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들은 좋겠다, 피와 살이 없어서.

김현호

: <말과활> 8호에 수록된 글입니다.

1.

죽음은 우리 주변을 어슬렁거리며 맴도는 검고 축축한 그림자다. 눈도 입도 없는 텅 빈 얼굴을 모로 구부린 채로 우리를 가만히 응시한다. 때로는 손가락을 들어 우리 중 누군가를 묵묵히 가리킨다. 우리가 투명하게 쏟아지는 햇살 아래 길을 걸을 때, 아이에게 밥을 먹일 때, 긴 노동을 마치고 곤한 잠에 빠질 때, 꿈을 꿀 때, 울며 사랑을 나눌 때도 죽음은 옆에 서서 우리를 흥미롭게 바라본다.

그러나 우리는 죽음을 보지 못한다. 아니 보지 않는다. 우리의 눈동자는 죽음을 매끄럽게 통과하여 그 뒷편에 있는 삶의 덧없는 풍경을 향한다. 그 얼굴의 공허함을 목격한 뒤에는 예전의 안온한 일상으로 돌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웅크려 있던 죽음은 갑자기 우리를 덮쳐 누군가의 목줄기를 물고 조용히 구석진 곳을 향한다. 당신이 이 글을 읽는 지금도 죽음은 어떤 불운한 인간을 깔고 앉아 한가로이 그를 뜯어먹는 중이다. 잠시 운이 좋은 우리는 그 모습을 애써 바라보지 않으려 노력한다. 울고 웃고 이야기하고 먹고 마시며 몸을 단장한다. 마치 동료의 시체를 뜯는 사자 옆에서 태연히 물을 마시는 초식동물들처럼.

고작 몇 번 후에는 우리의 차례가 돌아올 것이다. 우리는 피하지도 숨지도 못할 것이다. 죽음 앞의 우리는 마치 횟집 수조 속 활어처럼 무력하다. 우리는 입술에 상처가 난 채 텅 빈 눈으로 서로를 바라보는, 입으로 삼킨 물을 아가미로 토해내며 지느러미를 천천히 움직이는, 그런 연약하고 무력한 생명체에 지나지 않는다.

수조 안의 물고기는 갑자기 내려온 뜰채에 갇혀 퍼드득거리며 물 밖으로 덧없이 끌려나간다. 우리의 짧고 연약한 삶 역시 비슷한 방식으로 마감되곤 한다. 하지만 인간은 칼날 앞에 속절없이 목숨을 잃을지언정, 배가 갈라진 채 투명한 속살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보이는 물고기가 아니다. 니체는 인간은 토끼 새끼와는 달리 일흔 번씩 일곱 번 껍질을 벗겨도 알 수 없는 존재라고 썼다. 우리의 육신은 덧없고 약하지만, 나는 그 뱃속에 어떤 깊고 검은 어두움 같은 것이 있다는 것을 믿는다.

이것은 그 믿음에 대한 이야기다. 그러므로 윤리, 특히 사진의 윤리에 대한 글이다. 따라서 인간의 혼탁함과 뜨거움에 대한 이야기다. 그리고 어떤 질투와 미움에 대한 이야기다. 사진에게 있어 윤리란 무엇인가, 왜 그토록 사진은 윤리를 가지고 싶어하는가, 윤리는 사진을 어떻게 뒤틀어놓는가, 그렇게 뒤틀려버린 사진이 만들어내는 풍경의 괴이한 아름다움은 과연 어디에 속하는가.

그런 답 없는 질문들에 대한 이야기다.

2.

이천 년 전, 젊은 예수의 고난과 죽음에 얽힌 이야기에는 눈물겨운 구석이 있다. 시시각각 다가오는 죽음의 손아귀를 간신히 피한 갓난아기가 말구유에 누워 쌔근쌔근 잠든다. 세월이 흘러 아기는 붉은 뺨의 소년이 되고, 다시 청년으로 자라나 나사렛 촌구석의 목수가 된다. 망치를 쥐는 손의 마디마디에는 굵은 옹이가 박히고, 허벅지의 근육은 팽팽하게 뼈를 감싸며 단단히 뿌리내렸을 것이다. 이제 그 육체는 세상을 위해 못박히고 죽임당할 운명을 향해 차분히 걷기 시작한다.

