샐러드 데이즈. Salad Days.
글을 쓰려고 벌써 이틀을 별렀다. 그리고 그렇게 이틀을 까먹었다. 피곤에 절었던 금요일, 낮잠에서 깨어나서 아주 오랜만에 ‘글을 쓰지 않고는 못 배기겠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러나 막상 그런 마음이 드는 게 반가우면서도 너무 두려워 친구들에게 연락까지 했다.
그렇게 피곤을 핑계로 하루가 지나고, 이 게시물의 제목만이라도 미리 써 두자는 마음으로 ‘Salad Days.’를 적어두었다. 어제는 셰익스피어 사후 400주년 기념일이자 책의 날이었다. 나는 어제 처음으로 ‘Salad Days’가 그가 만들어 낸 말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그보다 4.5세기나 늦게 태어난 나는, 맥 드마르코MacDmarco의 노래 덕에 이 어구를 알고 있었을 뿐이다. 사실상 실제로 알지 못한 거라고도 할 수 있다. 차라리 아예 몰랐다면 좋을텐데. 저 말은 얼마나 많이 인용되고 재사용 되었을까? 그런데 나는 아무런 뜻도 모른 채 400년 뒤에 만들어진 노래를 흥얼거렸다. 본질과 다른 것들을 핥고 있는 느낌. 요즘에 이 세계를 살아가는 느낌이 그렇다.
요즘 그런 생각을 많이 했다. ‘새로운 것’이 과연 존재하는가. 적어도 그냥 둘러보기 위해 찾아내는 것 조차 어렵지 않나. 특히 이 시대의 새로운 것들은 인간이나 세계에 이로운 지를 점점 더 모르겠다. 나 자신도 마찬가지다. 글을 쓰는 것, 새로운 것을 상상하고 생각하는 것, 탁월한 무언가에 대한 욕구와 소비가 전부 과거의 탁월한 것들에서 결국은 한 뼘도 벗어나지 못한다는 기분. 존 버거의 글로 쓴 사진을 보면서, 막스 프리쉬의 몬타우크를 보면서, 수전 손택이라는 사람을 보면서 황홀한 동시에 늘 힘이 쭉 빠지곤 했다. 동시에 Casey Neistat이나 몇몇 예술가들의 작업을 보면서, 온전히 새롭지 않은 가운데 탁월한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진득함이나 진정된 마음이 필요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했다. 우리 세대는 좀 더 노인처럼 살아가는 법을 터득해야 하는걸까?
꽤 많은 것들을 멈추고 지냈다. 더 나은, 아름다운, 탁월한 뭔가에 대한 아주 추상적인 수준의 기대감이 지금까지의 나를 끊임없이 추동해왔다면, 최근 그런 것들이 불가능한 것 아니냐는 의심 속에서 그리고 일상의 자극 가운데서 동력이 쇠해져 버렸다. 어쩌면 오늘 친구와 이야기 한 것처럼 그저 내 마음이 잠시 쉬고 있을 뿐인지도 모르겠다. 생각하는 것, 상상하고 꿈꾸는 것, 그것들을 실제로 해보는 것, 가공하는 것, 평가를 받는 것.. 이 과정 하나하나가 나를 들뜨게 만듬과 동시에 잠못들게 하기도 했다. 전에도 썼듯 한 때는 생각을 그만하게 해달라고 빌었던 적도 있었다. 잠을 잘 못자서 건강을 심하게 잃기도 했다. 이제 나는 늘 잠이 쏟아진다. 하품도 자주하고, 생각도 적당히 하다 끊어낼 수 있다. 책장을 몇 번 넘기다 덮는 순간이 많아진다. 생활은 안정과 균형을 찾았고, 매우 안온했다. 내 삶에서도 안정과 균형이 나올 수 있다는 게 신기할 따름이다. 어쨌든 늘 갖기를 소망해 마지 않던 안정적인 생활과 마음의 균형을 쥐고 놓기가 싫..다.
동시에, 끝없이 펼쳐졌던 지적 욕구/허영과 더 나은 것에 대한 추구가 점점 그리워지고 있다. 문제는 균형잡힌 마음과 안정적인 생활과 병행할 수 있을 지 의문이라는 점이다. 누군가의 말처럼 그 두가지는 병행이 불가능한 것일까? 그치만, 얻는 게 있으면 잃는 것도 있게 마련이다-라는 말은 존재의 겸손함을 표현하기 보다는 스스로를 온전히 설득하지 못한, 이유를 찾기 어려워 대충 둘러대는 변명이나 귀찮은 체념은 아닐까?
