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론 조사와 행동

최근 발표된 한 여론 조사 결과를 보고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사형제 존폐를 주제로 한 그 여론 조사에서는 무려 67.4%의 응답자가 ‘사형제 유지’를 지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반대의견 24.3%의 거의 세 배에 가까운 수치다. 게다가 현재 수감중인 사형수들에 대한 사형 집행에 찬성하는 의견도 64.1%로 반대 18.5%의 서너배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비록 강호순 직후에 실시된 조사기 때문에 여론이 왜곡되어 나타날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지나치게 높은(또는 지나치게 낮은) 수치다. 우리가 사는 이 나라는 국민 다섯 명 중 세 명 이상이 범죄자를 ‘죽여버리는’ 야만적 처벌 방식을 선호하는, 전근대적 국가인 것이다. 아마 콩고나 짐바브웨에서 같은 주제를 갖고 여론 조사를 해도 저것보다는 낮은(또는 높은) 수치가 나왔을 게다. 부끄러운 일이다.

여론 조사를 보며 놀랄 일은 이외에도 많다. 가령 절반 이상이 반대 의사를 밝히는 양심적 병역거부자에 대한 대체복무제 도입 여론 조사 결과를 보라. 온갖 방법으로 병역을 기피하는 높으신 분들이 수두룩한 사회에서, 수십년 동안 옥살이를 해온 청년들이 앞으로는 감옥 대신 3년 이상 소록도나 요양원에서 봉사활동을 하는 것으로 갈음하겠다는데도 허락할 수가 없단다. 또 있다. 걸면 걸리는 국가보안법 폐지에 대한 여론 조사 역시 반대 의견이 찬성 의견을 압도한다. 진짜 간첩은 다른 법 조항으로 얼마든지 잡아낼 수 있다고, 사상과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악법이라고 아무리 홍보해도 여론은 역전되지 않는다. 물론 이런 ‘기이한’ 여론 조사 결과의 결정판은 지금같은 판국에도 30%대 중반을 넘나드는 ‘가카’의 지지율 조사일 게다. 장담하건대, 가카께서 몸소 사람을 때려 죽이는 광경이 전국적으로 방송을 타도 저 지지율은 꿈쩍도 하지 않는다는데 십팔원을 건다.

그러면 이런 여론 조사 결과들을 놓고 내릴 수 있는 결론은 무엇일까. 일부의 주장처럼 ‘국개론’을 부르짖으며 국민의 종자를 개량하는 것을 목표로 삼아야 할까. 그보다는 슬라보예 지젝(Slavoj Zizek)의 지혜를 빌리는 편이 낫겠다. 지젝은 안티고네의 시민 불복종을 예로 들며 사회 지배적인 ‘통념’에 대항하여 진리를 주장하는 ‘행동’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그의 구분을 따르면 과거에는 진리가 객관적인 영역에/통념이 주관적인 영역에 포함되었지만, 근대 이후에는 오히려 지배적인 통념이 사물이 ‘실제 존재하는 방식을’ 반영하는 ‘객관적인’ 것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그러면서 지젝은 이 통념의 대표적인 사례로 흔히 사람들이 갖고 있는 생각을 반영한다고 여겨지는 여론 조사를 거론한다. 실제적인 ‘행동’을 통해 개입하면 이 여론 조사가 반영하는 현행적인 상태에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게 지젝의 주장이다.

지젝이 이야기하는 ‘여론 조사 결과 인기 없는 것으로 나타난 급진적 조처’는 정확히 한국적 현실의 ‘소수여론’ -사형제 폐지, 대체복무제 도입, 국가보안법 폐지 등- 에 들어맞는다. 그렇다면 여론 조사 결과 다수의 의견에 따라 사형을 즉각 집행하고, 병역거부자를 감옥에 보내고, 국가보안법을 찰지게 적용하는 것이 능사일까? 지젝의 견해에 따르면 그렇지 않다. 그는 여론 조사에는 ‘맹점’이 있다고 지적한다. “’인기 없는’ 것으로 나타나는 그 제스처 자체가 실제로 일어났을 경우에 그것이 대중의 여론에 가하게 될 충격을 감안”해야 한다는 게 지젝의 주장이다. 다시 말해 사형제 폐지나 대체복무제 시행, 국가보안법 폐지 등의 제스처가 “실제 사태로 감행된 이후에 대중의 여론”은 “결코 그 이전과 같은 것일 수가 없다”는 얘기다.