젊은 시골 목수는 스물아홉 살에 자신의 역사를 완성하러 광야로 나간다.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기 위해서다. 사십 일을 밤낮으로 금식한 그에게 누군가 속살거린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이 돌을 떡덩이로 만들어 봐. 그 달콤한 입술을 향한 젊은 예수의 호통은 가을 서릿발처럼 단호하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굶주려 메마른 예수의 입술에서 이 말이 태어나는 순간은 타오르는 섬광처럼 아름답다. 인간의 몸을 지닌 한 청년이 세상을 대신하여 죽는 것이 자신의 사명임을 담담하게 깨닫는다. 광야에 홀연히 나가 먹고 마시고 배설하는 생명체로서의 숙명과 결연히 맞선다. 사실 지식과 경험, 의지와 인내력이 인간만의 온전한 소유물은 아니다. 먹잇감을 쫓는 호랑이는 상대의 발자국과 체취를 열흘 이상 조용히 추적한다고 한다. 그런 짐승의 앎과 자신의 배를 채우기 위한 인간의 앎은 무엇이 다른가. 그저 똑같은 생존을 위한 무기이자 수단일 뿐이다. 마귀는 바로 그 지점을 간지럽힌다. 네 강한 의지, 굳건한 정신의 힘을 네 생명을 위해 쓰도록 해. 너는 뭐든지 할 수 있을 거야. 그의 속삭임은 자연스럽기 때문에 강력하다. 먹고 마셔야 살아갈 수 있는 생명체의 서글픈 본성을 정확히 찌르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젊은 예수는 눈앞에 다가온 죽음의 체취를 맡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떡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겠다는 말은, 생명체로서의 인간이 자신의 숙명을 거부하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야말로 예수가 거둔 찬연한 승리다. 인간은 이제 버르적거리는 단백질 덩어리, 자신의 배를 채우기 위해 바닥을 기는 짐승이 아니다. 예수의 거부를 통해 인간은 신의 ‘말씀’을 이해하는 형이상학적 존재이자, 그것을 지키며 살아가려 하는 윤리적 존재가 되는 것이다.

이런 빛나는 정신들이 지구의 곳곳을 찌르며 나타나던 순간들은 아름답다. 이천삼백 년 전의 맹자는 몸을 꼿꼿이 세운 채로 수레를 타고 어둡고 어두운 천하를 주유한다. 약한 이의 고기를 강한 이가 먹던 시대, 성 한 채를 점령한 후 모든 인간을 도륙하던 시대였다. 그러나 맹자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은 채 칼날처럼 푸른 문장을 써내려간다. 오직 어짊과 의로움이 있을 뿐이다! 삶과 의로움을 모두 얻을 수 없다면 삶을 버리고 의로움을 택한다! 석수장이 소프로니코스의 아들 소크라테스는 못생긴 얼굴을 한껏 찌그러뜨리며 자신에게 사형을 내리려는 재판정을 느물느물 비웃는다. 죽는 날 아침에도 아내의 울음을 귀찮은 먼지처럼 털어내고 죽음에 대한 논변 다섯 개를 완성한다. 구석에 서서 그를 바라보던 죽음의 검고 공허한 몸뚱이를 향해 태연자약하게 걸어간다.

그들이 하나같이 죽음을 경멸한다는 것, 자신의 생물학적 육체에 얽힌 숙명을 가볍게 여긴다는 것이 우연만은 아닐 것이다. 인간은 원래 죽음의 공포를 느끼면 생각을 멈추고 무조건 달리도록 프로그래밍된 존재라는 것을 읽은 적이 있다. 육식동물을 만났을 때 생각을 하는 것보다 무조건 달려 도망치는 것이 생존 확률이 높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육체를 지닌 인간의 생은 연약하고 구차하다. 그러나 목숨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고 믿는 이들은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들의 믿음은 우리 생의 비루함을 도끼처럼 내리쳐 부순다. 윤리는 인간의 삶에 강렬한 의미를 부여한다. 윤리를 지닌 인간은 동물과 함께 뒤엉켜 먹고 마시고 배설하고 교접하는 존재만은 아니다. 인간은 더 아름답고 숭고한 가치를 위해 춤을 추듯 흥겹게 교수대에 올라갈 수 있다. 그러므로 죽음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그 밋밋함을 놀리고 비웃을 수도 있다. 스러져갈 생의 공허함이 두려워 떨지 않아도 된다. 개체로서 인간의 삶이 끝나더라도 윤리는 단단하고 정결하게 그 자리에 있을 것이다. 광부의 아들 루터는 굵은 두 다리로 버티고 서서 말한다. 나는 믿는다, 그러므로 두려워하지 않는다.

3.

윤리를 가지고 싶어하는 사진의 욕망은 강렬하다. 물론 무력하고 연약한 인간의 창작물 주제에 감히 윤리를 가지고 싶어 안달하는 것이 사진만은 아니다. 여러 예술의 영역에서 그런 욕망이 발산되는 모습을 숱하게 보아 왔다. 하지만 사진가들처럼 사진을 통해 인간을 치유한다든가, 카메라로 삶의 진실을 담는다든가 하는 민망한 말을 지치지도 않고 입에 물고 다니는 이들이 많은 곳은 드물다.

그 터무니없는 진지함은 때로 놀림감이 된다. 어디선가 ‘길티 트립’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죄책감을 느낀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이야기하면서 자신이 지닌 양심을 과시하고, 심지어 예술적인 가치마저 획득하려 하는 무지함과 뻔뻔함을 비웃는 말일 것이다. 이런 야유와 경멸에 비하면 사진이 대상으로부터 이미지를 착취한다든가, 타인의 고통에 대한 관음증이라든가, 시각의 영웅주의라든가 하는 수전 손택의 날선 비판은 차라리 견딜 만한 것이었다.

