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후반기를 스스로 사바티컬로 칭하고 일에서 멀리 있었다. 6월초에 회사를 그만두자마자 바로 가족여행을 떠나서 그 시작을 마킹했으니 대략 7개월 정도의 사바티컬을 가지는 호사를 누렸구나.
사바티컬이란 본래는 회사나 학교의 직원이 본업을 하지 않으면서 계속 급료를 받는 시간을 말한다고 하니 나의 올해 후반기는 엄밀히 말하면 급료를 받지 않았으므로 사바티컬이 아니지만, 대학교수의 ‘안식년'처럼 돈을 버는 활동을 할 필요를 압력받지 않고 하고 싶은 활동을 하며 재충전한 기간이라서 사바티컬이라고 계속 부르기로 했다.
회사를 그만두고 나오자마자 많은 사람들이 나의 다음 스텝은 무엇이냐고 너무너무 궁금해했다. 회사 사람들도, 가족들도, 친구들도, 아주 가까운 사람들을 제외한 거의 모두가. 아무것도 라인업 해놓지 않았다고 할때마다 그들의 얼굴에 떠오르던 의아함은 내가 “연말까지는 놀 거에요" 하며 “에이 설마… (워커홀릭인) 니가?" 하는 의심으로 바뀌고, 시간이 감에 따라 뭔가 ‘밥벌이를 하라’ ‘너의 가치를 증명해 보이라'는 크고 작은 사회적 압력이 되어서, 툭 던지는 말로, 페이스북에 단 댓글로, 속삭이는 소리들로 나에게 돌아왔다. 심지어는 “빨리 새로 시작해야지, 6달 놀려하면 6년 놀게 된다.”는 악담(?)도 들었다. 엄마가 전화로 넌지시 새 직장은 구했냐고 물어보면 (우리 부모님은 내가 스타트업 창업 했었던 것도 모르신다) “알아서 하겠다"고 철벽치고, 시어머니가 “일도 안하면서…” 같은 뉘앙스를 풍기면 그대로 무시했다. 다만 남편이 나에게 사바티컬을 강권한 장본인이고, 사바티컬 도중에 내가 장래의 문제로 고민하면 “연말이 지나고 나서 고민하면 되지 왜 사바티컬 도중에 (잘 놀지 않고) 그러고 있냐?”고 오히려 호통을 치는 터라 그게 참 큰 도움이 됐다. 물론 남편은 다음에 자기가 잡과 잡 사이에 있을때 자신의 사바티컬을 거하게 땡기기 위해서 지금 투자해 놓는 성격이다. 연말까지라고 끝이 구획된 시간에 대해서도 이럴진대, 시간적 기약이 없이 비생산적인/돈을 벌지 않는 시간에 뛰어드는 사람들은 어떤 기분이 들까 싶더라고.
작년 연말 요맘때만 해도 하루에 평균 4–5시간 자면서 일하고, 일과 사생활의 구분이 없던 스타트업 코파운더였던 내가 지난 7개월동안 도대체 뭘 하면서 놀았냐 하면:
- 가족 여행: 맨 처음은 회사를 그만둘 생각을 하기 전에 이미 잡아놓은 결혼 10주년 기념 가족여행이었다. 퇴사일 다음날 바로 출발하여 스칸디나비아 3국 (덴마크, 노르웨이, 스웨덴)에 6월초 2주가 조금 안되는 기간 동안 있다가 왔는데, 회사를 그만 둘 걸 미리 알았더라면 훨씬 길게 잡아놓는 건데 그랬다며 억울해했다. 5살 우리 타이가 이제는 꽤 좋은 여행 컴패니언이 되어서 여행을 같이 할 맛이 났다. 스톡흘름과 코펜하겐에 각각 친구 가족들이 있어서 집에 초대되어 저녁을 대접 받고 아이들이 함께 노는 걸 봤던 일이, 이 세상 같지 않은 아름다운 풍경보다 더 기억에 남는 여행.
