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만 원짜리 우산
8만 원짜리 우산을 샀다. 2년 전의 일이다. 우산이라는 것은 그저 집 현관에 으레 있던 것 중 하나를 대충 집어 나가고 그러다 집으로 돌아오기 전에 비가 그쳐버리면 우산을 가지고 나왔다는 것을 까맣게 잊어 그만 작업실이나 도서관이나 카페나 극장이나 그도 아니면 버스나 지하철이나 택시에 혹은 식당이나 술집에 놓고 오는, 그렇지만 어느새 어떤 기업의 판촉물로 만들어진 우산이라든지 어디선가 빌려온 것이라든지 마찬가지로 누군가가 작업실에 놓고 간다든지 하면서 다시 채워지는 일종의 공유되는 재산과 같았다. 2년 전까지는 그랬다. 이전에도 우산을 사고 싶었던 적이 있기는 있었다. 대학생 때 시립미술관에서 전시를 보고 나오다가 미술관 로비의 아트샵에 진열된 우산을 보고는 가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우산은 검은색 장우산이었고, 안쪽엔 빈센트 반 고흐의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별이 빛나는 밤이었는지 밤의 카페테라스였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그 우산이 쓸데없이 비쌌다는 것만 기억난다. 짐짓 기억하기로 5만 원쯤 했던 것 같다. 대학생이던 나는 지갑에 들어있던 얼마 되지 않는 돈을 가지고 꽤 많은 것들과 저울질 하기 시작했다. 그 돈으로 살 수 있는 붓, 조금 더 얹어서 살 수 있는 러닝화, 그 정도 돈으로 먹을 수 있는 술 같은 것들을 떠올렸을 때, 우산이 갑자기 촌스럽게 보이기 시작했다. 안쪽 천에 반 고흐의 그림이 인쇄된 그 우산을 지나친 이후로 자그마치 10년 정도가 흘렀고, 장마인지 우기인지 구분하기 애매한 비가 지루하게 나의 세계를 적시고 있던 때였다. 출근길에 가져온 몇천 원짜리 비닐우산이 완전히 찢어져버렸기 때문에, 한가한 때를 틈타 인터넷으로 우산이나 구경하자는 생각으로 이곳저곳을 검색해 손가락을 움직이다가 시선을 멈추게 만든 우산을 발견한 것도 그때였다. 갈고리처럼 휘어진 손잡이와 꼭지가 나무로 만들어져 클래식한 느낌을 물씬 풍기는 짙은 녹색의 장우산이었다. 고쳐 말하자면 근사한 정장을 입고 빗속을 걸어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물씬 풍기는 짙은 녹색의 장우산이었다. 나는 그 우산이 꼭 마음에 들었으므로 가격을 알아보고는 깜짝 놀라게 됐다. 우산 하나의 가격이 무려 8만 원이었다. 물론 그보다 비싼 우산도 있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우산이라는 것은 그저 집 현관에 으레 있던 것 중 하나를 대충 집어 나갔다가 그만 쉽게 잃어버리게 되고 다시 쉽게 얻게 되는 그런 물건이었기에, 선뜻 구입 버튼을 누를 수가 없었다. 그렇게 나는 그 우산의 사진을 보고 또 보다가 10년 전과 같은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는 더 이상 8만 원짜리 붓을 사거나 조금 더 얹어서 살 수 있는 운동화를 사거나 8만 원어치의 술을 마시는 것을 너무나도 당연히 우산보다 가치 있다고 여기지 않게 됐다. 대신 다른 한 가지의 생각이 강렬하게 마음을 휘감았다.
‘8만 원 짜리라면 잃어버리지 않고 쓸 것 같다.’
