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하나의 같은 영혼을 떠나보내며

故김종현씨의 유서에는 과거에 내가 하던 (아직도 종종 하는) 생각들과 무서울 정도로 일치하는 말들이 적혀있었다. 링킨파크의 체스터 베닝턴의 자살 소식과 추후에 공개된 그가 세상을 떠나기 불과 며칠 전에 가족과 함께 웃고 장난치던 모습을 보고도 비슷한 감정을 느꼈는데, 그때는 그냥 가만히 있었다. “우울한 사람"으로 규정되기 싫었고, 실제로 내 우울함이 독처럼 타인들을 물들일까봐 무서웠다. 하지만 이제는 내 사고회로를 드러내 보려고 한다. 따로 전문의에게 상담을 받아본 적은 없지만 나는 우울한 사람인 것 같고, 내 모습을 보고 사람들이 주변의 우울한 사람들에게 보다 잘 다가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그리고 나와 같은 외로움을 겪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면 보고 동질감을 느끼고 힘을 얻으리라는 희망을 안고 글을 쓴다. 사실 이건 핑계고 개인적인 관심의 구걸 아니냐고? 나를 잘 모르는 사람들이라면 부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아니면 그냥 이 글을 읽지 말거나. 후술 하겠지만 불특정 다수의 관심은 나에게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

체스터 베닝턴이 사망하기 36시간 전. 우울증은 이렇게 눈 앞에 두고도 모를 수 있다.

나는 예술을 좋아한다. 음악을 특히 많이 듣는데, 아픔에서 나온 음악은 항상 뭔가 심금을 울린다. 소용돌이치는 감정에 형체를 주고 밖으로 끄집어낸다는 것은 고통스럽고, 무서우며, 어려운 과정이지만, 누군가가 그렇게 표현해 놓은 것을 볼때면 같은 영혼을 가진 사람을 발견해서 반갑고, 작품을 훨씬 개인적으로 경험하게 되면서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넬, 피아, 언니네 이발관, 자우림, 못, 디어 클라우드, 하비누아주, 故김광석, 심규선, 3호선 버터플라이, 쏜애플, 박지윤, 그리고 일본어는 못하지만 동경사변과 시이나 링고. 이같은 사람들의 음악은 내게 너무나도 큰 위로가 되어왔고, 이들이 나의 아이돌이다. 슬픈, 혹은 화가 나는 상황을 겪거나 목격할 때 보다도 이런식의 아름다움을 체험할 때 눈물이 난다.

내 마지막 연애가 끝났을때는 유투브에서 이들의 음악으로 플레이리스트를 만들어서 들으며 내 안의 감정을 좀 해소 하려고 했는데 (속으로 끙끙 앓고 있기가 답답하고 정신건강에 해로울 것 같아서), 정신 차리고 보니 플레이리스트에는 200곡이 넘게 들어가 있었다. 몇 년이나 지난 일이고, 친구들과 우스갯소리로 내가 이렇게 찌질하다고 이야기하곤 했는데, 지금 그 플레이리스트에는 508곡이 들어있다.

예의 플레이리스트.

당시에는 누구에게도 이야기 하지 않았지만 군에서 복무 하던 시절엔 하루도 거르지 않고 다음날 내가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하기를 기도했다. 자는 사이에 어떤 크고 무거운 건물 같은게 나를 한번에 깔아뭉개는 상상을 했다. 폭력의 대물림, 개인보다 큰 존재들 앞에서 느낀 무력감 등등 때문에. 지금도 군대 이야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이런식으로 우울함은 항상 내 곁에 있어왔고, 호시탐탐 고개를 내밀어 나를 삼키려한다. 자꾸 바쁘게 시간을 보내거나, 의식적으로 행복한 감정에 집중해도 절대 사라지지는 않는다. 요즘도 가끔 침대에서 뒤척이며 날카로운 가시들이 내 심장을 꿰뚫는 상상을 한다. 끊임없이 외롭다. 왜 사느냐(죽지 않느냐)고 스스로에게 물으면 내 주변 사람들에게 짐이 되기 싫어서, 혹은 이미 너무 많은것을 참고 견뎌온 것이 억울해서 라고 대답하게 될 때가 있다. 내 아픔이 어디서 오는지, 내가 왜 아픈지에 대해서는 항상 생각하기 때문에 어느정도 알고 있다. 하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해소 역시 어렵다는 것을 안다.

