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의 책장 04.

Bookshelves Of Others 타인의 책장 04 
— 백희원의 책장.

왠지 그저 일상에서 벗어나 친구 집에 놀러간다는 느낌에만 집중해 간식을 사들고 버스를 탔다. 어제는 폭풍우가 쳤는데 오늘이 되니 유난히 날씨가 좋아 버스를 타고 가면서도 계속 밖의 모습을 구경했다.

보내준 주소를 다음 맵으로 찾아 가는데 예전에 놀러왔던 다른 친구의 집 바로 부근이라서 괜히 반가웠다. 초록색 대문 너머 보이는 희원씨를 발견하고 기쁘게 들어갔다.

방에 들어가자마자 수많은 감각-정보값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정신이 없었다. 현관 앞에 비 온 흔적을 스치듯 보고 복도식 집이라는 것도 잠깐 인지한 뒤 따라 들어갔다.

“이제 막 빨래를 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내가 도착하기 전의 장면을 상상해보았다. 희원씨와 함께 사는 룸메이트와 인사를 하며, 휴일을 방해한 건 아닌가 걱정이 시작됐다. 들고 온 간식을 어딘가에 올려두고 지금 방에 들어가도 되는 것인지 살폈다. 반쯤 열린 문으로 들어가는데 뒤에 놓인 짐 때문에 활짝 열리지 않는 문이 내 방의 모습과 같아 새삼스럽지 않게 느껴졌다. 드디어 방에 들어가 어정쩡하게 서서 여기저기를 둘러봤다. 어디선가 나는 향, 식물들, 의자, 책상, 걸어둔 옷들, 침대와 머리맡에 붙은 조약돌 포스터 등을 둘러보고 나자 그제서야 틀어 둔 음악이 들려왔다.


생각보다 공간이 너무 차분해서 놀랐다. 내가 상상했던 방의 모습이 왠지 분명하게 있었는데, 상상과는 달랐다.

봄의 볕이 생각보다 좋아서 불을 켤 필요도 없었고, 창문 뒤로 푸른 이파리들이 잘 보여 좋았다. 책상 위에는 자그만 화분이 세 개 있었는데, 크지도 않고 비슷하지도 않은 것들인데 왠지 식물원에 온 것 같이 존재감이 크게 느껴졌다.

책꽂이에는 책들이 빽빽하게 꽂혀있었다. 사실 책 뿐 아니라 방의 전반이 뭔가 성실하고 차곡차곡했다. 영화를 즐겨봤고 그에 관해 글을 써왔다는 사실은 알고 지낸 지 한참 뒤에야 듣게 되었다. 종종 희원씨가 영화 혹은 영화관과 관련해 썼던 글들도 읽고, 했던 활동들에 대해서도 때때로 (흘리듯 하는)이야기들을 들은 적이 있었다. 예상했던 것처럼 영화에 관한 책들을 몇 권 발견했다. 그런데 시집도 빼곡하리라는 것은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오랜 시간 수입없이 지내는 동안 누군가에게 선물을 하고 싶은 때가 생기면 갖고 있던 시집들을 하나씩 주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너무 멋지다고 소리내어 말하고 즐거워했다.

스누피 책들, 특히 우드스탁 관련한 조그만 소품들과 스티커들이 군데군데 노랗게 자리하고 있어서 전체적으로 차분한 톤의 방이 뻔하지 않았고 포근한 느낌도 주었다. 개인적으로 읽고 싶어하던 책들도 꽂혀있었고, 새로 발견한 책들도 있었고, 함께 가지고 있는 책들도 있었다. 한 사람이 자기 방에 늘어놓은 흔적들로 빼곡게 찬 공간을 보느라 마치 미술관에 온 것처럼 정신없이 시간이 갔다.


책상 왼편에는 두껍고 무거운 책들이 쌓여있었다. 그냥 쌓여있는데도 왠지 정돈되어 있는 것 같다고 느꼈는데, 역시 왼편은 대학원, 오른편은 기청넷 활동 관련한 책이라고 했다.

희원씨를 만나 이야기 하거나, 내가 아주 즐기는(!) 희원씨가 쓴 글을 읽을 때의 느낌을 방에서 거의 수십 배의 강도로 느낀 것 같다. 흐트러져 있는 것들을 잘 모아서 엮어내는 것에 강한 사람. 희원씨의 방 역시 흐트러지기 쉬운 삶의 면들을 조금씩 꾸준히 차곡차곡 모아서 엮은 공간 같다. 얼마 전부터 정리하는 습관을 들였다고 하기에는 너무 오랫동안 무언가가 축적되어 있는 장소. 축적은 되어있지만 부대끼지는 않는 장소. 차분하지만 무겁지 않은 장소. 밝은 노란 점들이 콕콕 박혀있는 게 앞다투어 나오지 않고 조화를 이루는 장소.

나란히 베개를 등에 놓고 앉아 이런저런 물건들을 꺼내어 들고 이야기를 하거나 들었다. 일본에서 사 온 스누피 잡지도 보고, 오래 전 프랑스에서 사왔다는 비싸고 두꺼워 괜히 산 것 같다는 영화 사진집을 펼쳐서 하나하나 보았다. 역시 27유로 주고 잘 샀다고 하면서 덮었다. 차와 간식을 먹고 마시면서, 돌아가며 친구의 물건들을 꺼내어 보고 얽힌 이야기들을 듣고 나와 만나기 전의 삶을 구경하는 시간. 누군가의 방에 둘러싸여 이야기 하는 시간은 특별하다.

이따금 몇가지 질문이 돌아오고, 나도 몇가지 이야기를 하게 되는 시간이 있다. 그리고 사랑스러운 간식들. 친구로부터 이런 소소한 지혜들을 배워가는 시간이 좋다. 친구의 세계에 방문해서만 배워갈 수 있는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다시 또 깨닫는 시간.


책상 아래에서도 몇가지를 찾아볼 수 있었다. 역시나 흐트러진 듯 차곡차곡.


몇가지 흥미로운 책들도 발견했다. <존 버거의 글로 쓴 사진>은 빌렸고, 다른 두 권은 발견만 하고 다음 번에 읽어보기로 다짐했다.

날이 따뜻해지고 해가 눈에 띄게 길어졌다. 희원 방의 창 밖 풍경은 매우 아름답다. 창이 방에 미치는 영향이 크다고 믿는 나는 창 밖을 계속 쳐다봤다. 사진으로는 잘 담기지 않는 이파리들의 움직임이나 햇볕의 색 같은 것들이 아쉽다. 한참 방에서 놀다 결국 밖이 신경쓰여 산책을 나가기로 하고 셋이 같이 나섰다.


친구의 시간과 흔적이 담긴 곳에 다녀오니 에너지를 가득 받은 것 같다. 내일은 비록 월요일..이지만 여러가지 잊지 않고 바로 간직하고 싶어 바로 사진과 글을 남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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