워크샵을 끝내고 나서도 참 많은 생각이 들었다. 일단은 너무 오랫동안 사람들과 인텐스한 교류를 해야 하는 상황에 처하는 것이 더 이상 쉽지 않은 나를 발견했다. 아마도 나는 점차 어른이 되가는 중에 있는가 보다. 예전에는 실패할 것을 무릅쓰거나 안될 것을 알면서도 아기들처럼 자꾸 다가가서 제 손으로 직접 만지지 않으면 견디지 못했다면, 이제는 거리두는 법을 대충이나마 구사할 수 있는 정도가 되어버렸다. 이에 더해 타인과 거리를 가지는 것에 익숙해져 버렸다. 자기 자신과 혼자 있는 것을 견딜 수 있을 때 어른이 된 것이라고 생각했고, 여전히 그렇게 생각하며, 여전히 완벽히 되는 것은 아니지만 역시 나 혼자 있는 것만을 편안해 하는 삶은.. 온전치 않아 보인다. 아무튼, 사람들과 부대끼는 시간이 다해갈수록 피곤해지고 점차 나는 탈출해버리고 싶은 마음이 커져 끝나갈 즈음에는 말을 잃고 말았다.
이에 더해, 언제나 힘든 평가의 시간. 나에 대한 평가든 타인에 대한 평가든, 좋든 좋지 않든 수치로 이루어지는 평가/기준에 맞추어 이루어지는 평가는 어떻게든 사람의 마음을 좀먹는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느끼고. 짧은 시간 동안 개인평가/조직평가/프로젝트평가/비전 수립/다음 분기 계획/개인 과제 등이 전부 이루어졌는데, 평가에 이어 너무 쉽게 수없이 늘어놓을 수 있는 해야 할 일들과 주어진 과제들을 떠안고 사람들과 헤어지는 길은 너무 후덥지근하고 피곤했다.
한편, 탁월성에 대한 고민이 깊어졌다. 지금까지는 늘 탁월한 것들을 지향해왔다. 듣는 음악이나 작은 생활의 일부마저 내 나름의 탁월함에 대한 기준을 가지고 선택되었고, 집행되었다. 이런 마음이 나를 괴롭게 하는 동시에 성장시키기도 했다. 늘 더 나은 것들을 보고, 쓰고, 만들고, 배우고, 읽고, 나누고 싶었다. 불변의 아젠다 같은 것을 잘 믿지 않는 나에게 이것만은 왠지 ‘옳은 것’이었다. 몇 년의 시간을 ‘완벽하지 않아도, 매번 탁월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걸 스스로에게 가르치려고 노력하면서 보냈고, 4–5년의 시간이 흐른 뒤 예상치 못하게 나는 그 지점에 와 있다. 그런데.. 왠지 마음이 편하지가 않다.
워크샵을 하며 똑똑하거나, 경험이 많은 몇몇 사람들이 보여주는 역량의 크기를 마주했다. 내가 하는 일은 정치를-그를 통해 사회를-사람들이 살아가는 세계를 바꾸고 싶어하는 일이다. 당연히 굉장한 일이고 그렇기 때문에 그만큼 탁월한 역량이 필요하다. 그러나 나는 전문적 지식을 갖추지도, 엄청나게 특출난 경험을 가지지도 않았다. 심지어 지금은 탁월함에 대한 의지마저 딱히 없어졌다. 내 의지는 몇 년간의 고된 일정을 마치고 잠시 휴가를 떠나있는 것 같다.
그러던 와중에 어제 영화 <피아니스트 세이모어의 뉴욕 소네트>를 보았다. 예상치 못하게 영화는 ‘어떤 탁월함’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었다. 아니, ‘탁월함’의 또다른 모습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다고 해야할까? 음악적 재능을 온전히 자신의 삶과 공명시켜버린 대가의 이야기. 그는 말하는 방법, 걷는 방법까지 모두 음악과 연결시켜버렸다. 그는 글랜 굴드의 괴팍함이 음악을 파괴하는 예시를 들며 많은 것을 이해시켜 버렸다. 천재적 예술가의 탁월함과 일상에서의 괴팍함이 삶을 양분시키고 괴리를 넓힌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몰락한다. 결국 그는 탁월한 재능과 자신의 성정을 함께 유지하고자 한다. 세이모어는 일찍 은퇴해 혼자 공부하고 연습하고 후학을 양성하는 일만을 해왔다. 물론 여전히 작곡을 하고 연습을 해 대가의 자질은 날카롭게 남아있지만 오랫동안 특출나게 스포트라이트를 받지도, 많은 돈을 벌지도 못했다. 그는 자신의 천재적인 재능을 다른 것이 아니라 자신이 가진 재능 그 자체에 다시 소여한다. 명성이나 부를 등지고 고독한 삶을, 자신의 천재성과 음악을 지속하기 위한 감성 유지를 위해 노력한다.
