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가사키, 잊혀진 도시
수잔 사우사드
«뉴욕 타임스», 2015년 8월 7일
1945년 8월 9일, 미국은 일본 최남단 본도 규슈의 길고 좁은 만에 자리한 나가사키에 핵폭탄을 투하했다.
처음부터 이 공격은 사흘 전의 히로시마 원자 폭탄 투하와 다른 사건이었다. 하지만 우리가 두 사건을 언급하면서 “핵폭탄”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는 점에서 두 도시의 폭격 경험은 기억 속에 뒤섞여 있다. 이러한 결과는 나가사키를 망각의 가장자리로 몰아넣었다.
많은 미국인들이 — 잇따라 투하된 두 개의 폭탄이 일본의 항복을 유도했다는 — 미국 정부의 공식 서사를 믿고 있다. 그러나 적어도 소련이 일본과의 전쟁에서 연합군에 가담하기로 결정함에 따라 이러한 투항이 이루어졌다는 사실은 이제야 알려져 있다. 나가사키 폭격이 있기 불과 열한 시간 전, 150만의 소비에트 군대는 중국 북부에 위치한 일본의 괴뢰 국가 만주국으로 건너갔고, 3개 전선에 남아 있던 무력한 일본군을 공격했다.
미국은 소비에트의 작전을 예상했다. 하지만 두 번째 원폭 투하는 소비에트가 습격한 타이밍이나 도쿄의 대응, 심지어 해리 S. 트루먼 대통령의 구체적인 지시와도 무관했다. 트루먼 대통령의 유일한 지시는 일본을 향한 핵무기 사용을 ‘준비하라’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8월 8일, 두 번째 폭탄의 조립이 완료되었다.
다음 날 아침 — 나가사키 폭격 30분 전 — 항복 조건을 합의하기 위해 일본 최고군사회의가 다시 한 번 소집되었다. 스탈린의 선전포고는 보다 유리한 항복 조건을 얻어내고자 원조를 감행한 소비에트의 마지막 희망을 끝장냈다.
즉각 항복을 강요한 의원들은 일본군의 식량난 및 보급난, 끔찍한 국내 정세, 히로시마 폭격을 진지하게 염려했다. 군국주의자들은 히로히토 천황의 전후 통치권을 확실히 보전하기 위해 기꺼이 목숨을 걸고 싸우고자 했다. 나가사키 공격 소식이 전해졌을 때, 공격에 대한 이렇다 할 언급 없이 심의는 계속되었다. 그날 밤, 히로히토 천황은 교착 상태를 타개하고 항복을 승인했다.
미국에서 나가사키는 애초부터 히로시마에 가려졌다. 첫 번째 원폭 투하가 헤드라인을 장식했을 때, 나가사키 폭격은 소비에트의 진군과 함께 보도되었다. 9월 9일 저녁 라디오 연설에서 트루먼 대통령은 전후 유럽의 정치경제적 체제를 개괄하였다. 트루먼 대통령은 히로시마 원폭 투하를 단 차례만 언급했고, 나가사키는 거론조차 하지 않았다.
즉각 혹은 폭격 후 5개월 내에, 나가사키에서는 약 74,000명이 사망했다. 단 150명만이 군 인력이었다. 또다른 75,000명이 상해를 입었는데, 이는 이후 수십 년 간 방사능 관련 질환으로 병들거나 죽은 이들을 셈하지 않은 수치다.
처음엔 그들의 몸에 자반purple spot이 나타나고 머리카락이 빠져나갔다. 이는 고열과 감염, 잇몸의 종기∙출혈로 이어졌다. 그후 암 발병율이 급증했다. 피폭자라 알려진 생존자들은 병과 죽음에 대한 끊임 없는 공포 속에서 살아갔다.
미국은 이야기에서 이와 같은 대목을 은폐했다. 1945년 가을, 미국의 고위 공무원들은 방사능 노출에 따른 죽음에 대한 뉴스 보도를 반박했다. 이후 몇 년 간, 점령군 당국은 폭격에 대한 뉴스 기사, 사진, 과학 연구, 개인 증언을 검열하였다.
