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lvetica(2007)

다큐멘터리 <헬베티카>의 오프닝 시퀀스는 짧지만 강한 인상을 준다.

고전적인 인쇄소를 배경으로 활자와 활판이 부딪히고, 잉크가 칠해져 종이에 묻어나는 과정을 덤덤하게 보여주면서 우리가 사용하는 서체들이 실은 ‘활자’라는 물리적 매체에서 비롯되었음을 암시하는데, 말 그대로 클래식한 간지가 뿜어낸다.

스위스 태생의 헬베티카는 어쩌면 세계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서체가 아닐까 싶다. 헬베티카는 디자이너들 사이에선 흔히 “쓸만한 서체가 없으면 닥헬베티카”라는 말이 오고 갈 정도로 ‘표준’을 상징하는 서체라고 보면 된다.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관성처럼 사용되는 서체다보니 어떤 게으른 디자이너 혹은 디자인을 공부하는 학생들은 상황과 맥락에 상관없이 헬베티카로 손이 가는 경우가 종종 보인다.

다큐멘터리 <헬베티카>는 그래픽 디자인 동네에 속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알 법한 네임드 디자이너들이 줄기차게 쏟아져 나온다. 빔 크라우웰, 스테판 사그마이스터, 데이비드 카슨 등 거물들이 저마다의 존재감을 뽐내며 헬베티카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네덜란드의 전설, 빔 크라우웰은 헬베티카와 함께 수많은 작업을 해냈는데, 이제 백발이 된 네덜란드 디자이너는 서체가 과한 개성을 뽐낼 경우 정작 전달되어야 할 메시지가 가려질 수 있다고 말하며, 헬베티카야말로 좋은 서체가 지녀야 할 덕목인 ‘투명함(의역)’을 지니고 있다고 말한다. 그를 비롯해 수많은 디자이너들이 헬베티카를 사랑하는 이유 중 하나는 ‘빈 유리잔’에 가장 가까운 서체라서 그렇다. 이젠 식상할 정도로 들은 비유지만, 헬베티카라는 유리잔은 그 안에 어떤 음료를 담아도 명료하게 확인할 수 있으면서도 아름다운 특성을 지닌다. 그렇기 때문에 관공서에서 아메리칸 어패럴에 이르기까지 올라운드 플레이어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축구로 치면 베켄바우어라고 해야하나?

그래서 헬베티카가 최고의 서체인가? 하고 묻고 싶어질 쯤 되면 앞서 보여준 디자이너들 보다는 젊고 반항적인 디자이너들이 등장해 헬베티카는 매력이 없다고 일갈한다. 이 영화가 재밌는 점은 바로 이런 부분이다. 그들은 덤덤히 자신이 헬베티카에 가진 생각을 털어놓는 것에 불과하지만 수많은 디자이너의 말들이 퇴적되며, 어느새 영화는 헬베티카를 법정에 앉혀놓고 벌이는 법정극처럼 느껴진다. 헬베티카를 찬양하는 이들과 헬베티카를 혐오하는 이들은 큰소리 치는 법 없이 당당하게 자신의 의견을 피력한다.

데이비드 카슨과 스테판 세그마이스터, 포스트 모더니즘 시대의 악동들은 헬베티카를 보고 경멸의 제스쳐를 취한다. 아무런 표정도 없는 서체로 무엇을 담더라도 그것은 읽는 사람에게 그 어떤 정서도 전달할 수 없는 서체라며 진저리친다. 특히 데이비드 카슨은 “읽기 쉬움과 커뮤니케이션은 동의어다 아니다”라며, 서체의 선택은 상황과 맥락에 의해 결정되는 것임을 강조한다. 서두에 언급했지만 일부 ‘게으른 디자이너’들은 서체를 선택하기 전 텍스트를 고찰하고, 가장 어울리는 옷을 입히기 보다 어떤 텍스트에 입혀도 어울릴만한 서체를 관성적으로 선택한다. 그런 이들에게 헬베티카는 도깨비 방망이인 셈이다.

<헬베티카>는 자칫하면 비교적 젊은 축에 속하는 스위스 서체에 대한 러브레터가 될 수도 있었지만, 감독은 헬베티카에 대해 한 쪽의 손을 들어주기보다 다양한 디자이너들의 의견을 보여주고 그것을 한 군데 담았을 때 오는 충돌을 보여주고자 한 것 같다. 건설적인 토론은 대체로 좋은 질문에서 비롯된다. ‘헬베티카는 어떤 서체인가?’라는 질문은 나아가 ‘어떤 서체가 좋은 서체인가?’로 확장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헬베티카>는 서체에 대한 이야기에 그치지 않고 그래픽 디자인의 진보를 위한 건설적 커뮤니케이션을 논하는 영화라 볼 수 있다.

감독인 게리 허스트윗은 인터뷰에서 디자인을 주제로 한 다큐멘터리는 많지만 ‘그래픽 디자인’을 주제로 한 다큐멘터리가 없다는 이유로 시작한 프로젝트였다고 말했다. 스스로를 디자인 애호가 박경식은 <헬베티카>를 소개하는 글에서 시작적인 매체를 다루는 일이라는 점에서 디자이너가 영화를 만드는 일이 보다 많아질 것이라 전망했는데, 실제로 영화를 살펴보면 디자인에 관심이 없더라도 재밌게 볼 수 있는 영상이면서, 디자이너에겐 적잖은 생각의 여지를 남긴다. 디자이너로서 어떤 이야기를 만들 수 있을까 스스로 생각해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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