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공

억압과 독립의 카오스 이야기


<1>

16세기 대항해시대, 대양을 오가는 거대한 배가 난데없는 풍랑을 맞아 외딴 섬에 떠밀리게 된다. 그리고 그 섬에서 원주민으로부터 공격받아 살아남으려는 주인공의 이야기. 그리고 멋지게 탈출하며 새로운 보물섬을 발견한다는 나름 영웅적인 이야기. 어릴 적 아버지는 잠들지 못했던 나를 위해, 바다 저편 다른 세상의 이야기를 장황하게 들려주시곤 하였다.

나의 세상은 모래와 자갈이 뒹구는 사막 같은 곳, 초등학교 운동장이었다. 사실 이곳조차 누비기에게도 나는 벅찼다. 주인공은 이미 다른 이들이 차지하고 있었고 난 그들에게 대항하다가 맞거나 놀림당하는 왜소한 존재였을 뿐이었다. 난 운동장에서 하늘에 날릴 글라이더를 살 돈도 없었고, 애들이 갖고 노는 미니카도 없었다. 그렇다고 이 운동장을 호령할 실력을 가지기 위해 죽도록 노력하는 것도 아니었다. 쥐뿔도 없으면 깡이라도 있어야 하는데, 그러지도 못하는 꼰대같은 자존심만 있었다. 주인공은 나에게 어울리지 않았다.

<2>

그리고 17년이 지났다. 회사를 그만두고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아졌다. 여유가 생기자 문득 아버지와 여행을 갈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말로만 세상을 떠드는 아버지에 대한 반항이 생겨서 일까. 언제부터인가 진짜 세상을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 강하게 들었다. 아버지는 당연히 걱정하셨다. 걸어 다니는 지리사전이셨지만, 생전 해외여행을 가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나조차 이 조그만 섬에서 27년을 살아와, 누구의 도움도 없이 이국땅을 밟는다는 것은 아버지와 나에게 크나큰 도전이었다. 둘 다 내심 그래도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 평생을 모험했다고 자부하는 부자는 그들 마음 안에서만 주인공일 뿐이었다.

베트남.

아버지는 이국땅에서도 술을 찾으셨다.

나는 그런 아버지를 여전히 나무라며 짜증을 냈다.

아버지는 네가 얼마나 계산적인지 다 안다며 화를 내셨다

이국땅에서조차 아버지는 의심하고 부정하고, 반복된 얘기를 꺼내셨다.

문득, 그의 머리에 새로 생긴 세월 한 가닥이 눈에 어른거렸다.

<3>

다음 날, 무이네 앞바다에 동이 텄다. 숙소 앞마당에 스쿠터가 두 대가 서있었다. 아버지와 나는 스쿠터를 타고 지루하게 펼쳐진 길을 따라 달렸다. 멀리 멀리. 예정에도 없던 계획. 길거리에는 아침부터 사람들이 나와 일을 시작하고, 오토바이들은 정신없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까무잡잡한 피부의 사람들, 따가웠던 동남아시아의 햇살, 어수선한 베트남 시장의 풍경들. 그냥 그렇게 아버지와 나는 스쿠터를 타고 얼마나 오래 달렸는지 모른다. 아버지는 아무 말씀이 없었다. 무심하게 회전하는 바퀴처럼 그동안의 숱한 생각이 잘 떠오르지 않는 모양이다. 스쿠터에 기름이 떨어질 때까지, 돌아가야 할 시간까지, 그렇게 얼마나 달렸는지 기억도 안 난다.

그렇게 다시 돌아온 나의 고향, 제주. 그리고 일주일 뒤에 나는 서울에 올라가기로 한다. 아버지께 상경하겠다고 선언한 다음날, 아버지는 얼마나 많은 술을 마셔댔는지, 그날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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