십 년쯤 사진을 찍고 또 사진에 대해 글을 써 왔다. 사뭇 진지하였으나, 나는 그저 한 마리의 개와 같았다. 손택 같은 이가 앞에서 짖으면 따라서 짖을 뿐이었다. 어리석은 이들에게 십 년이란 그리 긴 시간이 아니다. 내 질문은 마치 토굴에 갇혀 끊임없이 웅얼거리는 늙은 중의 염불처럼 지겨웠다. 타인의 고통을 사진으로 찍는 것이 과연 옳은가? 누군가 찍지 않는다면 다른 이들은 세계의 비참을 알 수 없다. 찍는다면, 고통의 이미지를 거래하는 전지구적인 네트워크의 일부가 된다. 잔혹한 장면의 사진을 보는 것은 사람들의 연민의 감정을 단련시키기는커녕 점점 닳아버리게 만들지 않는가? 그렇다면 그것이 과연 옳은가?

감당하지 못하고 답도 없는 질문을 반복하는 것이야말로 윤리의 본질에 가닿기 위한 노력이 아닐까, 나는 끊임없이 믿으려 노력했다. 아니, 어쩌면 단지 조금 망설이는 척했을 뿐일지도 모른다. 이런 망설임이야말로 자신의 양심을 위무하기 위한 ‘길티 트립’의 한 형태일지도 모른다. 니체는 가책을 느낀다는 것 자체가 사실은 자신이 양심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과시하는 행위라고 쓴 적이 있다. 나는 그 말을 부인할 용기가 없다. 글을 마무리할 때는 다른 필자들의 한숨이나 공허한 외침 같은 것들을 따라하려 노력했다. 그들이 정치를 복원하고 상상력을 동원해야 한다, 새로운 삶의 질서와 연대의 논리를 재발명해야 한다, 라고 쓰면 나는 그대로 받아서 새로운 이미지의 정치학과 고통에 연대하는 사진의 형식을 다시 상상해야 한다고 썼다.

나는 이런 내가, 그리 자랑스럽지는 않았다.

4.

사진이건 예술이건, 그들이 그토록 윤리를 가지고 싶어하는 이유를 짐작하기는 그리 어렵지 않다. 그들 역시 무의미함이 두려웠던 것은 아닐까? 부서져 흩어지는 언어의 조각들, 휘발되어 사라질 이미지의 다발이 되어버리고 싶지는 않았던 게 아닐까? 도덕이나 윤리와 같은 것을 가지게 된다면, 자신도 강렬한 의미를 얻을 수 있다고 믿는 것이 아닐까? 윤리의 세계를 향하는 인간이 그러하듯이 말이다.

“문학의 지위가 높아지는 것과 문학이 도덕적 과제를 짊어지는 것은 같은 것”이라는 가라타니 고진의 말은 이러한 욕망을 잘 보여준다. 물론 그의 말은 이미 너덜너덜해지도록 두들겨 맞은 듯하다. 이는 문학을 정치성이라는 일종의 단일한 도덕주의에 복속시키려는 혐의를 피할 수 없어 보인다. 하지만 ‘도덕적 과제를 짊어지’려는 욕망이 문학에 있고, 이를 통해서 문학의 지위가 높아질 수 있다는 믿음이 존재한다는 것은 중요하다. 이는 저자거리에서 태어난 이야기의 아들이 도덕적 과제를 수행함으로써 불멸의 문학이 될 수 있다고 믿는, 어떤 영웅적 서사의 욕망을 여실히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윤리의 세계로 항해하는 예술은 망각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마치 윤리에 도달하려는 인간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듯이. 현실 세계의 사진이나 예술은 바람에 흩날리는 먼지와 같다. ‘적들이 승리하는 것을 멈추지 않는’ 세계에 고작 펜이나 카메라로 맞서는 이들의 싸움은 무참하다. 백 편의 시를 쓰고 만 장의 사진을 찍더라도 우리는 결국 망각에 패퇴하고 말 것이다. 하지만 바로 이 지점에서 예술은 태어난다. 전진하지 못하고 승리하지 못하기 때문에 싸움이 계속된다. 싸움을 통해 우리의 예술은 벼려지고 단련되어 불멸의 존재로 다시 태어난다. 그러므로 윤리의 세계를 향해 가는 예술의 패배는 자신을 다시 만들어내는 행위다. 그러므로 패배는, 두려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이런 안온한 말은 사진의 두려움을 위무하지 못한다. 사진의 두려움은 단지 예술의 지위를 얻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비-윤리의 진흙탕에 던져질까 하는 데 있다. 자신이 사실은 사람들을 병들게 만들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고 물을 때 사진은 겁에 질려 있는 것 같다. 사진가들의 진지함은 어쩌면 그런 공포와 싸우기 위한 무의식적인 행동일지도 모른다.

