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스텔라 : 어린왕자와 여우 이야기

Irrationnelle
3 min readNov 1, 2015

--

“Si tu viens à quatre heures de l’après-midi, dès trois heures je commencerai d’être heureux.”
“네가 네시에 온다면, 난 세시부터 행복할거야.”

2014년 11월 8일 워드프레스에 작성했던 글을 옮겨왔다.

<인터스텔라>를 즐기는데 복잡한 물리학 이론이나 용어 등은 메인 요리를 더 맛있게 즐기기 위한 조미료 정도로만 받아들이면 된다.

정말로 중요한 것은 영화를 보기 전에 눈을 감고 잠시만 옛 생각에 잠겨 애틋한 누군가를 그려보는 것이다. 가족, 친구, 연인, 누구라도 좋다. 정성껏 몸단장을 하고, 무슨 이야기를 나눌까 고민하며, 채근하는 심장박동을 가라앉히며 약속 장소에서 그 사람을 기다렸던 그 날을 반추해보자. 다시 눈을 뜨면, 이 영화를 즐길 준비는 다 끝났다. 아직도 약간 불안하다면, 우주와 지구의 시간은 서로 다르게 흘러간다 정도의 과학적 상식만 기억해두도록 하자.

그리움과 기다림. 그리고 희구의 정서로 가득 찬 극의 서사는 어린 왕자의 여우 이야기를 떠올리게 한다. 네 시에 어린 왕자를 만난다면 여우는 세 시부터 설렘과 들뜬 마음으로 시간을 보낸다.

떨어져 있는 시간조차 여우는 행복하다. 그 시간은 바로 여우가 어린 왕자를 기다리는 시간이니까.

기다림의 시간에 좌절은 없다.

비록 우리는 약속이 깨지거나 파토가 결론으로 났을 때 좌절하지만,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기다림의 순간에 우리에게 가득 찬 것은 상대방을 희구하는 벅차오르는 감정 아닌가. 좌절은 기다림이 끝난 후 찾아오는 것이지, 결코 기다림의 시간에 좌절이란 없다.

차분했던 <인셉션>에 비해 감독이 서사를 풀어나가는 방식이 너무 감정적인 것이 아니냐는 비판이 있다. 돈이 많이 들어간 대작임에도 정작 이야기는 싸구려 ‘신파극’ 수준이라는 이야기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다. 꿈과 현실 사이를 방황하는 개인의 이야기와, 비록 이 장르에선 흔한 클리셰라 해도 기다리는 자와 귀환하려는 자 사이의 이야기는 그 감정의 무게가 실로 다를 수 밖에 없잖나. 제목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별과 별의 사이, 그곳에서는 희구의 감정과 귀환의 의지가 서로 뒤엉킨다. 이윽고 감정의 폭발. 거기다 음악마저 한스 짐머 아닌가. <인셉션>도 음악만은 상당히 격정적이었다는 걸 우린 아직 기억한다. 신파극이라고 해도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인터스텔라>는 기다림과 희구의 영화니까.

--

--

Irrationnelle

Avec la violence suffisante, il faut faire ta vie être l’adversit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