- 한국 여름 여행: 가족 여행을 다녀오자마자 이번에는 혼자서 3주간 한국에 갔다. 처음 1주일은 정신적인 디톡스로, 처음 이틀간은 부모님 댁에서 칩거 하며 잠만 자다가, 다음 5일간은 제주도 애월의 바다뷰가 죽여주는 호텔에서 칩거하며 잠만 잤다(는 거짓말이고 제주의 맛난 것도 먹었다). 서울로 올라온 다음 2주 동안에는 평소에 궁금하고 보고 싶었던 친구들과 동료들과 지인들과 예전에 스쳐지나가신 분들을 느긋하게 반가이 만나서 세상 사는 이야기를 하고 근황을 업데이트 했는데, 새삼 내가 다른 사람들과의 만남에서 에너지를 받는 외향성도 있다는 걸 확인했다. 나중에 보니 2주간 69명을 만났더라.
- Pottery class: 여름이 되면서는 생전 처음 시작해본 도자기 만드는 포터리 수업에 푹 빠져서 지냈다. 가마가 딸린 공방에서 수업은 일주에 한번 3시간인데, 수강생들은 일주일 내내 한국의 화실 미술학원마냥 언제든 와서 자기 페이스대로 자기 작품 만드는 걸 할 수 있어서, 시간이 나면 거의 매일 가서 물레 위에서 손에 흙묻히고 시간을 보냈던 것 같다. 내가 이쪽에 재능이 1도 없다는 사실은 첫날부터 너무나 자명했는데, 오히려 그래서 잘해야 한다는 기대도 1도 없는 것이 역설적으로 큰 자유와 즐거움을 줬다. 손으로 흙을 빚고 내 괴물딱지 컵의 벽이 무너지지 않게 물레를 돌리는 동안 정신은 오롯이 손의 감각에 집중했고, 의도적으로 생각하는 게 아닌 한단계 더 정제된 생각들이 머리속에 떠오르고 사라지는 명상의 효과를 얻었다. 다만 시간이 너무 순삭되어서 바빠지면 못할 취미인 것이 안타깝다.
- 타일러 킨더보내기: 킨더 보내는 데도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지금은 잘 적응하고 루틴도 잘 만들어졌다. 남편이 너무 바빴던 해라서 8–9월에 내가 사바티컬 중이 아니었다면 이미 사립학교에서 시작한 아이를 빼내서 대기자명단에서 뽑힌 한국어로 수업하는 공립학교에 보내는 모험을 못했을 터였다. 이건 오랜만에 엄마 노릇 좀 했다 싶은 일이다.
- Walking down the memory lane: 10월에는 내가 미국에 이주한 이후로의 행적을 되짚어보는 테마의 여행을 했다. 미국에 갓 도착한 가난한 대학원생으로 지내던 피츠버그의 삶에서부터 지금까지 얼마나 멀리 왔는지, 시카고에서 첫 직장인으로 친교를 쌓았던 도시와 사람들은 어땠나 잠시나마 돌아보는 기회를 얻고, 뭐랄까 지금은 그때보다 얼마나 상황이 나은가에 대한 안심을 얻고 돌아왔다. 이 세월들이 그냥 헛으로 내 속에 쌓인 건 아닐거야라는 근거없는 자신감.
- 시애틀 컨퍼런스: 아직도 심정적 시애틀인인 나는 시애틀에 갈 기회가 있으면 언제나 쌍수들고 환영이지만, 요번에는 리서치 하고 있던 인더스트리의 가장 큰 컨퍼런스가 시애틀에서 열리게 된다고 해서 부랴부랴 겸사겸사 다녀왔다. 언제가도 고향같은 도시의 가장 아름다운 가을 모습을 볼 수 있어서 좋았다. 시애틀에서 좋아하는 친구들을 만난 것은 덤.
- 한국 / 싱가포르 여행: 가을에 또 한국을 가고 싶어져서, 가는 김에 친구 재야가 여름에 엑스팻으로 이사를 간 싱가폴도 들러서 친구의 새 생활도 잠시 보고 안 가본 새로운 도시도 가보리라 했다. 한국이야 언제 가도 좋고, 만나고 싶던 사람들을 만나서 좋았고. 이번에는 거기 더해서 싱가폴의 매력에 홀딱 반해서 내년 3월 봄방학때는 온가족이 한국을 찍고 싱가폴에서 놀다가 오기로 이미 예약을 다 끝냈다.