어떤 문학들의 뒷모습을 곁눈질하며 그것을 질투하고 미워해 왔다. 고백하거니와, 부러움 때문이었다. 그들은 작고 왜소한 어깨로 당연하다는 듯이 전위에 선다. 그들은 윤리에 대해 말하는 것을 별로 두려워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이것은 우리에게는 꽤 낯설고 놀라운 일이다. 여러 영역에 걸친 광대한 영토와 막강한 힘을 지닌 사진이 덩치값도 못하고 어린 계집아이처럼 구는 것과는 사뭇 다른, 담대한 모습이다.

예를 들어 <몰락의 에티카(2008)>에서 평론가 신형철은 가라타니 고진의 윤리를 “대문자 정치에 복속된” 윤리라고 쓴다.(17) 그의 비평적인 과업은, 그 딱딱하고 굳어버린 무거운 윤리를 풍부하고 다양하게 생동하는 개별자의 윤리로 교체하는 데 있는 듯하다. 신형철은 “주체의 수만큼이나 많은 윤리학이 존재한다고”(143) 조심스럽게 말한다. 그러므로 그는 문학에 드러나는 다양한 윤리의 양상 중 어떤 것도 부정하지 않는다. 레비나스와 스피노자, 라캉의 윤리를 한꺼번에 이야기하면서도 어느 한쪽을 편들지 않으며, 다양한 작가와 비평가들의 윤리를 동시에 상찬한다.

신형철이 개별적인 작가나 비평가들의 주름과 갈라진 틈을 세심하게 읽어내며 ‘윤리적’이라 명명할 수 있는 지점을 찾아냈을 때, 그의 언술은 화사하고 대담하다. “여기에는 몰락의 윤리가 있다”거나(29), “이 깨달음 위에서만 윤리가 성립될 수 있다”거나(161), “이런 행위는 ‘윤리적 행위’라 불려 마땅하다”라고 말할 때(147), 신형철은 자신이 자유자재로 사용하는 ‘윤리’라는 단어를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부러워하는 것이다. 나는 현장과 치열하게 부딪치는 사진가들에게 한번도 그렇게 속시원하게 써주지 못했다. 카메라를 든 이들의 윤리적 질문은 가난하고 초라하다. 과연 타인의 고통을 찍어도 되는가? 찍는다면 어떻게 찍어야 사진은 자신을 윤리적이라 부를 수 있을까? 우리는 이런 단순한 질문에조차 속시원히 대답한 적이 없다. 안간힘을 다해서 구축한 시각적 아름다움의 성채도, 삶의 복판까지 내려가서 캐온 사진 몇 장의 올곧음도, 그저 카메라 뒤에 숨어 시각적 욕망을 채우려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거친 질문 앞에서는 속절없이 무력했다.

어떻게 두려움 없이 윤리를 말할 수 있는 것일까? 우리의 투박한 세계에서는 찍는 것의 윤리와 찍지 않는 것의 윤리는 동시에 성립할 수 없다. 한쪽의 윤리에 선다는 것은 다른 한쪽의 비윤리를 각오하는 일이다. 하지만 우리는 멈출 수가 없다. 타인의 눈물을 향해 셔터를 끊는 것에는 분명히 외설적인 면이 있다. 하지만 카메라를 내려놓고 멍하게 있다고 해서 면책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죄의식도 그 자체로 윤리적인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카메라를 든 인간이 자신을 윤리적이라 부르려면 어디까지 내려가야만 하는 것일까. 우리가 가장 곤혹스러워하는 것은, 거짓 윤리를 인간의 삶에 집어넣더라도 그것이 별 차이 없이 작동한다는 점이다. 광신과 폭력과 파시즘과 증오는 그런 식으로 윤리의 자리를 차지하고 인간의 마음에 들어가 앉곤 했다. 자신이 흘리게 하는 피와 눈물이 곧 도래할 지상의 천국을 예비하는 일이라고, 오늘의 굶주림과 혹독한 노동이 사실은 민족 중흥의 빛나는 여정에 동참하는 일이라고 믿는 일이 허락된다면, 인간은 자신의 생을 사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깨닫는다면, 생의 의미는 송두리채 무너져내릴 것이다. 사진은 이것을 두려워한다. 자신의 선의가 사실 폭력에 지나지 않는다고 알아버린다면. 자신이 뒤쫓던 곳이 진짜 윤리의 세계가 아니었다는 것을 발견한다면, 과연 어떻게 그것을 버틸 수 있을까. 선불교의 우화에는 마음이 흔들리는 순간 지옥에 떨어지는 수행자의 이야기가 자주, 다양한 형태로 등장한다. 윤리의 세계에 도달하는 길은 좁고도 좁다. 한 발만 잘못 딛으면 죄의 나락으로 굴러떨어질 것이다.

