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이 예술의 인식을 바꾸는 때에

최근에 인공지능을 이용한 아트작품이라는 주제로 영국에서 마이크로소프트를 통해 열리는 공모전에 작품을 내기 위해 프로토타입 삽질을 하는중에 있다. 지난 3년정도, 꽤나 열심히 기술적인 나의 스펙을 쌓아 올리는데 열중했는데 슬슬 내가 원하는것을 어떻게든(?!) 만들어 낼수 있는 스킬셋이 잡혀가는거 같다.

헌데 문제는 사람에 대한 것이다. 인문학이라고 요즘 많이 이야기하는 요소가 그것일텐데. 정작 여태까지 대중을 위한 작업을 하는 대기업에서 영화, 게임등의 미디어작업에 참여를 해왔는데도, 일개 아티스트였을뿐인 내가 직접적으로 사람들과의 소통거리에 대한 결정권이 없었기에 이부분에 대한 내 지식이 특히 낮았던것이다. 작년 중순에 작업했던 (아직 하고있는) SNS 앱도 그런 내 모습이 비친것이리라 생각된다. 이건 이기적인 것일까 아니면 사람이 일궈낸 문화에 대한 역사에 관심이 없는 것이였을까. 다행인건 지금은 굉장히 적극적으로 이에 대해 내가 받아들이고 있다.

처음에는 인공지능을 이용한 아트작품 부문에서 기술적인 부분은 대략 각이 잡혀가는데, 이걸 예술적으로 표현하는데 좀더 사람의 인식을 자극? 하는 류의 형태를 만들고 싶었기에 리서치 하던 도중, 여차여차 보게된것이, 일반적인 인문학 강의는 아니고. 진중권의 서양미학 관련으로 사람의 인식에 대한 변화와 관련된 유투브 영상을 접하게 된다.

일단 결론부터 던져보자면, 내가 디즈니를 자진퇴사하고 프로그래밍에 포커스했던 고민에 대한 정답을 역사적으로 해석해 주고 있다. 정확히 말하면 기술에 변화에 따라 사람의 인식이 달라지고 이건 예술표현방식에 변화를 주는데, 그에 비해 이런 지식이 없던 나는 예전방식인 단방향 디지털 매체에서 쌍방향 디지털 매체 로 가야된다는걸 본능적으로 느끼고 과감하게 행동할수 있엇던 것이다.

첫번째로 사람의 인식을 바꾸고, 예술의 변화를 준 기술은 사진이다.
1800년대에 니앱스라는 사람에 의해 사진기술이 공식적으로 쓰이기 시작하면서, 현실을 그대로 모방하는 기술이 단순화 되어버린것. 그리고 현실세계를 모방하는 예술에 대한 연구와 기술은 이미 이때쯤 꽤나 높은 경지였고. 이런 기술의 등장은 현실을 그대로 모방하는 예술에 새로운 파라미터를 도입할 동기부여를 한다. 
바로, 시간 또는 Transformation등이 그것인데, 원근법이라는 기술로 3차원 공간을 캔버스라는 2차원 공간에 모방을 할수 있엇는데, 사진이 이미 그런 기능을 완벽하게 해주니, 다른 시도들이 시작된것이다. 이런 시도로 그려진 것들이 흔히 우리가 아는 추상화들이다. 
형태를 과감히 단순화하는, 모든 형태의 근본은 존재하고 이를 표현하려고 한 몬드리안의 작품.

몬드리안 작품

형태를 버리고 색만이 뇌속에서 형을 떠올리는 오직 방법, 뇌 화구통속의 물감을 표현한 하워드 호드킨.

하워드 호드킨 작품

문제라고 볼수 있엇던 것은 이해가 쉽지 않았고 나 역시 아티스트로서 일을 해왔지만, 추상화를 즐기지 못하는 일반인이였다. 여기서 “철학의 과잉” 이라는 말에 동감한다. 그림이 더이상 현실을 그대로 가져오는 모방으로서의 특징이 사라지다보니, 철학적인 요소들이 들어오기 시작하는데, 갤러리에 가면 그림은 매우 단순하고 오른쪽에 설명글이 몇줄이나 되는 경우가 십상이였던 것.

