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Before Your Eyes(2021)
진짜 기술과 어우러지는 이야기
태풍이 지나가고 있다. (모두들 별 탈 없으시기를) 이런 날 밤 조용히 경험해보면 오히려 좋을 작품이 있다. 올해 상반기 최고의 경험으로 소개 하려다 타이밍을 놓쳤었는데 오늘이 정말 딱일 것 같다.
아기자기한 소품인 줄 알았던 이야기의 반전
이 작품을 처음 접하게 된 건 지난 4월이었다. 넷플릭스 구독자 중 1%도 이용하지 않는다는 ‘넷플릭스 게임’ 카테고리에 있는 작품이었는데 그날은 이상하게 여기에 손이 갔다. 앱을 다운로드 받고 정신없이 2시간을 보냈다. (이 작품의 러닝타임, 혹은 플레잉 타임은 사람마다 다르다. 누군가는 50분 만에 끝냈다지만, 나의 경우 정신차리고 보니 어느새 2시간이나 흘러 있었다.)
이야기가 시작되면 ‘나’는 나룻배를 타고 있다. 이곳은 저승으로 향하는 요단강인 셈인데 살아온 인생을 어떻게 이야기 하는가에 따라 영혼의 안식처에 들어갈 수도 있고 구천을 떠도는 새가 될 수도 있다. 저승의 문지기 앞에서 나를 변호해 줄 거라는 여우는 (영혼이 된) 나에겐 손도 발도 입도 없기 때문에 오직 눈 깜박임으로만 대답하라고 한다. 그리고 ‘나’의 첫번째 기억으로 되돌려줄테니 눈을 깜박일 때마다 시간을 건너뛰는 여행을 하면서 인생을 돌아보라고 한다. 그렇게 ‘나’, 벤자민 브린의 생애가 펼쳐진다.
벤자민 브린은 어린 시절 피아노에 재능을 보였고 이를 눈 여겨 본 엄마의 강권으로 11살 때 음악 영재학교 시험을 보고 탈락한다. 잠시 좌절을 겪지만 이내 화가로서의 재능을 찾아낸 뒤 화가로서 크게 성공한다. 위대한 화가의 성공담이 펼쳐지는 와중에 아기자기한 인터랙션들이 들어간다. 직접 피아노를 쳐볼 수도 있고, 내가 선택하는 그림이 벤자민 브린의 작품으로 갤러리에 걸리기도 한다. 이렇게 진행되는 소품이겠거니… 할 무렵, 여우가 말한다. 너는 쓰레기라고. 온통 거짓말만 늘어놓고 있다고…
그리고는 다시 기억을 되돌린다. 11살, 시험에서 탈락한 벤자민 브린에게 병마가 찾아온다. 그때부터 벤자민 브린은 침대에서 생활하게 되고 다시는 침대 밖을 벗어나지 못한다. 그리고 ‘나’는 바로 그 벤자민 브린이다. 사경을 헤메고 있는. 내가 눈 깜박임 밖에 할 수 없는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이다.
이야기 전개에 꼭 필요한 기술을 적당히 사용한다는 것
이 작품은 ‘눈 깜박임’으로 모든 스토리가 전개된다. VR 헤드셋에서 ‘시선추적’이라는 기술을 쓸 수 있게 됨에 따라 이걸 활용하려는 수많은 시도가 있었다. 하지만 화면을 가만히 응시해야 하거나 마우스 클릭을 눈 깜박임으로 대신하는 건 대부분 불편함만을 가중시켰기에 이걸로 더 나아진 작품을 찾기 힘들었다. 이 작품에서도 ‘눈 깜박임’은 분명 불편한 인터페이스다. 하지만 이건 의도적인 불편함이다. 식물인간 상태가 되어 눈동자 밖에 움직일 수 없는 사람을 체험해야 한다면 어떻게 다른 방법을 쓸 수 있겠는가?