사진을 통해 삶을 치유한다고 믿었는데, 사실은 고통의 이미지를 거래하는 전지구적 네트워크에 봉사하고 있는 것이라면 어떡하겠는가. 세계의 비참과 부조리를 사진을 통해 더 나은 것으로 만들고 있다고 믿었는데, 사실은 사람들을 점점 비참함에 무감각하게 만들고 있었다면 어떡할 것인가. 눈이 어둡고 지혜가 부족해 죄의 바다에 표류하고 만다면 그 무망함을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그러므로 신형철의 글에서처럼 사회적 도덕과 작업자의 윤리를 단호히 구별하는 것은 우리에게는 어려운 일이다. 사진은 빛의 속도로 네트워크를 타고 복제되면서 우리를 찾아온다. 찍은 이의 오롯한 선의와 미적 긴장 따위는 그 속도를 견디지 못하고 떨어져나가고 만다. 사진은 언제나 불완전한 상태로 보는 이에게 전달되며, 의미는 사진 외부에서, 사진을 보는 순간 직조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진을 찍은 이가 자신을 면책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는 끊임없이 괴로워하게 될 것이다.

왜 어떤 문학이 향하는 세계에는 모든 개별자의 윤리가 서로 으르렁거리지 않고 공존할 수 있는데, 우리의 사진에서는 찍을 것인가 찍지 말아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조차도 답하기가 이렇게 어려운가. 찍는 편을 선택하는 이들도, 찍지 않는 편을 선택하는 이들도 모두 불안에 떨어야 하는가. 이것은 왠지 억울하게 느껴진다.

5.

롤랑 바르트는 사진에서 결코 부정할 수 없는 점, 사진의 본질 자체, 사진의 노에마는 바로 ‘그것이-존재-했음(Ça a été)’이라는 사실이라고 썼다. 즉 이런 것이다. 사진 속의 어떤 피사체를 본다는 것은, 피사체가 반사한 빛이 내게로 온다는 것이다. 그 빛은 카메라에 들어와서 사진 속에 동결된 채로 지연되었다가, 결국은 사진을 보는 ‘나’와 접촉하러 온다. 사진을 보는 나와 과거의 피사체의 존재는 “일종의 탯줄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사진을 찍는 순간 그 피사체가 카메라 앞에 존재했었다는 말은, 카메라 뒷편에 그것을 찍는 이가 그 순간 함께 있어서 피사체를 ‘보았다는’ 것을 함께 증언한다. 이것이야말로 문학과 구별되는 사진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 아닐까. 사진에 있어 찍는 이와 찍히는 이의 구분은 강고하다. 그들은 서로 다른 피와 살을 지닌 개체다. 두 개체가 있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각각의 몸이 위치하는 좌표가 설정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보는 방향과 높낮이가 필연적으로 생겨난다.

문학은 그렇지 않은 듯하다. 문학을 하기 위해서 반드시 ‘보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자신의 몸이 위치하는 좌표도 몸의 경계도 없다. 내게 이것은 새삼 놀라운 일이다. 즉 <오딧세이아>를 쓰기 위해 호메로스가 오딧세우스일 필요는 없고, 심지어 그의 항해에 동참했어야 하는 것도 아니다. 소설가들은 그저 머릿속의 기어를 바꾸듯이 천연덕스럽게 다른 사람이 되어 글을 써내려간다. 눈먼 책상물림 보르헤스는 잔혹한 살인자 라자루스 모렐이 되고, 회사원이었던 카프카는 폐병쟁이 여자 곡마사가 된다. 그들에게는 이런 식의 변신이 대단히 자연스러워 보인다. 언젠가 무라카미 하루키는 자신이 생각하는 ‘좋은 소설’의 ‘절대적인 기준’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기도 했다. “어디까지가 인간이고, 어디까지가 동물인지 알 수 없는 소설. 어디까지가 제 온기고 어디부터가 다른 누군가의 온기인지 구별할 수 없는 소설. 어디까지가 자기의 꿈이고 어디부터가 다른 누군가의 꿈인지 경계를 잃어버리게 되는 소설”.

그런 문학의 세계에서는 다른 이가 되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인 것 같다. 물론 작가가 자신의 사회적 출신과 성분에서 자유로울 수 없으며, 그들이 만들어내는 이야기 역시 그 맥락에서만 해석할 수 있다고 믿었던 이들이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태초부터 있었던 이 뻔뻔하고 강력한 이야기의 힘 앞에서 그들의 믿음이 그리 오래 살아남을 수 있었을 것 같지는 않다. 어쩌면 이런 경이로움이야말로 인간의 뱃속에 있는 어둠이 지닌 위대함을 설명하는 것 같다. 인간은 먹거나 마시지 않고도 이야기를 토해낼 수 있고, 나아가 그것을 바탕으로 어떤 윤리적 세계를 직조해낼 수도 있는 것이다.