지젝은 이런 주장의 근거로 과거 미국 대통령 후보로 나선 에드워드 케네디를 예시한다. 그가 출마 선언을 하기 전에 실시된 여론 조사는 그가 틀림없이 당선될 것으로 나타났지만, 막상 공식 출마 선언을 하고 나자 지지도는 급속도로 추락했다. 출마 선언이라는 ‘행동’이 실제로 나타난 결과 유권자들은 그에 대한 지지를 진지하게 고민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고, 그 결과 여론의 지형 전체가 뒤바뀌어버린 것이다(이와 비슷한 한국의 예는 지난 대선에 출마했던 문국현을 들 수 있겠다). 또 지젝은 대중적 인기가 높은 한 정치인이 여론 조사 결과를 무기로 소속 정당을 협박하는 경우를 예로 든다. “내 정책을 지지하지 않으면 탈당하겠다”던 정치인이 막상 실제로 탈당을 결행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그와 같은 ‘행동’은 당과 정치인에 대한 유권자들의 인식 전체를 바꾸어놓게 되고, 일단의 정치인 무리부터 당의 공식 기구에 이르기까지 넓은 범위에 파장을 미칠 것이며, 그 결과 대중의 여론은 탈당 이전에 했던 조사 결과와는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게 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여론 조사 결과에서 나타난 여론을 대중이 실제로 머리 속에 갖고 있는 생각을 모아놓은 집합이라고 단정지어서는 안 된다. 지젝이 지적하듯이 여론은 ‘자기반영적인 것’이며 ‘여론에 대한 여론’으로서의 성격을 지닌다. 대중들은 자신이 갖고 있는 생각을 이야기하는 대신 이미 발표된 여론조사 결과를 추종하는 경향이 있으며, 자신의 표가 사표가 되거나 자기 의견이 소수의견이 되는 것을 기피하는 면이 있다. 가령 사형제 여론조사에서 폐지 의견이 15%로 나타났다면, 대중들은 그 의견은 실현 가능성이 없는 것이라고 여겨 의식적으로 선택에서 배제해 버린다는 것이다. 여론조사가 여론을 반영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여론이 여론조사를 반영하는 기묘한 역전이 여기서 성립된다.

지젝이 말하는 ‘행동’의 중요성이 나타나는 것이 이 지점이다. 구체적인 행동을 통한 개입은 바로 그 실현 불가능해 보이던 소수의견을 ‘가능한’ 것으로 만들고, 그 결과 여론은 행동 이전에 행한 여론 조사 결과와는 전혀 다른 형태로 나타나게 된다는 것이다. 지젝은 그 예로 과거 칠레의 독재자 피노체트가 영국에서 붙잡힌 사건을 거론한다.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절대적 권력을 누리던 독재자가 초라한 늙은 범죄자로 전락한 모습이 공개되자, 칠레에는 예상보다 훨씬 더 큰 해방적 효과가 찾아왔다. 사람들은 쉬쉬하고 두려워하는 것을 그만두고, 피노체트를 본국으로 인도해서 기소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는가 하면 독재 시대 일어난 고문과 실종 등을 적극적으로 폭로하기 시작했다. 피노체트의 체포라는 ‘행동’이 독재자의 처벌이라는 불가능해 보이던 ‘가능성’을 현실로 만들면서 여론을 둘러싼 지형 전체가 폭발적인 변화를 일으켰던 것이다.

사형제나 그 외의 ‘급진적으로 보이는’ 조처들과 관련해서도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대표적인 인권국가로 여겨지는 프랑스에서도 사형제가 폐지될 당시에는 존치 의견이 폐지 의견을 압도했다. 물론 지금은 르펜과 그 졸개들을 제외하면 누구도 사형제가 부활해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사형제의 폐지는 일각에서 우려한 것과 달리 강력범죄의 증가와는 아무 관련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같은 조처로 인해 사회 전반에 인권 의식이 뿌리내리는 결과를 낳았기 때문이다. 대체복무제 역시 가까운 대만의 경우 도입 초기만 해도 반대 의견이 다수를 차지했지만, 시행 후 여러 해가 지나면서 여론은 긍정적인 쪽으로 돌아선지 오래다. 국가보안법의 폐지는 또 어떨까. 국보법 폐지라는 ‘행동’은 한국사회를 지배하는 극우파의 헤게모니를 말소하고 사회 전체에 사상과 표현의 자유가 온전한 기능을 하도록 촉직할 것이다. 그렇게 해서 국민 다수가 ‘당연한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사회로의 전환이 이루어진다면 그때의 여론 조사는 국보법 폐지 이전의 조사와는 전혀 판이한 결과를 낼 게 분명하다.

물론 이런 결론에는 핵심적인 질문 하나가 결여되어 있다. 과연 어떤 특정한 행동 -급진적인 조처- 이 윤리적인 성격을 띄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판단하는 기준이 되는 것은 무엇인가? 라는 질문 말이다. 왜냐하면 이와 같은 논의를 완전히 오독할 경우, 사이버 모욕죄나 한반도 대운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행동’이 여론에 우선권을 갖는다는 주장이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이 글에서는 구체적인 답을 내리기가 어려울 것 같다. 다만 분명한 것은 행동은 여론의 지형 전체를 바꿔놓을 뿐만 아니라 지젝의 말처럼 “스스로의 윤리성을 비춰보는 판단의 기준 자체를 재-창조한다”는 점이다. 따라서 특정한 행동이 낳는 결과에 대해 새롭게 창조된 기준이 아닌 기존의 판단 기준을 동원해 평가하는 것은 사실상 무의미한 일이다. 이러한 행동을 하는 주체를 민주주의적인 대의와 어떻게 조화시킬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보다 면밀한 고찰이 필요할 것 같다.

이 글은 슬라보예 지젝의 저서 [전체주의가 어쨌다구?]에서 도움을 받았습니다


2009/06/28에 작성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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