이 작품에서 눈을 한번 깜박이면 반드시 다음 장면으로 넘어가게 된다. 즉, 내가 보고 싶은 장면을 계속 보려면 나는 눈을 감지 말아야 한다. 하지만 인간이 눈을 감지 않고 버틸 수 있는 시간은 얼마 되지 않는다. 중요한 대화 중간에 나도 모르게 눈을 깜박이는 바람에 그 이야기를 놓치고 만다. 아마도 제작진은 이 불편한 인터페이스를 통해 눈을 감고 싶지 않은 벤자민 브린의 마음을 느끼게 해주는 한편, 아무리 붙잡으려고 노력해도 결국 인생은 허무하게 흘러가 버린다는 메시지를 담으려고 했던 것 같다. 인터페이스 하나가 이렇게 심오한 이야기를 담을 수 있는 것이다.
이 작품은 원래 VR로 만들어졌다. 2021년 3월, SXSW 버추얼 시네마 부문에서 VR로 월드 프리미어 된 뒤, 상용으로는 PC 게임, 그리고 모바일 게임으로 출시되었다. 내가 해본 버젼 역시 모바일 버젼이었다. 하지만 이걸 해보면서 참 VR적이라는 생각을 줄곧 했었다. 하지만 이 작품은 정확히는 VR이 아니라 360도 경험을 제공한다. 주변을 둘러볼 수는 있지만 내가 누군가에게로 다가갈 수는 없다. 보통은 360도 경험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그건 VR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편인데, 이 작품에서는 그렇게 말할 수 없었다. 벤자민 브린은 움직일 수 없으니까, 몸이 고정된 상태에서 둘러보는 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이니까.
이야기를 위해 ‘기술을 쓴다’는 게 이런 거라는 사실을 새삼 배웠다. 그러게, 이런 이야기를 많이 만들고 싶었고, 많이 소개하고 싶었다.
우리는 11살로 끝나는 인생을 불쌍하지 않게 볼 수 있을까?
여름방학 기간이라 아이와 함께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다. 아이도 마침 11살이다. 꼰대가 된 내가 아이한테 끊임없이 하는 잔소리는 ‘제발 니가 하고 싶은 일 좀 찾아라’다. 그것만 찾을 수 있으면 공부 따위는 하지 않아도 된다고 지겹도록 말하고 있다. 그렇게 말하면서 나는 은연 중에 그런 걸 못 찾으면 넌 실패하는 인생이 될 거야라는 생각을 아이에게 전달한다.
그런데 정말 그런가? 만약 11살에서 인생이 끝나버리면, 그건 아무 것도 못 이뤘으니까, 아무 꿈도 못 찾았으니까 실패한 인생이 되어 버리는 건가? 벤자민 브린 역시 그렇게 생각한다. 그가 맨 처음에 자신의 인생을 꾸며낸 것은 11살로 끝나는 인생은 소개할 게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11살의 인생만으로는 저승으로의 관문을 통과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이야기의 후반부는 그렇지 않음을 보여준다. 벤자민 브린이 11년을 살면서 그가 세상에 준 것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보여준다. (그것들을 다 보려면 나는 눈을 깜박거리면 안된다)
그래서 맨 마지막에… 엄마가, 그리고 여우가 “이제 편히 눈 감아도 돼”라고 말할 때 그 말은 정말로 위안이 된다.
이 작품을 해볼 수 있는 방법은 너무 많다. 스팀으로도 해볼 수 있고 모바일로도 해볼 수 있다. 내가 한 것처럼 넷플릭스 구독자라면 그냥 무료로 당장 다운로드 받으면 된다. 올해 3월, 다시 VR 버젼도 출시되었다고 한다. PSVR2 용으로 현재 서비스 중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 줄 요약을, 남들이 플레이하는 영상을 보는 게 더 좋다는 타입이라면… 유튜버 풍월량의 리액션을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