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연수, 하루키 그리고 에이미

금요일

해가 진 뒤에 압구정 성당 앞에 있는 가게에서 친구를 만났다. 한치회와 주먹밥, 소주를 시키고 화로에서 연신 무언가를 구워내는 아저씨를 바라보며 먹었다. 맛있는 것을 먹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좋아하는 것에는 우선 순위가 없다. 좋아하는 것과 그냥 그 나머지로 분류된다. 몇 번째로 좋아한다던가 그런 것도 없다. 좋은 것은 그냥 좋은 거고, 그게 아니면 다 똑같이 의미가 없다. 그런 성향은 음식에 대해서도 예외는 아니어서 끼니 때가 되어도 먹고 싶은 것이 없을 때는 그냥 굶어버린다. 좋아하지 않는 것을 먹고 배부름을 느끼는 것을 정말 싫어한다. 그리고 보통 이렇게 한 끼 정도 굶으면 다음 끼니가 되기 전에 배가 엄청 고파지기 때문에 그 즈음에는 뭘 먹어도 맛있기 마련이니까, 괜찮은 솔루션인 셈이다. 다행히 나는 입맛이 엄청 까다로운 미식가는 아니어서 입에 넣고 씹어 본 다음 기분이 괜찮으면 ‘맛있음’으로 쉽게 분류하곤 한다. 맛있다고 생각하는 음식을 먹으면서 이야기 할 때는 우울하고 복잡한 이야기도 본래 그 무게보다 조금 더 가볍게 느껴진다. 술을 마시면서 이야기 하다 취기가 오르면 내가 스스로에게서 약간 유리되는 기분이 들면서 현실 감각이 조금씩 무뎌진다. 그러니까 맛있는 음식에 술을 곁들여 먹으며 이야기를 하는 것은, 거칠고 무거운 이야기를 나누기에 최적의 방법인 것이다. 이 날도 우리는 때때로 마주치게 되는, 삶의 결이 맞지 않는 순간들에 대해 얘기하며 음식과 술을 먹었고 시간이 지날수록 점차 기분이 좋아져서 헤어져 각자 집에 돌아갈 때 쯤에는 웃으면서 즐겁게 손을 흔들었다.

토요일 낮

살색 스타킹을 신고 입술에 빨갛게 틴트를 바른 앳된 얼굴의 여자애들이 무리지어 걸어다니는 홍대 앞에 갔다. 밥을 먹고 카페에 가도 남는 시간을 떼우기 위해 서점에 가서 어슬렁 대다가 김연수와 하루키의 에세이들을 뒤적거려 보았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들을 그다지 좋아하진 않지만 나의 취향에 상관없이 어쨌거나 좋은 소설을 쓴다고 생각하는데, 그의 에세이를 보면 그가 소설 외에도 많은 매체에 꾸준히 기고를 하고 거의 매일 규칙적으로 글 쓰는 시간을 가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점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한국어 장편 소설을 쓴 김연수도 마찬가지다. 이 두 남자는 이미 수십 권의 책을 썼고 하도 많은 글을 써놓아서 일일히 찾아 읽다보면 정말 의미없는 잡문이네, 싶은 글들도 많다.

요즘 하루키의 글과 안자이 미즈마루의 그림이 같이 나오는 산문집들을 좋아하는데, 딱 일상의 가벼움을 유지하는 그 무게가 좋다. 나한테는 지금 그런 가벼움과 유머가 필요하기도 하고. 그들의 잡문이 이상하게 나에게 격려가 되기도 한다. 프루스트를 한 페이지 읽으면 어김없이 졸음에 빠지니 내용을 연결해서 기억하려면 도라에몽의 암기 식빵이 필요한데, 진구가 그걸 너무 많이 먹어서 설사를 했고(김연수, <소설가의 일>), 한낮에 아오야마에서 어슬렁대면 안자이 씨를 자주 마주치는데 정말 백수처럼 한가한 건지 그런 척 하는지 모르겠고, 그러다 메밀국수를 먹으며 맥주를 마셨다는(무라카미 하루키,<밸런타인 데이의 무말랭이>) 둥의 이야기들을 읽으면 나도, 좀 더, 많이, 자유롭게, 솔직하게, 하고 싶은 것을, 같은 생각들이 드니까.

내가 이 날 산 김연수의 <소설가의 일> 첫 챕터에도 그런 이야기가 나온다. 소설이란 갑자기 혹은 불현듯 혹은 번쩍이는 영감으로 탄생하는 게 아니며 계속해서 쓰다 보면 어느새 이야기가 되어있고 그것을 발견하는 순간 자기는 신인(新人)이 된다는 이야기. ‘재능’처럼 모호하고 간헐적인 것이 자신을 ‘하고싶은 일’로 이끄는 것이 아니라, 시간과 에너지를 기꺼이 투자하며 그 길로 가고자 하는 스스로가 자신을 ‘하고싶은 일’로 데려다 준다는 뭐 그런 말이다. 나는 소설가가 아니고 될 생각도 없지만 첫 챕터에 나오는 재능에 관한 이 이야기가 좋아서 <소설가의 일>을 샀다.

토요일 저녁

저녁에는 영화 <유스>를 보았다.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늙음에 대한 이야기인데, 흔히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정말 시간이 많이 지나고 한 번씩 겪어보면 젊을 때는 삶의 전부처럼 느껴졌던 열망, 절망, 그런 순간들이 무뎌질까?’라는 질문의 영화였다.

<유스>의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 나오는 곡

같이 영화를 본 사람들과 한 이야기 중 하나는 ‘짧고 불안정한 생과 불꽃 같은 재능, 길고 평탄한 삶이지만 별볼일 없는 재능 둘 중 골라야 한다면?’이었다. 별 볼일 없이 길게 사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긴 한데, 나는 얼마 전에 <유스>를 본 극장과 같은 곳에서 본 영화가 <에이미>였는데 그녀는 완전히 전자였지만 별로 행복해 보이지 않았다고 대답했다. 영화 속에서 에이미 와인하우스 본인이 “내 재능을 다 주고 삶을 돌려받고 싶다”고 하기도 했고, 그래서 이러나 저러나 어차피 인생은 모두 고통스러운 것이라고. 지금의 고통보다 후일의 고통이 더 클 것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기 때문에 늙는다는 것을 두려워 해 본 적도 별로 없다고 이야기 했다. 지금 내가 젊기 때문에 가지고 있는 메리트 — 피부가 좋다는 것 정도? — 에 크게 의미를 두지 않으니까, 그것 때문에 행복하거나 나 자신을 더 사랑하고 있지 않고, 반대로 말하면 내가 늙는다고 해서 스스로를 싫어하게 되거나 절망할 이유가 없다는 거다. 물론 나이가 더 들어서 느끼는 열망, 행복, 좌절, 고통들이 지금과 완전히 같진 않겠지. 하지만 종류만 바뀔 뿐이지 ‘이미 겪어본 것’이라 해서 그 감정들의 게이지가 완화되진 않을 것이다. 감정은 과대평가 되지 않았다. 감정이 전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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