아마 슬픔에 특히 취약한 사람들이 있는 것 같다. 같은 일을 겪어도 훨씬 강하게 타격을 입고, 회복에 오랜 시간이 걸리는.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사소한 일들에 큰 의미를 부여하고, 경험이 개인의 틀이 아니라 세상과 삶의 의미에 대한 문맥에서 다가오는. 이상을 쫓으며 그에 영원히 미치지 못하는 자신과 세상의 모습에 끊임없이 실망하는. 최소한 나는 그렇다. 게다가 다른 사람에게 피해 주는것, 생색내거나 과장하는 것을 싫어하기 때문에, 그저 혼자 상처를 안고 살아간다. 다른 사람들에게 내 우울함을 드러내고, 날 이해해 달라고 강요할만큼 내가 특별한 존재는 아니라고, 내 아픔의 이유는 내가 약하기 때문이며, 따라서 극복하는 것 역시 온전히 나의 몫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마음 속 깊이 다른 한 켠에서는 나와 진심으로 공감할 능력이 있는 사람은 없다는 생각이 싹튼다.

가장 무서운 것은 이 생각들이 사실이라고 생각하면 사실이 되는 점이다. 실제로 타인에게 나의 상황을 우선시 하기를 바라는 것은 이기적이고 경우에 따라서는 폭력적이다. 나는 나약하기 때문에 이 부작용이 매우 크다고 느끼고, 나나 다른 사람이 이 폭력을 휘두르게 되는 상황을 피하려고 한다. 사실은 다른 누가 나한테 자신의 속 이야기를 하면 나는 정말 잘 들어줄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동일한 태도를 다른 사람들에게서 기대하지 않는다. 그래서 타인에 대한 존중을 의도적인 무관심으로 표현한다. 먼저 말하지 않으면 묻지 않고, 나는 묻지 않으면 먼저 말하지 않는다. 비록 표면뿐 일지라도 서로의 평화를 방해하지 않는다. 낯을 가리게 되고, 얕은 인간관계를 (그리고 결과적으로 새로운 인간관계를) 기피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이 글을 써서 불특정 다수에게 내 생각을 공개하는것은 나에게는 너무나도 어렵고, 종현씨 역시 비슷한 이유로 죽음을 전제하고서야 자신의 아픔을 세상에 드러낼 수 밖에 없었다고 짐작한다.

아픔은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이기 때문에 아픔을 서로 비교하고 순위를 매기는 것은 의미가 없다. 게다가 완벽하게 같은 두 사람은 없고, 생각이 표현되고 해석되는 과정에서 내가 한 이야기가 내 의도대로 받아들여지기를 바라는 것 역시 비현실적 (그러므로 소모적) 이라고 단정 짓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누군가가 타인의 감정이나 삶에 대해 다 안다는 듯이 이야기 하는것이 무례하게 느껴진다. 옳고 그름을 떠나서 그저 세상의 원리가 그렇다고, 두 타인은 영원히 서로 알 수 없다고 생각하며 살아간다. 한 사람의 아픔에 대한 최선의 대답이 “난 네 감정은 잘은 모르겠지만 아무튼 널 응원한다"임을 깨달았을 때의 씁쓸함은 사라지지 않는다.

디어클라우드의 보컬 나인이 공개한 故김종현의 유서.

내가 찾고있는 것 (그리고 아마 종현씨가 찾고 있던 것)은 사실 이를 넘어설 수 있는 완전한 공감일지도 모르겠다. 누군가가 “아, 나도 네 아픔을 알아.” 라고 이야기를 했을때, 그 말이 사실임을 서로 알 수 있는 사람. 그런 사람에게 “하지만 더 나아질거야.” 아니, “하지만 우리 함께 아파하자." 라는 말이라도 들었을때의 그 안도감. 종현씨가 디어 클라우드의 나인씨에게 아마도 그런 동질감을 느끼고 유서를 맡기지 않았을까. 나는 디어클라우드의 음악에서 그런식의 위로를 얻고 있으니까. 종현씨의 유서를 보고 싹튼, 우리는 사실 비슷한 사람이었다는 내 마음 속 깊은 확신은 설명이나 이해를 거부하고 막연한 희망을 품게 한다. 그저 “너 때문이 아니야," 혹은 “너는 혼자가 아니야.” 같은 말을 아무에게서나 듣고싶은게 아니다. 완전한 공감을 원한다 — 머리로는 존재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을 마음으로는 온 힘을 다해 갈망하고 있으니, 게다가 이런식으로 비슷한 사람들이 결국 존재 했다는 것을 알게 되어 포기할 수 없으니, 너무나도 힘겨운 싸움이다.

종현씨, 수고 하셨어요. 내가 당신의 판단이 틀렸음을 증명할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