는 것이다.
“There’s only a thin red line between the sane and the mad.”
이성과 광기를 구별해주는 것은 가느다란 붉은 선 뿐이다.
- James Jones,『The Thin Red Line』 (Charles Scribner’s Sons, 1962)
마리얼레트리 2권의 부제인 Thin Red Line이 의미하는 것은 작가 후기에도 잘 나와있는데, 크게 두 가지 의미가 있다.
1. 근대 영국군의 별명. 소수정예.
2. James Jones의 소설과 동명의 영화에 나오는 대사. 이성과 광기를 나누는 얄팍한 경계선.
작가는 소수정예의 모습과 동시에 약물로 인한 이성과 광기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고있는 해병대에 대한 중의적인 표현으로 이 단어를 골랐다고 하는데, 책을 다 읽은 후에 곱씹어봐도 이만큼 적절한 표현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절묘한 단어 선택이다.
다만, 개인적으로 여기에 한가지 더하고 싶은 내용은 이 표현이 비단 해병대에게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갑판장인 샤오지에와 이비를 비롯한 갑판병들과의 관계. 나아가서는 잿빛 10월 승조원 전원에게도 관련이 되는 표현이라는 점이다.
chap.10의 의무장과 갑판장의 대화에서도 은유적으로 나오는 이야기지만, "이성과 광기를 나누는 얄팍한 경계선"을 살짝 다른 표현으로 바꾸면 다름아닌 "정상과 비정상을 나누는 얄팍한 경계선"이 된다.
물론, 엄밀히 말하자면 마리얼레트리 2권에서 정상과 비정상을 구분하는 경계선 자체를 찾는 일에 포커스를 맞추고 있지는 않다. 오히려 작중에서 다루고 있는 문제는 이 얄팍한 경계를 어떠한 시각에서 바라볼것이며,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에 대한 문제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데, 특히 "본디 정상이 아닌 세계에서는 역으로 광기가 이성으로 취급된다" 는 샤오지에의 대사가 이를 잘 보여주고 있다.
이성과 광기 사이의 경계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고있는 해병과 마찬가지로, 정상과 비정상 사이의 경계에서 주저하고 있는 존재가 바로 잿빛 10월의 승조원들이다. 이 점을 잘 알고있었던 카밀라 함장이 전편에서 원일에게 넌지시 부탁한 것은 경계선 위에서 주저하고 있는 아이들을 바르게 이끌어달라는 메시지에 가까울 것이다.
2) 마리얼레트리 2의 구성 ::

마리얼레트리 2권의 전개는 크게 두 가지 요소를 축으로 이야기가 전개되는데,
하나는 샤오지에와 이비의 갈등을 통한 사건 전개.
다른 하나는 갑판부와 해병대의 대비를 통한 주제 전개이다.
후자의 경우는 위에서 간략하게 짚고 넘어왔기 때문에 여기서는 샤오지에와 갑판병들과의 갈등을 이야기 해보자.
"싫은 것을 싫다고 하지도 못하고, 또 좋아하는 것도 쭈뼛쭈뼛 훔치듯이 전혀 즐기지 못하고, 그러고는 표현할 길 없는 공포에 몸부림쳤습니다. 즉 저에게는 양자택일하는 능력조차 없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뒷날 저의 소위 ‘부끄럼 많은 생애’의 큰 원인이 되기도 한 성격의 하나였던 것 같습니다."
- 다자이 오사무, 『인간 실격』 (筑摩書房, 1948)
혹시 ‘착한아이 증후군’이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연령에 따라 '착한사람 증후군', '좋은사람 콤플렉스'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리우는 이것은 타인으로부터 착한아이라는 반응을 듣기 위해 내면의 욕구나 소망을 억압하는 일종의 강박증을 말하는데, 의학계에 정식으로 등록되지 않은 일종의 신조어이지만 외국에서도 ‘The Good Child Syndrome’ 등의 명칭으로 곧 잘 불리는 개념이다.
