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과 협동조합

사랑할 준비가 되어 있지만 사랑할 대상을 찾지 못하는 비극이 얼마나 많던가. 그래서 진정으로 무언가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감출 수 없는 흥분이 있다. 노력하지 않아도 드러나고 말하지 않아도 느낄 수 있다. 한국와인소비자협동조합의 박정진 이사장과 김기한 이사는 서로를 알아본, 와인을 사랑하는 사람들끼리 협동조합을 만들었다. 이들은 와인은 불편한 턱시도에 복잡한 매너가 필요한 술이 아니라고 한다. 사랑하는데 허례허식이 무슨 필요가 있으랴. 그런데 사랑하다보니 건너야 할 장애물도 많았다. 유통구조가 가장 큰 걸림돌이었다. 그래서 더 본격적으로 사랑하기 위해 협동조합을 만들었다. 신뢰보다 더 강한 애정의 힘. 와인을 사랑하는 이들의 협동조합을 소개한다.

FTA 이후 더 비싸진 와인가격은 왜?

2007년 처음으로 와인 소비가 위스키를 앞질렀다. 칠레와 미국, 호주 등과 FTA를 체결하면서 와인의 수입량도 늘어났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와인가격은 FTA타결 후에도 낮아지지 않았다. 오히려 칠레 와인은 가격이 높아졌다. “대한민국에서는 아무도 와인의 수입가격을 알지 못해요. 그래서 얼마만큼의 거품이 있는지도 알 수가 없죠.” 한국 와인소비자협동조합(이하 한와소)의 박정진 이사장은 국내 굴지의 대기업 호텔에서 17년째 소물리에로 일하고 있다. 와인을 취급하고 판매하는 일을 하고 있지만 그 역시도 와인가격을 알 수 없다고 했다. 한 가지 확실한 점은 대형유통점이 70~80% 할인해서 판매하는 와인에도 마진이 남는다. 그만큼 가격거품이 심하다는 애기다. 한와소는 와인이 왜 이렇게 비싸, 라고 불평하기 전에 문제를 직접 해결해보자며 대학의 와인전문가과정에서 만난 사람들이 의기투합해 협동조합을 만들었다. 이들의 목표는 적정가격의 와인유통과 즐거운 와인문화의 확산이다. “와인을 즐겼으면 좋겠어요. 와인은 그냥 마시면 되는 거지 이런 저런 겉치레가 중요한 건 아니거든요. 와인을 어떻게 먹냐고 많이들 물어보시거든요. 어떻게 먹긴요. 컵에 따라서 입으로 먹죠.” 박이사장은 마시는 법을 학원에서 배우는 것 자체가 넌센스라고 했다. 시장이 만들어낸 와인의 고급화가 정작 와인을 즐길 수 있는데 장벽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와인을 즐기는 방법은 즐겁게 마시는 것 뿐

한와소의 슬로건은 ‘와인글라스를 깨라.’ 상징적이지만 핵심적인 문장이다. 와인을 더욱 대중화해 많은 시민들이 즐길 수 있도록 하는 게 한와소의 목표다. 제일 먼저 해결해야 할 문제는 와인가격이다. 한와소는 싼 와인이 아니라 적정가격이라는 표현을 강조했다. 뿌리깊은 역사라는 말이 무색하게 해외 현지의 와이너리도 경쟁에 과열되고 자본에 경도되면서 전에 없던 새로운 유통문제를 낳기 시작했다. 와인 수입업체는 현지의 와이너리가 정한 초도 물량을 판매하지 못하면 다음 물량을 공급받을 수 없다. 유통업체로서는 와이너리와 계속 계약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일단 팔아야 한다. 일단 사와서 적은 마진으로도 팔아야 하는데, 이걸 견딜 수 있는 곳은 대기업뿐이 없다. 대형유통업체가 70~80% 폭탄세일로 와인을 판매하는 데는 이런 속사정이 있다. 그러다보니 라벨은 명품이더라도 잘 판매되지 않는, 작황이 안 좋은 해의 와인이 한국으로 넘어와 싸게 판매되는 일도 흔하다는 게 한와소의 설명이다. 그래서 한와소에서는 무조건 싼 가격이 아니라 저렴한건 저렴하게, 비싼건 비싸더라도 제값에 사자는 뜻으로 적정가격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원가경영을 실현해 와인 값에 거품을 뺸다

와인을 즐겁게 마시는 일은 와인을 파는 것만으로는 가능하지 않다. 체험과 경험이 동반돼야 한다. 와인의 인문학, 와인과 미술, 와인과 무용을 접목해 와인 교육서비스를 주최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와인 그 자체에 집중하는 시음이 아니라 와인을 사람들과 함께 즐길 수 있도록 하는 공간을 만들려고 해요.” 결국 와인은 행복하고 즐겁게 마시기 위한 수단이지 그 자체가 목적이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한와소는 먼저 서대문구청과 함께 지역주민을 대상으로 와인문화행사를 열기 시작했다. 신촌, 홍대 등에서는 플리마켓에 참여해 사람들과 직접 만나 와인을 소개하고 알리면서 차근차근 조합원도 늘리고 있다. 올 4월에 사업을 시작해 이제 조합원은 160명이 넘었다. 한와소에 출자금 5만원을 내면 조합원으로 가입할 수 있는데, 조합원에게는 가입기념으로 와인 1병과 프랑스 와인 글라스 1잔을 선물로 준다. “선물로 드리는 글라스는 야외용으로 사용되는 대표적인 글라스인데, 많은 분들이 와인을 더 편하게 즐기길 바라는 마음에서 드리기로 했어요.” 한와소가 바꾸고 싶은 점은 딱 한 가지. 와인을 즐겁게 마시는 것뿐이다. 와인을 사랑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도 좋아해줬으면 하는 마음을 갖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한와소의 조합원은 와인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배당을 원해서 협동조합을 가입한 것이 아니다. 조합원에겐 배당보다 거품없는 가격을 제공하고 와인을 디딤돌로 조합원과 함께 와인을 즐길 수 있는 기회를 만드는 것. 그러면 와인을 더 편하게 즐길 수 있는 사람이 많아지지 않을까? 자신과 같은 취향을 가진 사람을 만났을 때 서로의 신뢰는 재생산된다. 그 신뢰는 한와소의 까가운 목표다. 한와소는 그 바람으로 한국사회에 흔치 않은 소비자협동조합으로 첫 발을 내딛었다. 건강한 먹거리와 의료서비스가 중심인 한국 소비자협동조합에 한국경제의 성숙을 보여주듯 새로운 영역에서 소비자협동조합이 첫 발을 내딛었다. 한와소의 출발을 응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