나는 몇 년 간 탁월성에 따라오는 ‘지독함’을 불편해했다. 결국 이런 천재성을 가지고 있기 위해, 유지하기 위해, 더 나아지기 위해 시간을, 삶을, 자기 자신을 쏟아붓는 것. 물론 자신의 기준에 만족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 사람이 보여주는 탁월성은 물론 아름답지만, 뭐랄까. 저게 맞는 걸까? 하는 의문도 늘 가져온다. 반대의 경우-탁월성을 가지고 다른 목적을 이루는 것에 대해서도 늘 같은 질문이 가능하지만 말이다. 하지만 이 지독함을 불편해하면서 나는 성장을 멈춘 건 아닌가 불안해한다.. 지독하고 탁월한 삶. 안온하고 평온하지만 성장은 더딘 삶. 꼭 선택해야만 하는 걸까?
‘탁월함’이 개인의 삶, 세계의 논리와 화해할 수 있는 방법은 없는걸까. 나야말로 최고의 욕심쟁이인걸까?
마음의 나이와 역량의 나이.
한쪽은 너무 늙었고 한쪽은 너무 부족해서 하나가 하나를 감당하기 어려워한다. 서로서로.
라고, 금요일에 거친 생각을 잊지 않도록 메모를 해 두었다.
내가 하는 일에 관한한, 나의 마음의 나이는 이미 내 나이를 훌쩍 넘은 듯 하다. 꽤 오랫동안 고민했고, 꽤 오랫동안 그 고민들에 탁월하기를 요구해서 고민의 면면이 닳아서 맨들거린다. 그런데 고민에 뒷받침되는 역량의 나이는 너무 어리다. 그냥 딱, 학부 졸업생 정도. 그래서 내 역량이 나의 고민을 따라주지 못하고, 내 고민은 내 역량 위에 서기를 어려워 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나도 석사를 하면, 밤을 새워서라도 뭔가 공부하거나 만들어내면, 과잉활동에 취해있다보면, 탁월함이 고민의 나이를 따라갈 수 있을까? 그러지 말자고 다짐했던 것 같은데. 다짐을 뒤집어야 할까?
아니면, 내가 일하고 있는 이 분야가 그저 유난히 탁월함을 쌓지 않았던 분야인 것일까? 그런데, 내가 탁월함을 갖춘 다른 분야가 있나? 고민과 행동을 이분화해서 놓고 보면, 나는 늘 고민이 행동보다 넘쳐서 글쓰기도, 그림도, 디자인도, 공부도 전부 탁월한 하나는 없다. 슬프다. 나는 겁이 너무 많았던 걸까.
하지만 여전히 고민이다. 내 고민의 크기와 맞출만한 탁월한 행위를 해내기 위해 무언가 한다고 해도, 이게 지금 내가 원하는 탁월함의 분야인지에 대해 확신이 없다. 어떤 접점을 만들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그 접점이 어디서 어떻게 나타날 지는 모르겠다. 정말 잘 모르겠다..
늘 운좋게 관심사-고민-행동의 주제나 분야들이 우연처럼 연결되어 온 나에게, 너무 새로운 분야가 나타났다. 추상의 영역이 아닌 실제 정치의 영역에 대해 아는 바가 없고, 따라서 어떤 행동이 맞을 지에 대해서도 쉽게 계산되지가 않는다. 게다가 절대적으로도 어려운 분야다. 가장 창의적이어야 하지만 동시에 창의성이 비집고 들어오기 어려운 곳, 가장 많은 공부와 많은 행동이 필요한 곳, 그렇다면 공부를 위한 시간이 필요하지만 즉각적인 행동을 통해 사람들의 삶에 빠르게 영향력을 미칠 수 있어야 한다는 역설, 아니 조급함이 존재하는 곳. 중요하다고는 생각했지만 나 자신이 주체로 무언가 하는 것에는 관심있지는 않았던 분야.
어렵다. 1년 뒤 그리고 2년 뒤 고민의 모습은 어떻게 변해있을까. 그리고 나는 어떤 탁월함을 기르게 되었을까. 얼른 시간이 가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