아, 당신들은 좋겠다. 피와 살이 없어서. 사진을 찍기 위해서는 반드시 피와 살을 지닌 몸으로 그곳에 가 있어야 한다. 몸을 지닌다는 것은 결국 서로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즉 카메라를 든 나는 찍히는 네가 될 수 없고, 찍히는 너는 카메라를 든 내가 될 수 없다. 우리는 자신의 몸에 갖혀서 각자의 고통과 감각을 따로 견뎌야만 한다. 허연 시인이 썼듯이, 살은 ‘섞이지 않는다’. 나는 네 고통을 느낄 수 없고 너는 내 쾌락을 알 수 없다. 단지 내 위치에서 너를 ‘볼’ 수 있을 뿐이다. 이것은 인간이 결국 생물학적 개체라는 점을 아프게 상기시킨다. 우리는 서로 다른 개체이므로, 내가 너의 고통을 온전히 이해한다고 말하는 것은 폭력이거나 신파이거나 할 수밖에 없다.

피와 살을 지니고 있다는 것은 얼마나 거추장스러운가. 심지어 그리스도조차도 고작 먹을것으로 유혹을 받는다. 육체를 지닌 그의 고난은 발로 채이고 채찍질당하며 언덕을 오른 후 형틀에 못박혀 피와 물을 흘리며 속절없이 죽는 것에 불과하다. 전혀 형이상학적이지도 거창하지도 않다. 몸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받을 수 있는 시련과 우리가 가질 수 있는 윤리에는 한계가 있는 것이다.

반면 피와 살이 없는 세계에 거하는 이는 수많은 많은 윤리적 태도를 모두 긍정하고 북돋워줄 수도 있는 듯하다. 그것이 가능하건 그렇지 않건 간에, 그런 일을 상상할 수 있다는 것은 내게 놀랍고 부러운 일이다. 이것은 자신의 좌표를 뼈저리게 깨달아야 하는, 몸이 있는 인간에게는 가능하지 않다. 찍는 이의 윤리와 찍지 않은 이의 윤리는 공존하기 어려운 것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그 세계의 주민들은 어떤 극단적인 윤리의 세계를 태연자약하게 창조해낸다. 몇 달 전 나는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소설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을 뒤늦게 읽고 열에 들떠 어두운 거리를 하염없이 걸어다녔다. 사진을 하는 우리가 차마 꿈꾸지도 상상하지도 못했던 윤리의 세계가 고작 한 소설가의 머리에서 나온 책에 들어 있는 모습을 보는 심정은 참담했다.

사진가들이 희망을 거는 가냘픈 윤리의 가능성은 사진을 보는 이의 감정에 극도로 의지하고 있다. 벽 너머로 쏘아올린 사진을 보는 이들이 연민과 동정, 분노를 느끼며 행동에 나서주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연민이라는 감정에는 수상한 냄새가 난다. 니체는 연민을 통해 윤리의 가능성을 찾으려 했던 루소를 경멸했다. 연민이 작동하는 이면에는 어떤 역학관계가 숨어 있다. 그것은 연민하는 자에게는 자기보다 나약한 자를 도울 수 있다는 감정적 우월감을 주며, 연민받는 자에게는 자신의 나약함에도 불구하고 자기보다 강한 자들에게 자신의 고통을 전달하며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는 쾌감으로 작동한다. 그러므로 연민은 뒤틀리고 병약한 감정리이며, 일종의 퇴폐주의, 삶에 대한 부정, 나약함이다. 연민은 결국, 근대의 협소한 소시민적 도덕이 형이상학 흉내를 내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니체는 썼다.

그의 말을 모두 인정하지는 않더라도, 감정에 의존하는 윤리에 기본적으로 취약한 구석이 있다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인간은 모두 생물학적 개체이기 때문이다. 다른 이들의 고통을 온전히 자기 자신의 것으로 느끼게 된다면, 나는 어떻게 나 자신일 수 있을까? 그러므로 공감이라는 말을 함부로 쓰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우리는 모두 자신의 살에 갇혀 있다. 연민이라는 감정을 통해 우리가 연결될 수 있다고 믿는다면, 감정이 너덜너덜하게 닳아 없어졌을 때 그 유대는 흔적 없이 사라질 것이다.

아고타 크리스토프가 그려내는 것은 연민 없이도 작동하는 정결하고 단단한 윤리의 세계다. 소설에 등장하는 쌍둥이들은 ‘내가 착한 일을 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네가 필요로 하기 때문에’ 타인을 돕는다. 타인에게 필요하다면 폭력이나 살인도 감수한다. 여기에는 감정적 우월감도 역학 관계도 없다. 공감도 연민도, 윤리적이고 싶다는 욕망조차도 없다. 단지 지젝의 말처럼 ‘순수하게 맹목적으로, 자발적으로 자동 반사적으로 윤리적인 행위를 하는’ 것이다. 피와 살을 지닌 우리는 옳고 그름을 아는 것만으로는 쉽게 움직이지 못한다. 윤리를 행하려면 연민이라는 약하고 뒤틀린 감정의 힘을 빌려야 하는 것이다. 사진가들이 두려워하는 이유는 연민이 연약하다는 것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신들이 찍는 사진이 오히려 연민의 감각을 더욱 무디게 할까 걱정한다. 그러나 헝가리 출신의 한 여성 소설가는 우리의 머리 위를 태연스럽게 건너서 전혀 다른 윤리의 세계를 향한다. 살 속에 갇힌 우리는 망연히 서서 그 뒷모습을 바라볼 뿐이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깨달은 것이 있다. 어쩌면 어떤 사진이 윤리적인가 하는 우리의 오래된 질문은 잘못된 것이 아니었을까? 피와 살을 지닌 사진은 결국 아고타 크리스토프가 거하는 곳까지는 가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먼저 질문해야 하는 것은, 사진은 과연 얼마만큼의 윤리를 감당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 아니었을까? 섞이지도 않고 함께 느낄 수도 없는 거추장스러운 육체를 지닌 채로, 과연 어느 정도의 윤리를 감당할 수 있는가 하는 것부터 시작했어야 하는 게 아닐까?