그러는 와중 재밌게 볼수 있엇던 작품은 르네 마그리트의 유사성을 통해 원본을 가리키는 사람의 일반적인 생각을 부정하고 더 넓게 보는 길 혹은 상상력을 열어준 작품들이다.

르네 마그리트 작품

아름다움이라는 것, 현대미술 전에 중요시되었던 미의 기준. 이것은 사람이 인지할수 있는 “사이즈”안에 있어야 했다. 
크면 물러서서 윤각을 잡을수 있고, 작다면 다가가서 형태를 확인하여, 이것이 “아름다운지” 알수 있어야 하는데.
추상화는 형, 색, 질 등을 가지고 노는것에서 그치지 않고 다른 변화를 꽤한다. 바로 “숭고함”이라고 한다. 사람이 감당할수 없는 “사이즈” 에 대한것. 초월적인것을 느끼게 하는 것.

이런것은 어떻게 보면, 종교의 변화과정과도 흡사하다. 
그리스 시대에는 신이라는 존재를, 신의 신성을 아름다움으로 표현하려고 했다.
아름다운 동상을 만듬으로서 표현하려고 한것이다.
즉 미적인 보이는 아름다움, “사이즈” 안에 가둘수 “있엇다”

그런데 그다음의 종교 그리스도의 신을 보자. 
출애굽기를 보면 그리스도의 신은 “보이는것을 믿지 말라” 
즉 나를 형상안에 가두지 말라. 나는 무한한 존재이기 때문에 나를 유한한 존재 안에 가두지 말라. 이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를 압도하는 초월적인 것을 느낄게 할수 있다.

이게 바로 대상성을 재현을 포기함으로 인해서, 이세상에는 존재하지 않는, 초월적인 것을 표현하려는 현대회화가 하는 것과 유사한 변화이다. 그리스의 신 -> 그리스도의 신

완벽한 모방에서 다시 무(無)로 회화가 변하기 돌아가기 시작하면서, 가시적으로 보이는 것이 아닌 그것을 넘어서는 것을 표현하려는 것이다.

사진이라는 기술이 이런 회화의 변화를 준 것에 적지 않은 영향을 준것이 확실하다. 그리고 사진이라는 기술은 영상이라는 기술을 파생시켜, 멈춰서있는것에서만 있는 예술의 확장성을 키네틱한 부분까지 일궈낸다. 이제 우리는 잘 만들어진 영화를 예술이라 말하는것이 어색하지 않은것도, 이로부터 파생된 생각일것이다.

사진, 영상기술까지가 산업혁명시대의 아날로그 모터로 이루어진 표현이였다면, 그다음에 들어서는것이 디지털 시대이다. 진중권 교수님의 말중 하나, “우리 주변에서 이제 디지털이란 단어는 사라지고 있다” 이말은 모든게 디지털이기 때문에 더이상 디지털이라는 단어를 쓸 필요가 없어진다는 것.

디지털이 들어오면서, 사람은 이제 자연에 대한 완벽한 모방을 떠나, 이에 대한 조작이 가능해진다. 이미 디지털 사진의 화소가 5만을 넘어가면서 사진과, 실사를 구분할수 없는 단면 이미지가 생성되어지고, 이 가상에 창조된 가상을 실사와 구분할수 없이 합성시키는 CG요소까지 등장한다.

여기서 한층 더 나아가 이런요소들과 실시간으로 상호작용이 가능한 매체들이 현대미술에 새로운 장을 열고 있는데, 이것도 마냥 새로운 이야기가 아닌 불과 20년정도 전부터 이미 시작된 움직임이라는 점. 바로 게임.

인문학, 예술, 기술의 조합이 앞으로 이미지로 대화하는 우리 일상에 기본 ‘브러쉬’라는 사실은 더이상 낯설은 표현조차도 아닌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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