이러한 증후군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행동 패턴은 주로 다음과 같이 나타나는데,
1. 자신의 안 좋은 일을 꾹꾹 눌러담으며 잘 표현하지 못한다.
2. 다른 사람의 부탁을 거절하기 어려워하며 어렵게 거절하더라도 곧 후회한다.
3. 쉽게 상처를 받으며 동시에 오래 간다.
4. 표현을 잘 하지 못하며 말을 하기보단 듣기를 더 편하게 느낀다.
바로 마리얼레트리 2권의 주인공인 갑판장 ‘샤오지에’의 이야기이다.
기본적으로 샤오지에는 자상하고 배려심 많은 성격이지만, 동시에 타인과의 트러블을 극도로 두려워하는 성격을 가지고 있다. 덕분에 힘든 일이나 싫은 일을 부탁받아도 거절하지 못하는데 이것이 갑판병들에게 고스란히 부담으로 다가오고, 갑판병들은 갑판병대로 목숨의 은인인 샤오지에에게 불만이 있어도 그것을 드러내지 않고 마치 로봇마냥 묵묵히 따르기만 한다. 결국 작전 수행중 샤오지에가 이비를 구하는 과정에서 서로의 어긋나있던 가치관이 충돌하게 되고, 샤오지에와 이비의 불화가 이야기를 이끌어 나가는 소재가 된다.
특히 주인공인 원일의 눈을 통해 샤오지에와 이비의 대조적인 성격&가치관을 끊임없이 보여주고 있는데, 샤오지에의 배려심이 잘 드러나는 흑차(p.56), 남들이 좀 더 자신을 의지해주길 바라는 마음이 드러나는 목욕탕 사건(p.94), 쉽게 상처받고 그래서 더욱 더 남들에게 미움받고 싶지 않아하는 성격 등(p.200/p.206) 굉장히 구체적인 묘사를 보여주고 있다.
한편, 이에 대응하는 이비의 성격 또한 꾸준히 묘사되는데, 철저하게 자신을 죽이고 샤오지에만을 걱정한다던가(p.100/p.150), 그로인해 샤오지에가 자신을 지키려다 다친것에 대한 분노와 가치관의 충돌(p.191) 등, 서로 다른 가치관이 어떻게 어긋나고 충돌하는가에 대한 과정을 굉장히 친절하고 세심하게 보여준다.
마리얼레트리 2권의 클라이막스는 역시 샤오지에와 이비의 대립이 풀려나가는 과정에 있다. 마리얼레트리는 기본적으로 웃으면서 즐길 수 있는 유쾌한 소설이지만 내심 감탄도 많이 하게되는 작품인데, 그중에서도 최고는 바로 샤오지에와 이비의 관계를 차밥에 비유한 장면을 꼽고 싶다.
고고하며 다른 음식과 섞이지 않았을 때 비로소 가장 순수한 맛을 느낄 수 있는 차. 쇄청. 그에반해 한쪽은 섞이면 주변의 맛까지 망치는 싸구려 콘비프. 맛이 없는게 당연할 정도로, 서로 자기주장이 강한 두 요소가 만났을때는 반드시 부딪치게끔 되어있다. 하지만 동시에 이 차밥은, 해인의 말대로 따뜻하다.
나는 이처럼 샤오지에와 이비의 관계를 고작 음식에 불과한 차밥에 비유한 것이 굉장히 마음에 와 닿는다. 만약 둘 사이의 관계를 호화찬란하거나 거창한 것에 비유했다면 이토록 감동받지는 못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차밥이 샤오지에의 변화를 상징한다면 코코아는 샤오지에의 직접적인 성장을 상징하는 매개체다. 물론, 그렇다고해서 샤오지에가 전혀 다른 사람처럼 바뀌지는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코코아는 차밥과 마찬가지로 따뜻하고, 또한 샤오지에는 원일의 말대로 여전히 좋은 사람이니까.