6.

나는 사진을 대표해서 이 자리에 서 있는 것이 아니다. 사진의 세계는 광막하며, 수많은 주름과 접힌 부분을 지니고 있다. 지난호 글에서 이야기했듯이, 수전 손택은 죽기 직전에 제프 월의 ‘예술’ 사진에서 어떤 희망을 보았던 것 같다. 미술관이라는 멸균된 화이트 큐브에 거하면서도, 전쟁과 죽음에 대해 깊은 통찰을 전해 주는 사진이 분명 존재한다. 자신의 욕망이 풍기는 악취와 지린내를 드러내보이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아라키 노부요시의 사진에는 마치 바르트의 후기 글쓰기와 흡사한 투명하고 단호한 윤리적 결기가 있다.

그들의 사진처럼 몸에 갇혀 있지 않은 사진들도 존재하는 것이다. 제프 월은 현실 세계에 존재하지 않는 장면을 만들어서 찍는다. 그러므로 그 사진은 피와 살로 된 몸과 몸의 관계를 만들어내지 않는다. 아라키 노부요시는 좀더 오묘하다. 다른 이의 몸에 카메라를 들이대지만 결국 그가 얻으려 하는 것은 자기 몸의 강렬한 체취를 찍은 사진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좌표에 얽매이지 않고 좀더 먼 곳으로 갈 수 있다.

아마도 문학 역시 그러할 것이다. 피와 살을 지니지 않는 이들이 있는 반면, 현실 세계의 중력과 좌표를 이겨내야 하는 이들이 육체를 지닌 채로 살고 있는 세계가 있을 것이다. 여러 개의 윤리는 고사하고 자기 자신의 윤리적 욕망도 감당하지 못하는 이들이 사는 곳 말이다. 내가 몇 개로 분절된 사진의 세계를 넘나들며 거닐듯이, 당신들 역시 다양한 글쓰기의 세계를 탐험했을 것이다. 우리가 걷는 몇 개의 세계가 어떤 식으로 연결되어 있고 또 분리되어 있었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단지 피와 살 없는 곳에 거하는 당신들의 세계를 바라보게 된 것이 고작 몇 달 되지 않았다는 일을 고백해야겠다. 지금까지 우리는 각자의 세계에서 서로 나뉘어서 애통하는 일로 복되었다. 그저 자신의 고통을 입 안에서 굴리며 맛보면 되는 일이었다.

그런데 작년 봄, 우리의 작은 세계들은 파열음을 내며 엉망으로 뒤엉켰다. 수백 개의 죽음이 갑자기 검은 몸을 드러내어 우리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쓰는 이들과 찍는 이들은 모두 낡고 오래된 질문을 다시 마주하게 되었다. 지금 이곳에서 쓰는 일은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찍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가지고 있었던 한 줌의 의미를 빼앗기지나 않을까 하고 떨기 시작했다. 나는 당신들이 우리가 있는 곳, 즉 거추장스러운 살 속에서 서로를 대면해야 하는 곳으로 굴러내려왔다고 생각한다.

지형이 뒤틀려 결국 우리가 비슷한 곳에 있게 되었다고 해도, 여전히 당신들을 질투하고 미워한다. 그러나 존경한다. 그 미움과 존경을 담아 몇 가지를 두서없이 말하려 한다. 당신들 중 어떤 이들이 우리는 모두 세월호라고 말할 때, 우리에게도 슬퍼할 권리가 있다고 썼을 때, 그 말은 내게 대단히 버석거렸다. 아마 그런 말이야말로 피와 살이 없는 세계, 나는 네가 될 수 있고 우리의 좌표가 중첩될 수 있는 세계에 살던 습관인 듯하다. 하지만 이곳에서 사는 일은 그렇지 않다. 우리는 모두 살에 갇혀 있는 개체다. 그러므로 나를 습격하는 슬픔이 과연 나의 몫인지, 그들의 몫인지를 캐물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흩어져 사라질 슬픔은 끊임없이 귀환할 슬픔 앞에서 어떤 말을 할 수 있을까. 그것 역시 우리 앞에 함께 놓인 문제이기도 하다.