이건 커다란 변화였다. 우산이 공공재와 흡사 비슷한 역할을 한다고 여기던 생각을 버리고 자신만의 소중한 물건이라는 새로운 생각을 입게 되는 계기였기 때문이다. 물론 그 8만 원짜리 우산을 사고 싶다는 충동을 스스로 어리석다고 평가하려던 찰나, 다시 스스로 그 평가에 대한 해명을 하기 위해 급조해낸 생각이었다는 것을 나도 알고 있다. 하지만 이 급조된 생각은 어느새 강력한 논리 구실을 하면서 구입 버튼을 누르고 주소를 입력하고 카드 번호를 기입하게끔 만들었다. 어리석은 충동의 승리를 애써 외면하면서 나는 다시는 잃어버리지 않을 우산, 혼자 점유하는 물건으로서의 우산, 나아가 그렇게 버려지는 우산에 대한 문제의식을 드러낼 수 있는 사례로서의 우산이라는 생각을 반복해서 되새기고 있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 우산을 받은 이후로 정말 커다란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비가 오면 항상 8만 원짜리 우산을 챙겨 나갔고 중간에 비가 그쳐도 잊지 않고 소지했다. 그곳이 시청 광장 외곽의 사람 많은 카페든 청와대 근처의 미술관이든 동료의 작업실이든 청담동의 선배네 이자카야든 집에 올 때는 언제나 우산이 손에 들려 있었다. 나는 그 우산을 단 한 번도 잃어버리지 않았고 우산은 한 번도 고장 난 적이 없었다. 이런 습관은 다른 습관으로 이어졌다. 어떤 물건이든 저마다의 소용을 다하기까지 최선을 다해 소유하고 또 사용하는 습관.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쉽게 만들고 쉽게 소비하고 쉽게 고장 내거나 쉽게 잃어버리며 쉽게 바꾸고 그러다가 이 세계를, 사실은 좀 더 넓을지도 모르는 이 세계를 부러 삭감하며 살고 있고, 조금 거창하게 표현하자면 나는 20세기를 지나치며 잘못 들인 이 습관을 21세기에 들어서 고치고 있는 거다. 가볍고 쉽게 만들 수 있고 그래서 편리할 거라던 플라스틱의 약속이 사실은 나를 많은 물건에 별 애착 없는 인간으로, 그래서 게으른 인간으로, 그래서 매력 없는 인간으로 만들었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그 맹랑한 약속으로부터 달음질하는데 8만 원이 들어간 셈이다. 그런데 얼마 전, 한창 비가 쏟아지던 어느 날 밤, 데이트 삼아 외식을 하기로 마음을 먹고 찾아간 식당에서의 해프닝을 소개하지 않을 수 없다. 그날도 그 우산을 가지고 나갔고, 식당의 문 옆에는 우산을 꽂을 수 있는 통 하나가 마련돼 있었기에, 전에는 그런 통에 우산을 좀처럼 두지 않았지만 비가 하도 많이 내려 축축해진 우산을 가게 안으로 들이기 민망해 그 통에 꽂아다 두고는 테이블에 앉아 주문한 음식을 기다리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가게 문을 열고 두 사람이 들어왔다. 어느새 조그마한 식당 안의 손님들이 가져온 우산들로 그 통은 가득 찼고, 두 사람 중 하나가 자기 우산을 넣기 위해 마구잡이로 우산을 말 그대로 쑤시고 있었다. 다른 사람의 우산은 어떻게 되든 아랑곳 않겠다는 투로, 위로 또 아래로 몇 번을 쑤시더니 결국 욱여넣고는 아무렇지 않게 자기 테이블로 찾아 들어가 앉았다. 내가 식사를 마치고 나와 우산을 펼쳤을 때, 우산 살 하나가 부러져 있었다. 우산을 사고 처음 겪는 고장이었다. 화가 나고 언짢고 짜증 나는 기분으로 그 20세기형 인간을 저주하고 있었을 때, 옆에서 나를 지켜보던 21세기형 인간이 성숙한 해결 방법을 제시했다. 고쳐 쓰면 된다고. 그래. 나는 이 우산을 고쳐서 쓸 것이다. 최선에 최선을 다해, 이 우산이 소용을 다하는 순간까지 열렬히 소유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