이렇게 주욱 늘어놓을만큼 잘 놀고 다녔다고 해서 늘 즐겁고 알차기만 했냐하면 그건 사실과 거리가 멀다. 번아웃에서 오는 무기력증, 가만히 있어도 들려오는 회사의 변화에 대한 안타까움과 노여움, 이대로 아무 것도 크게 못 이룬 채로 인생을 마치게 되면 어떻게 하나 하는 두려움, 앞날이 뿌옇게 느껴져서 막막함, 때때로 고개를 드는 스스로에 대한 의심, 이 모든 것들이 시시때때로 찾아왔다. 이런 기분들로 우울해질때는 식구들이 나가고 나서 하루 종일을 닭병 걸린 것처럼 자면서 보내기도 했다. 사바티컬 동안 운동을 하고 체력을 기르겠다는 다짐은 정말로 공허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비어있는 시간이 나에게 꼭 필요한 풍요로운 시간이었다는 걸 이제는 경험으로 안다.
거의 매번 잡과 잡 사이에 그다지 길지 않은 시간을 쉴 뿐이었어서 마지막으로 사바티컬이라 할만한 시간을 길게 보냈던 것은 유학 나오기 전에 본가에 살면서 과외로 유학비용을 벌었던 1999년 초에서 2000년 여름까지 1년반 정도의 기간이었다. 과외 수업들은 오후 늦게 아이들이 하교하고 나서야 시작하고 아주 늦게는 밤 1시에 고3 과외가 끝나 집에 돌아오는 스케쥴이었지만, 대신 오전과 이른 오후가 통째로 내 맘대로 하도록 주어져있었다. 그때는 과외도 돈을 모으기 위해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하고 있었고, 친구들은 신입사원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하거나 유학 첫해를 잘 지내고 있는 걸 볼때 나만 뒤쳐진다고 생각하고 있어서, 당시는 참고 견뎌야 하는 인생의 유예 정도로 생각했던 시간이었다. 지금도 기억이 나는 그 때 꾸었던 악몽은 내가 반쯤 투명한데 끝도 밑도 안보이는 하얀색 젤리속에 갇혀서 허우적대는 꿈이었다. 위아래도 모르겠고 어떻게 나올 수 있는지 왜 들어갔는지도 전혀 모르는 하얀 젤리는 참으로 공포스러웠다. 아마도 나의 뿌연 앞날에 대한 스트레스가 무의식으로 승화된 것이었을 거라고 추측한다.
그런데 돌아보면 그 때 그 1년반처럼 내 인생이 풍요로웠던 때가 없는 거라. 한동안 극장에서 개봉한 모든 영화를 다 조조로 보고, 커다란 시립도서관에서 아무 생각없이 좋아하는 책만 닥치는 대로 읽으면서 하루를 보내고, 오전 10시 주택가의 무료한 여유의 공기를 발견하는 일이 그 뒤로는 근 20년동안 생기지 않을 일이라는 걸 그때는 몰랐다. 그 때 읽었던 책들과 그 때 들었던 음악들과 그 때 봤던 영화들이 아직까지도 내 취향의 많은 부분을 규정하고 있다. 이번에 피츠버그에서 갔을때 돌아보았듯, 그렇게 잉여같았던 내 삶이, 저녁에 과외나 하면서 시들고 있나보다 싶던 내 커리어가 그 뒤로 어떻게 생생해지고 물을 머금는지 한번 경험해 봐서, 계속 스스로에게 걱정할 것없이 사바티컬을 즐기면 된다고 (애써) 말해주면서 지냈다.
이제 올해의 사바티컬 기간은 2주도 채 남지 않았다. 물리적으로 이렇다 하게 해놓은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다음 행보는 결정된 것이 별로 없고, 심지어는 뭐에 하나 미쳐보지도 못했다. 티비 쇼를 binge watching으로 본 것조차도 하나 없네. 7개월을 그저 느적느적하면서 시간을 낭비한 것이라고 해도 어쩔 수가 없다. 그래도 이게 내 에너지에 멘탈에 몸에 필요한 시간이었구나 하고 생각하려고 한다. 이 7개월의 빈둥빈둥으로 얻은 거라면, 나 자신과의 화해와 이해, 이번에는 꼭 내 생각대로의 회사를 만들어봐야겠구나 하는 새삼스런 깨달음, 가족에게 좀 더 신경을 쓸 수 있었던 것. 다음번 사바티컬은 또 얼마나 지나야 가능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