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를 만드는 법

트위터에서 추천을 받아서 읽어본 노자키 마도의 작품 중 하나인 <소설가를 만드는 법>. 소설가나 재미난 소설이라는 소재 자체는 몇 년 전에 읽은 이루마 히토마의 <바보가 알몸으로 달려온다>로 한 번 본 적이 있는 소설이라 신선하지는 않았다 (이루마 작품 말고도 소설가를 소재로 한 작품은 수없이 많지만). 그렇기에 이 작품도 재미난 소설이란 무엇인가, 그것을 쓰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에 더해 소설을 쓰는 기초적인 부분 등에 대해 얘기하며 이야기를 진행 시킨다.

사실 노자키 마도, 이 사람에 대해서는 가끔 트위터에서 본 것을 제외하고는 정보가 거의 없었다. 대단하거나 놀랍거나 그런 것의 트윗을 본 정도. 그리고 실제로 이 사람의 작품을 읽어보고 느낀 것은, 잘 읽힌다. 일본어임에도 불구하고 아주 읽기 편할 정도로 술술 읽힌다. 보통 문장이 잘 읽히느냐 이런 거에 대해서는 둔해서, 이렇게 확 체감한 적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리고 소설의 중반 부분까지도 매우 즐거웠다. 연하의 미인에게 소설 쓰는 법을 가르치면서 시간을 보낸다, 그걸 표현한 방법이 단순한 평범한 일상인데도 재밌었다. 그리고 과연 이 작품에서는 ‘재미난 소설’이라는 것에 대해 작가가 어떤 대답을 보여줄 지에 대한 흥미도 솟았다. 그런데…

지금까지 보여준 ‘일상’은 단지 이 급작스러운 변모를 위한 복선에 불과했다. 작품에 이런 식의 대사가 있었다.

“작가는 작품의 <룰>을 만들고, 독자도 룰을 이해한다. 그러면 룰을 따르고 있는 동안에는 전개를 예측하기 쉬워서 읽기 쉬워진다. 거꾸로 <룰>에서 이탈하면 독자의 감정을 움직인다.”

이 작품은 이 대사 그대로의 이야기였다. 회수 되는 복선과 그것에 따라 밝혀지는 진실과 그렇기에 돌변하는 장르. 다 읽은 감상은 한마디로 말해, ‘혼란스럽다’이다. 작가가 말하는 ‘재미난 소설’ 이런 게 하나도 머리에 안 들어온다. 무슨 일이 생긴 거야? 하고 그저 혼란스러워 할 뿐이다. 물론 이건 좋은 의미다. 이런 식으로 흐를 줄은 예상치도 못했으니까. 다만 이런 큰 변화 때문에 위에서도 말한, ‘재미난 소설’에 대한 부분은 전혀 중요하지 않게 됐다. 그리고 실제로 이건 이 작품에서 그리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일단 내린 결론 자체가 그렇게 신선하지는 않다. 그래도 접근 방식 자체는 색달랐다. 인간이 아닌 다른 무언가에게 재미난 책들을 많이 읽게 해서, 그것으로 하여금 ‘재미난 소설’을 만든다고 하는 점. 하지만 이것도 후반부에 밝혀지는 사실들 때문에 아무래도 좋아진다.

그렇기에 이 작품에 한해서 말하자면, ‘이야기’보다는 묘기라고 할까, 수법이 월등한 것 같다. 그 묘기 하나 때문에 이야기가 뭘 말하고 싶은지는 상관 없어졌으니까. 아니, 이건 그냥 악랄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다른 작품도 대개 이런 식이라니, 일단 몇 번 더 당해보자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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