폭격에 대한 비판이 일어나자, 미국의 지도자들은 이에 대응하기 위해 폭격이 전쟁을 종식시켰으며 일본의 습격을 방지함으로써 100만 미국인의 생명을 구출했다는 서사를 확립시켰다. (전후 사상자의 추정치는 폭격 이전의 수치보다 훨씬 높다.) 대부분의 미국인들은 이러한 이야기를 받아들였다.
미국인들은 나가사키에 대해 거의 알지 못한다. 1500년대 후반 무역의 중심지였던 나가사키는 일본의 초기 근대화의 선봉이자 가톨릭 선교 봉사의 허브였다. 1614년 일본이 기독교를 공식적으로 금하고, 1930년대부터 1850년대 후반까지 외부와 접촉하기 위한 국경을 폐쇄했을 때, 나가사키만은 제한적으로나마 국제 무역을 지속하도록 허용되었고, 이곳에서 아시아와 유럽의 미술, 과학, 문학을 경험하는 인구는 늘어갔다. 나가사키는 일본이 서양과 외교 관계를 재수립한 이후에도 번영을 이어갔고, 세계에서 세 번째로 큰 조선 도시가 되었다. 오랫동안 신념을 숨기고 있던 기독교도들이 다시 나타났으며, 나가사키는 동아시아에서 가장 큰 가톨릭 교회 발상지가 되었다. 1945년 폭격 당시, 추산 10,000명의 가톨릭교도들이 사망했다.
열여섯 살이었던 타니구치 스미테루가 폭발의 위력 때문에 공중으로 내던졌을 때, 그는 나가사키 북서부 외딴 곳에서 자전거로 편지 배달을 하고 있었다. 1마일 이상 떨어져 있었지만 타는 듯한 열기에 즉시 타니구치의 천 옷가지가 산산조각났고 등 전체와 한 팔의 살깣이 불타버렸다. 3개월 후, 타니구치는 간호사들에게 죽어버리게 내버려 달라고 애원하는 가운데 나가사키에서 북부로 22마일 거리에 있는 — 3년도 전에 복통 때문에 누워 있었던 — 해군 병원으로 이송되었다. 앉고 서고 끝내 다시 걷는 법을 배운 뒤, 타니구치 씨는 자신이 사는 도시와 그곳의 사람들이 불필요하게 핵으로 초토화되었다는 생각에 분노로 속을 끓였다.
지난 70여 년이 넘도록, 타니구치 씨를 비롯한 수만 명의 피폭자들은 살인적인 상해, 후발성 방사능 관련 질환, 그리고 그 질환이 아이들과 손주들에게 전해지는 유전 질환일 것이라는 잊혀지지 않는 두려움을 겪어 왔다. 많은 이들이 자신들의 원폭 경험을 가족들에게조차 말할 수 없었다. 그러나 타니구치 씨를 비롯한 소수의 피폭자들은 비범한 치유의 행위로서 자신의 생존에 대해 공개적으로 말하겠다는, 지극히 개인적인 결정을 내렸다.
이들은 일본이 피해자임을 알리기 위해 자신의 사연을 말하는 게 아니다. 진주만 습격이나 일본 병사의 손에 아시아 민간인과 연합군 장병들이 겪었던 고통과 죽음을 축소시키기 위함도 아니다. 정확히 말하면, 이들은 핵 전쟁의 현실에 대한 무지를 없애고 전세계의 핵 비축량을 근절하기 위해 이야기하는 것이다.
공식 서사는 대부분의 미국인들 사이에 지배적인 의견으로 남아 있다. 이 이야기에서 나가사키는 기억 속에서 사라지고 마는데, 이를 그냥 내버려두어선 안 된다. 생존자들의 핵 전쟁 경험을 이해할 수 있는 시간이 지나가버리고 있다. 이들은 핵 전쟁이 어떠했는지를 우리에게 말해줄 수 있을 따름인데, 이들의 삶이 이제 마지막을 향해 가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