같은 맥락에서 감정을 공부하고 통각을 다듬겠다는 당신의 의지를 걱정한다. 많은 사진가들이 자신의 진정성을 믿으려 노력해 왔다. 항상 자신을 예민하고 뜨거운 상태로 유지해서 고통스러워하는 이를 만났을 때 함께 섞일 수 있기를 바라며 노력하는 것이다. 그러나 잘 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감각은 쓸수록 단련되는가, 그렇지 않으면 둔감해지는가. 우리는 후자에 거는 편이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두려워하는 부분이다.

물론 당신이 새로운 길을 찾아내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생각해보면 우리는 통각을 예민하게 단련하는 것과, 감각을 더 세게 두들기는 일을 꽤 자주 착각하였다. 여기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문제는 이런 온도차가 꽤 자주, 보는 이들의 둔감함과 나태함을 원망하는 쪽으로 귀결되곤 한다는 점이었다. 감정을 공부해야 한다는 말은 일종의 유사-수양론으로 흘렀고, 슬퍼하지 않는 이들은 이상한 죄의식을 느끼게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눈물을 흘리면서도 자신이 과연 얼마나 슬퍼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의심해야만 했었다. 진짜 느끼는 고통과 ‘느낀다고 믿는’ 고통의 거리는 생각보다 그리 멀지 않았다. 어쩌면 감정 공부란 만드는 이가 아니라 보는 이의 몫은 아닐까? 만드는 이들의 공부는 조금 다른 것이어야 하는 것은 아니었을까?

마지막으로, 한 가지 연약한 희망에 대해 이야기하려 한다. 피와 살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도 장점은 있다. 서로를 만질 수 있다는 점이다. 우리가 서로 껴안을 때 서로의 경계가 무너져 피와 살이 뒤섞여버린다면, 우리는 이렇게 달라붙어서 체온을 나눌 수 없을 것이다. 당신들이 그곳에 내려가 추위를 피하는 강아지들처럼 뭉쳐서 시를 읽어주는 모습을 보았을 때, 나는 정치의 전선과 미학적 새로움이 동시에 전진해야 한다는 말을 입 밖에 내는 일을 조금씩 줄이게 되었다. 그래, 그런 말조차도 아주 낡고 오래된 거였지, 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내가 응원하는 사진가들도 아주 조금은 덜 외로워 보였다.

이런 생각을 하기도 했다. 어쩌면 인간을 위대하다고 말할 수 있다면, 인간이 연약하기 때문이 아닐까? 죽어 스러져갈 생의 무망함이 아니라면 윤리를 강렬하게 욕망할 이유가 있을까? 인간이 원래 그 뱃속에 윤리를 이미 지니고 있는 존재라면 굳이 윤리를 얻기 위해 죽음까지 불사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윤리를 지니지 못했기에, 인간은 윤리를 향해 기어서라도 간다. 죽음의 공포와 삶의 덧없음을 이겨낸다. 자신의 두려움과 공허함을 이겨낸 인간은, 다른 이들의 공포를 향해 손을 내밀 수 있다. 진리의 바퀴를 굴리며 세속의 혼탁함을 함께 건널 수 있다. 인간이 강하고 아름다운 존재였더라면, 윤리가 거하는 처소에 가닿으려 발버둥치지도 않았을 것이다.

어쩌면 그것은 우리의 글과 사진에도 적용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나는 피와 살을 가진 채로, 어쩌면 그것의 힘으로 도달할 수 있는 윤리의 세계를 상상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지금, 당신들과 함께 읽고 싶은 두 가지의 글귀가 있다. 먼저, 한때 고타마 싯다르타라는 이름을 지녔던 석가모니의 말이다.

아난다여, 붓다가 왜 여인의 자궁에서 태어났는가. 왜 완벽하게 청정한 가운데서 탄생하지 않았을까. 아난다여, 가장 높은 지혜를 구하는 이는 여인의 자궁 속에서 나와야 한다. 세상에 대해 가엾은 마음을 일으키며 세상 속으로 태어나야 한다. 만일 그가 하늘의 신이라면, 이 세상에서 어떻게 진리의 바퀴를 굴려갈 수 있겠는가.

다음은 프랑스의 철학자 미셸 앙리가 초대 교부 이레네오의 말을 요약하고 인용한 것이다.

실재의 살 — 채찍을 맞을 수 있고 가시에 찔릴 수 있고 박힐 수 있고 조롱받을 수 있는 실재의 살 — 이 필요하다. 그리고 만약 이 살이 실재적이 아니라면 이 모든 것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즉 그것은 배고픔의 가상이고, 배고픔은 더 이상 배고픔이 아니고, 갈증은 더 이상 갈증이 아니고, 화상은 더 이상 화상이 아니고, 살의 찢김은 더 이상 살의 찢김이 아니게 될 것이다.(중략) 우리가 자칭 스승이라고 부르는 자가 겪지도 견디지도 않은 고통을 우리가 겪고 견딜 때 우리는 심지어 그 스승보다 위에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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