3) 마리얼레트리 2의 재미를 더하는 부가적 요소 ::
마리얼레트리 2권이 오랫동안 나오지 못한것에 대해 작가가 한을 품은건지 아니면 원래부터 이런 전개인지는 알 도리가 없지만, 비교적 깔끔하게 마무리한 1권과는 다르게 2권은 상당히 많은 떡밥이 등장한채 마무리가 되었다(이것이 3권을 향한 작가님의 집념인가..)
우선 서보라라는 새로운 캐릭터가 등장했다. 물론 아직까지는 베일에 싸인 캐릭터이지만, 주인공인 원일에게도, 해인에게도, 또한 다른 잿빛 10월 승조원에게도 각기 대척점에 위치할 수 있는 캐릭터이기에 무척 재미있는 캐릭터이다.
일단 원일과는 고향이 같은 진해라는 떡밥이 나온데다, 원일 스스로 이성과 광기의 경계선에 대해 생각하게 만들 정도로 서로 가치관이 끝내주게 안맞는 캐릭터이다.
또한, 맛없기로 명성이 자자한 삶은 콩 통조림을 아무렇지도 않게 먹는 모습이나, 달디 단 홍차, 음식은 영양만 있으면 맛은 필요없다는 가치관은 완벽한 해인의 대척점에 있는 캐릭터이기도 하다.
한편으로는 향후 상당히 큰 영향을 미치게 될 '스파이' 관련 떡밥도, 서보라가 연관된 문제다. "이래봬도 잿빛 10월 승조원에게는 여러 도움을 받고 있다"(p.252)는 서보라의 발언과 정면으로 대치되는 "한솥밥을 나누어 먹은 전우는 절대로 배신하지 않아!(p.274)"라는 카밀라 함장의 발언도 사뭇 의미심장한 느낌을 자아낸다.
이외에도 쇼우코 대위의 논문을 보고 "일이 재밌게 되었다"(p.112)는 대사나, 그야 학회도 연방도 목적은 다르지 않다"(p.322)는 발언 등. 무수한 떡밥이 쏟아져 나와, 앞으로의 전개도 매우 흥미진진해 보인다.
4) 마치며 ::
즐겁고 충만하며 따뜻하다. 막연하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이는 음식이라는 콘텐츠가 가진 힘이다. 「마리얼레트리」는 음식이 전해주는 요소를 충실하게 살려내고 있는 작품이다.
하지만, 이 소설이 막연히 음식을 먹는데 급급한 먹방류 소설이라고 치부하는 것은 단연코 실례이며, 또한 「이세계식당」, 「던전밥」 등, 일본에서 유행하고 있는 구루메 소설과도 그 궤를 달리한다.
이 작품은 상당히 개성 넘치는 소재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큰 특징은 ‘밀리터리+음식’이라는 전혀 어울릴거 같지 않은 두 요소에 있다. 이 두 가지가 어울려봤자 “군대에서 짬밥 먹는 이야기”밖에 더 되겠는가?
하지만 이 작품은 그러한 상반된 주제를 전혀 위화감 없이 잘 녹여내고 있는데, 사실 이는 마리얼레트리의 주요 포커스가 음식에 맞춰진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앞서 언급한 「이세계식당」이나 「고독한 미식가」의 경우는, 작품의 포커스가 철저하게 ‘음식을 맛본다’는 그 행위 자체에 맞춰져 있지만, 마리얼레트리의 경우에는 음식이나 요리는 스토리 전개를 위한 일종의 연결고리 역할을 하고 있기때문에 자칫 어색하게 보이는 두 요소가 충돌하지 않는다.
다시말하면, 자칫 괴악한 조합이 될 수 있는 ‘군대’+’밥’이라는 소재가 이렇게까지 재미를 줄 수 있는 이유는 사실 [전쟁 소설]+(밥)+[라이트 노벨]의 구도와 같이 무거운 분위기의 전쟁 소설과 유쾌한 분위기의 라이트 노벨이라는 장르를 자연스럽게 섞기 위해 ‘밥’이라는 소재를 연결고리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혹여나 앞으로 마리얼레트리를 볼 기회가 있다면, 한번쯤 음식이 가지는 의미와 역할에 대해 생각해보며 읽는 것도 괜찮을거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